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22
제22화 – 답이 되었는가?
나는 어리둥절했다.
갈대숲에서 튀어나와 창천검에게 다짜고짜 강맹한 권풍을 날린 괴인은 다름 아닌 석진이었다.
나와 한편이 되기로 했으니 그가 창천검을 공격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제 새벽 강북사우의 일인인 삼절수사(三絶秀士) 공인(孔仁)을 끌어들이기 위해 백중으로 떠났던 그가 난데없이 이곳에는 어떻게 나타났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가로이 전후 사정을 추론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창천검과 부딪치자마자 석진이 튕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무력의 열세가 확연했다.
나는 뜻밖의 사태에 황망해하는 와중에도 석진을 손쉽게 격퇴한 창천검이 그에게 가일수하기 전에 지풍을 난사했다. 석진을 끝장내려 욕심을 부리다간 자신이 벌집이 될 우려가 있었기에 창천검은 검을 돌려 화살 비처럼 날아가는 내 지풍들을 쳐냈다.
“헉!”
내가 터뜨린 경악성은 창천검의 신들린 듯한 검공 탓이 아니었다. 검막에 밀려났던 석진이 내게로 방향을 돌린 창천검에게 또다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무모할 수가. 마치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불덩이에 날아드는 불나방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석진은 금세 창천검이 펼친 검망(劍鋩)에 갇혀 누란지위에 처했다. 내버려 두면 속절없이 목이 떨어질 터였다.
후유증을 염려해 선령을 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석진은 물론이고 나까지 위태로워질 게 뻔했기에 나는 개안(開眼)을 유지한 채 지풍을 쏘아냈다. 막무가내로 날리는 것 같았지만 내 지풍들은 선령의 권능에 힘입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창천검도 지풍들을 경시하지 못하고 석진을 쪼개기 직전이었던 검을 돌려야 했다.
나는 성가신 방해꾼이 된 내게로 짓쳐 드는 창천검과 격돌하지 않고 측면으로 이동했다. 창천검이 예상했다는 듯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나 또한 그의 일수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상체를 비틀어 흘려냈다.
창천검의 수읽기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내가 회피한 곳에 무형 검기를 함정처럼 깔아두고 있었다. 선령의 공능 중 하나인 통찰안(洞察眼)이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걸려들었을 터였다. 그랬으면 발목이나 무릎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으리라.
내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노림수를 빗겨내자 창천검이 신음성을 흘렸다. 아니면 경탄성인가.
어쨌거나 짧은 기음을 토해낸 창천검은 중심이 흔들린 나에게 검기를 꽂지 못하고 동체를 회전했다. 그에게 황소처럼 돌진한 석진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신형을 추스른 나는 즉각 석진을 거들었다. 이번에도 일초 만에 그를 튕겨냈던 창천검은 내 지풍들을 쳐내려 몸을 돌려야 했다.
***
이십여 초 동안 동일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나와 석진을 상대로 흔들림 없는 우위를 과시했으나 창천검은 우리 둘 중 누구도 어쩌지 못했다. 석진에게 검을 먹일 양이면 내 지풍들이 쏟아졌고 나를 잡으려 들면 그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의 주먹은 암석도 박살 낼 위력을 담고 있었다. 호신강기를 두를 여력이 없는 창천검으로서는 그의 일권을 경시할 수 없었다.
석진은 거시기가 아니라 두려움이 거세된 사람 같았다. 그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도외시한 채 창천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 승부의 추가 창천검 쪽으로 기울었을 터였다.
나는 석진의 용맹함에 탄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어째서 나를 살리려고 저렇게까지 용을 쓴단 말인가.
난전 중의 의구심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 나는 전율했다. 별안간 상단전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국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청화가 피어오른 직후였다.
이대로 가다간 밤새 소모적인 공방전만 되풀이할 거라 판단했는지 창천검이 승부수를 들고나왔다. 석진에게로 향했던 그의 검이 일 장 가까이 늘어났다. 검강(劍剛)이었다. 전날 광살부가 잠시 꺼내 들었던 어설픈 강기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선명하고 단단한 강기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석진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석진이 죽음으로써 내게 두세 호흡을 벌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능이 요구하는 이 방책을 거부했다. 그러고는 선력을 박박 쥐어짜 최강의 지공을 창천검에게 폭사시켰다.
