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24
제24화 – 미친 거 아뇨?
나는 노파에게로 갔다.
앞줄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 황급히 길을 터주었다. 내가 곧장 그녀에게로 향하자 노파가 등을 돌려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어딜 가는 거요?”
노파는 대꾸 없이 계속 움직였다.
나는 갈등했다. 쫓을 것인가. 하던 일을 마저 할 것인가.
내 선택은 전자였다.
절구통 여인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져버려 대중의 열기를 불러일으켜 청화를 피워 올리려던 계획은 파투가 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반면 노파는 지금 놓치면 다시 보기 어려울 터였다. 이제부터는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까.
위장을 포기했는지 노파답지 않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인파를 헤치고 나가던 ‘양 관주’가 뒤를 돌아보며 사나운 눈빛을 쏘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에게 붙었다.
***
노파가 양 관주인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절구통 노인이 일으킨 소동에 섞여 날아든 기다란 한숨 소리 덕분이었다. 소리의 진원지로 눈길을 보낸 순간 잡힌 이는 엉뚱하게도 처음 보는 노파였다.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전날 의뢰인을 가장해 주태의 창고에 들어왔던 살막의 살수처럼 양 관주도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이 중요했다.
***
궁금했다.
어째서 양 관주는 보양을 탈출하는 대신 은신을 택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편이 자신의 안전에 더 낫다고 판단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걸까.
이유가 뭐건 나는 양 관주와의 뜻밖의 재회가 사뭇 반가웠다. 그녀에게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설을 하다 말고 자리를 떠난 나를 비난하는 웅성거림이 번졌지만 개의치 않고 줄기차게 양 관주를 쫓았다.
어느덧 인적 드문 거리로 접어든 양 관주가 몸을 돌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내가 아는 이와 목소리가 똑같구려. 혹시 그녀의 모친 되시오? 그녀는 자하옥관의…….”
“쉿!”
검지를 입술에 대더니 양 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따라와요. 입 다물고.”
나는 기꺼이 그녀의 요청에 응했다.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이른 곳은 매음굴이었다.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시간상으로는 대낮임에도 동굴 안은 방사를 치르는 남녀가 토해내는 열락의 신음성으로 가득했다.
다들 제 일에 열중하느라 양 관주와 나의 입굴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은밀히 우리를 따르던 두 명의 호위가 매음굴 밖에 멈춰 섰음을 알았다. 보초 노릇을 하려는 걸까. 이 역겨운 공간이 양 관주의 은신처인 건가.
동굴 안쪽에 난 수십 개의 통로 중 하나로 들어간 양 관주는 걷고 또 걸었다. 마치 개미굴 같았다. 가다가 갈림길이 숱하게 나왔고 양 관주가 택하는 방향은 불규칙했다. 나는 경로 외우기를 포기했다.
한 식경쯤 걷다가 인내심이 바닥 난 내 입에서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까지 가는 거요?”
내 질문을 묵살할 줄 알았는데 양 관주가 돌아섰다.
“대체 왜 돌아온 거예요?”
“그러는 양 관주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요? 족히 일천 리는 달아났을 줄 알았는데.”
“묻는 말에 답이나 해요.”
“굳이 피신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소.”
“무슨 소리죠?”
“간밤에 창천검을 만났소.”
희미한 어둠 속에서 눈알을 쏟아낼 듯 놀란 양 관주의 얼굴이 보였다.
양 관주는 한참 후에야 충격을 추슬렀다.
“오 공자가 이렇게 무사한 것은 그를 이겼단 뜻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소. 승부를 보지 못했다고나 할까.”
전부를 밝힌 건 아니지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아! 나는 오 공자가 창천검과 비등한 무력의 소유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이 일이 알려지면 세상이 뒤집히겠네요.”
찔렸다.
하지만 양 관주로 하여금 내 부탁을 들어주게 하려면 허세를 부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며칠 내로 그 이상의 무위에 도달할 터였다.
“이젠 더 이상 오 공자를 의심하지 않을게요. 사실 나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오 공자의 제안을 검토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냉정한 태도를 견지한 건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오 공자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수천에 달하는 생명을 책임지고 있어요.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그들에게도…….”
나는 양 관주의 장광설을 끊었다.
“알겠소. 그건 그렇고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뭔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요.”
“양 관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내가 부탁의 내용을 밝히자 양 관주의 눈썹들이 이마 가운데로 몰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으리라.
***
나는 양 관주의 정보력을 빌어 어제 내 사냥을 피해 달아난 제물들을 찾아낼 심산이었다.
그녀처럼 보양을 떠나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있는 자들도 적지 않을 터였다. 그 수가 절반만 되어도 청화를 상당히 벌충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부족한 양은 보양의 백성들로부터 채울 참이었다. 하지만 대중 연설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절구통 여인처럼 내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훼방을 놓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내 면전에서 난동을 부리고도 그녀가 무사했으니 그를 빌미로 설치는 자들이 나올 게 불 보듯 뻔했다.
내 대안은 천민촌이었다.
전날 화상을 입은 여인의 원을 풀어준 후 그녀가 지도자로 있는 마을의 사람들이 내게 집단적으로 감사를 표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내 의뢰인들의 절대다수가 하층민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민초들이 나에게 호의를 표출해주리라 기대했다.