이미 작심하고 있었던 듯 창천검은 내 지풍들을 왼손의 장공으로 방비하며 강기를 뿜어내 길어진 검으로 석진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쾅!
폭약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석진의 두부가 산산조각……났을 줄 알았는데, 어럽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놀랍게도 석진은 창천검의 검강을 권강(拳剛)으로써 막아냈다.
강기를 두른 그의 주먹이 수박만큼 커 보였다.
석진은 단지 방어만 한 게 아니었다. 그의 좌수에서 뻗어나간 창 같은 권풍이 창천검의 복부에 꽂혔다.
나는 비로소 석진이 진신무위를 감추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서운 인간이었다.
창천검은 부상을 입었다.
석진의 권풍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지풍들을 맞아서. 능숙하지 못한 장공으로 내가 필사적으로 쏘아낸 지풍들 전부를 차단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의 방어막을 뚫은 두 줄기의 지풍을 좌견과 허벅지에 허용한 창천검이 체면 불고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그가 섰던 자리에 석진의 무지막지한 권풍이 떨어졌다.
내내 고전하다 한순간에 주도권을 쟁취한 석진과 나는 여세를 몰아 파상공세를 펼쳤다. 급격히 전의가 떨어진 창천검은 얼마간 응전하다 더 버티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우리는 그를 쫓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의 신형이 까마득히 멀어지고서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
혈전이었음은 싸움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
석진의 가슴팍이 갈라져 무복이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다리도 피투성이였다.
나도 온전치 못했다. 언제 당했는지도 몰랐는데 전신에 검흔이 나 있었다. 특히 초반에 새겨졌던 옆구리의 상처는 꽤 깊었다. 조금만 깊게 들어왔으면 내장이 상했을 터였다.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원통을 꺼낸 석진이 뚜껑을 열고는 안에 든 내용물을 상처 부위에 처덕처덕 발랐다. 그러고는 통을 내게로 던졌다.
“어서 바르게. 성수원에서 제조한 금창약일세. 냄새는 지랄 같지만 약효는 최고 중에 최고지. 유세 떨려는 건 아니네만 같은 부피의 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물이라네.”
나는 석진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고 가래처럼 누리끼리하고 진득진득한 약물을 검상(劍傷)에 발랐다. 쓰라림과 시원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석진이 느닷없이 헛구역질을 하더니 자두 알 같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빌어먹을, 내상을 입었군. 자넨 괜찮은가?”
이번에는 작은 호리병을 꺼낸 석진이 마개를 빼고 꿀꺽꿀꺽 마셨다.
“미안하지만 이건 나눠줄 수 없네. 여분이 없어서.”
“나는 필요 없소.”
“다행이군.”
석진이 아무렇게나 뻗었던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견딜 만하면 반 시진쯤 호위를 서 주게나. 내상이 악화되기 전에 내부를 다스려야겠네.”
내 수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석진이 눈을 감고는 운공에 들어갔다.
***
나는 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들의 눈엔 혈전이 끝난 후의 느긋한 시선으로 보일 터이지만 심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머리에 우후죽순 격으로 떠오르는 의문점들로 인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한 이런저런 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만 더 아플 뿐이었다. 결국 당사자에게 묻는 게 최선이었다.
석진에 대한 상념을 중단한 나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직도 구름이 깔려 있어 달빛이 흐렸다. 별도 드문드문 보였다.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한 나는 잠을 청하듯 눈을 감고서 내 상태를 찬찬히 점검했다.
운공 중에 건곤기의 일주천을 중단한 것은 삼 년 사 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때처럼 기혈이 들끓었으나 그때만큼 후유증이 심하진 않았다. 아마도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택일 터였다.
실질적인 고민거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건기와 곤기의 불균형이고 다른 하나는 선령의 훼손 여부였다.
전자는 전투력의 감소를 초래했다. 건기의 수위를 곤기에 맞춰야 했기에, 더욱이 별다른 연습 없이 실전 상황에서 바로 해내야 했기에 몹시 애를 먹었다. 공수 전환이 원활치 않을뿐더러 몸놀림의 속도와 지공의 위력도 당연히 떨어졌다. 초반에 그토록 고전했던 이유였다.
이 문제는 곤기를 키움으로써 해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결방안이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령은 심히 걱정스러웠다.
창천검이 달아난 후 선령을 갈무리했지만 멀미가 난 것처럼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결코 바람직한 징조가 아니었다. 내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저 별 탈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취했던 특단의 조치를 후회하거나 자책하지는 않았다.
선령의 동원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창천검의 검에 요혈을 내주고 제압당했을 터였다. 아니면 마력을 봉인 해제해 그를 짓이긴 후 천마로서의 행보를 시작했거나.
어느 쪽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선령의 효능에 관해서는 기대한 대로였다.
광살부와 청사편에게 협공을 당했을 때 한순간 활용하며 확인한 바 있지만, 전투에 써먹을 시 선령은 전가의 보도 같은 신기를 발휘했다. 석진이 가세하지 않았더라도 창천검에게 쉬이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아무리 선령의 통찰안이 활로를 제시하더라도 몸이 실행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노인네처럼 ‘기방(氣防)’을 두를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몸놀림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
반 시진쯤이라고 해놓고는 석진은 동이 튼 후에야 운공을 마쳤다. 족히 두 시진은 지났을 터였다.
“하, 개운하구먼. 한바탕 땀을 흘린 후에 폭포수에 씻어낸 기분이라고나 할까. 자넨 좀 어떤가?”
나는 대답 대신 허를 찔렀다.
“살막과는 어떤 관계요?”
석진이 짐짓 놀란 시늉을 했다.
“살막이라니? 갑자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시치미를 떼다니. 실망스러웠다.
내 속을 읽었는지 석진이 멋쩍게 웃었다.
“어떻게 알았는가?”
답변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살막의 줄이 아니었다면 석진이 어떻게 이 장소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는 창천검이 나를 찾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여 나는 석진의 물음을 묵살하고 되물었다.
“당신이 살막의 대가리요?”
“고상한 표현들도 많은데 대가리가 뭔가, 대가리가!”
“…….”
“뭐,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잘 모르나 본데, 살막은 막주가 없다네. 흑문에 문주가 없고 상운에 운주가 없는 것처럼 말일세. 말하자면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 상호이익을 위해 엮은 촘촘한 그물이라고나 할까.”
“변죽은 그만 울리시지. 당신이 입에서 독침이나 쏘아대는 허접한 살수들과 동격이라고? 나더러 그 개소리를 믿으라고?”
“자네 언사가 꽤 거칠구먼. 공치사를 하려는 건 아니네만,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오늘은 그렇다 쳐도 어제 자네가 운공에 들었을 때 내가 모진 마음을 먹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모르고 지나갔으니 실감이 안 날 테지만 자넨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였네.”
“바란 적 없소. 당신한테 그런 은혜를 입은 적도 없고.”
“허어, 갈수록 태산일세. 자네가 이리도 염치가 없는 사람인지 몰랐구먼.”
“흰소리는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 답변이나 하시지.”
“그렇게 인상 쓰지 말게. 잘생긴 얼굴이 망가지지 않는가.”
“…….”
“알겠네. 말함세. 말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뭘 물었더라? 하도 술을 마셔댔더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구먼. 금방 듣고서도 까먹는단 말이지.”
“…….”
“인상 쓰지 말라니까. 알았네. 말해줌세. 나는 살막의 제일살령(第一殺領)일세. 살막엔 공식적인 서열이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일인자라고 할 수 있네. 살막의 누구도 나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반면 내 뜻은 어지간하면 관철이 되니까. 어떤가? 답이 되었는가?”
하나의 의문이 풀렸지만 그로부터 비롯된 다른 의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