양 관주가 붙여준 길잡이를 따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섯 군데의 빈민촌을 들렀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일단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화상 여인의 마을이 예외였던 것이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흑도 패거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좀 비겁한 수법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강행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흑사파와 백걸방의 흉한들을 앞세워 다시 찾아가자, 그리고 그들이 집합을 명령하자 순식간에 수백 명의 인파가 공터로 몰려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향후 흑도들의 행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알렸다.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건달들은 알아서 땅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내 명을 받들겠다고 복창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사람들은 내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들이 일으킨 청화는 강렬하지도, 선명하지도 않았지만 내겐 마른논의 단비와 같았다.
보양을 떠나지 않고 보양 내부에 숨어있는 이들의 수는 열한 명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테지만 양 관주가 찾아낸 건 그들이 전부였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그들을 처리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나는 그들보다는 군중에 의한 곤기의 확충에 주력했다.
우려했던 대로 절구통 여인처럼 나에게 원성을 쏟아내며 달려드는 자들이 속출했지만 모조리 혈도를 찍어버리니 이틀 후부터는 잠잠해졌다.
보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오후 드디어 건곤기의 균형을 얼추 맞췄다. 바라던 이상의 성과였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봇물이 터지려면 아직 ‘불꽃들’이 더 필요했다. 이 상태로는 광마도든 창천검이든 대적이 쉽지 않을 터이기에 고민을 거듭하다 일단 보양을 떠서 시간을 벌려고 하던 차에 뜻밖의 만남이 난제를 풀어주었다.
***
그 만남을 언급하기에 앞서 외부의 상황을 짧게 알아보자.
먼저 광풍혈사대와 정검문의 동태.
양 관주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광마도는 고작 두 명의 측근만 대동하고 보양행에 나섰다고 했다. 하나는 팔보추혼(八步墜魂) 진서(陳瑞)였고 다른 하나는 막북귀검(漠北鬼劍) 한구(韓龜)였다. 그들은 공히 육십 대이고 무위는 광살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만약 정검문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전력상으로는 우리도 꿀릴 게 없기 때문이었다. 팔 단계에 들어서지 않더라도 나는 석진과 연수한다면 능히 광마도와 대적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광마도의 방수가 둘이니 석진의 친우들이 셋만 가세한다면 우리 쪽의 전력이 오히려 우세할 터였다.
변수는 당연히 정검문이었다. 현재로서는 특별한 기미가 없다고는 하나 그들이 광마도의 도래에 맞춰 검사들을 보양에 파견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창천검이 또다시 직접 나선다면 무조건 튀어야 했다.
정검문이 변수라고 했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전서구를 받은 열세 명 중 적어도 절반은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올 거라던 석진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그가 정한 닷새라는 기한 내에 보양에 나타난 이들은 셋에 불과했다. 청풍고협(靑風孤俠) 정민(鄭閔), 삼절수사(三絶秀士) 공인(孔仁), 그리고 한월노모(寒月老母) 차연(車燕)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석진은 친우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마협’을 지키기 위한 의로운 싸움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고 했다. 정검문은 몰라도 내가 광풍혈사대와 척을 졌음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졌을 터였다. 누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그 광포한 이리 떼에 맞서려고 할 터인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셋이라도 와 준 게 다행이었다.
청풍고협과 삼절수사는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내 말투 때문이었다.
석진이 중간에서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며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애를 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두 중늙은이들은 내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며 석진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합류를 거부하고 보양을 뜬 건 내 탓이 아니었다. 광풍혈사대만이 아니라 정검문도 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둘 다 기다렸다는 듯 등을 돌렸다. 어떻게 자기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석진의 항의에는 같은 말로 되받아쳤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릴 죽일 참인가, 철웅?”
석진은 그들이 자신에게 입은 구명지은을 망각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그에게 반박하거나 언쟁을 벌이지 않고 내빼는 데 급급했다.
켕기는 데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이는 한월노모였다.
그녀는 별호나 이름과는 상반된 여인이었다. 차갑기는커녕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했고 제비라는 이름과는 달리 엄청난 비만에 거구였다.
“어쩜 예쁘기도 하지. 게다가 고자라며? 세상에 이렇게 완벽할 수가. 걱정 마라, 아이야. 그 사막의 개떼들이 오기만 하면 이걸로 대가리들을 부숴줄 테니까.”
장정 둘이 맞들어도 쩔쩔맬 것 같은 묵직한 철장(鐵杖)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며 노파가 큰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나는 고자가 아니오.”
노파가 파안대소했다.
“파하하핫. 아니긴, 다 들었는데. 그래서 너를 돌보고자 하는 게 아니겠느냐, 아이야? 네가 그 흉측한 물건을 놀리는 종자였다면 저 색골이 뭐라고 지랄하건 말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게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석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할망구, 미친 거 아뇨?’
석진은 내 눈빛이 전하는 바를 못 알아본 척했다.
***
그 만남은 내가 보양으로 회귀하고 엿새째 되는 날 이루어졌다.
양 관주의 정보에 따르면 광풍혈사대의 삼인이 오연에서 목격되었다던 날이었다. 거리와 이동속도를 감안하건대 그들은 늦어도 내일 밤에는 보양에 이를 터였다.
정검문에서는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이 개입할는지 방관할는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광마도의 도래가 임박했기에 이제는 진퇴를 결정해야 했다. 석진과 양 관주는 내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
나는 다음날 해뜨기 전까지는 알리겠다고 이르고 야산의 동굴에서 운공에 들었다. 그러나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운공을 중단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연한 월광 아래 신기루가 일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