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68
제68화 – 이만 가 봐야겠소.
나는 당황했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으나 기감에는 확연히 잡히는 거대한 열기의 구름은 청화를 점화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것들을 응축해 흡수하려고 용을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실로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이로써 궁금증이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나는 타인들의 대결에서 파생된 열광의 운무도 내게 이득을 줄 수 있을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도봉과 검룡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볼 작정이었다. 만약 그들의 비무가, 정확하게는 그 비무를 관전하는 군중이 일으킬 열기가 내 상단전에 푸른 불꽃을 피워올린다면 대득일 터였다.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었으니.
설령 그 실험이 무위로 돌아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승부가 갈린 후 등장해 승자와 한 판 붙으면 그만이었다. 체면 때문에라도 도봉이든 검룡이든 내 비무 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심 도봉이 이기기를 바랐다. 그녀가 지면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이 없었다.
사람의 심리는 묘했다.
내 잇속만 따진다면 도봉의 승리를 기원해야 할 터이지만 나는 개전 후 나도 모르게 안진을 응원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격돌하자마자 안진이 밀렸다. 먼저 출수하면 하수임을 인증하기로도 하는 양 상대의 선공을 암중으로 촉구하며 신경전을 벌이던 두 여인은 극한까지 치솟은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동시에 공격에 나섰다. 안진의 압기가 해일처럼 도봉을 덮쳤고 도봉의 칼에서 발출된 도기(刀氣)는 번개처럼 안진에게 날아갔다.
기의 방어막으로 도기를 감당한 안진은 짧은 경악성을 토하며 이십여 보나 후퇴했다. 반면 도봉은 그녀를 덮친 기의 그물을 뚫고는 안진에게 돌진했다. 어느새 그녀의 보도(寶刀)에서는 선명한 강기가 솟아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안진의 열세는 전력 차이의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술의 실패에 기인했다.
도봉이 첫수부터 최강의 수법으로 나올 것을 예상치 못하고 상대의 힘을 가늠하기 위한 탐색전 수준의 장공을 발한 게 실착이었다. 사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도봉이 노련했을 뿐이었다. 이 궁극의 미녀는 타고난 싸움꾼이기도 했다.
허를 찌르는 초반 승부수로 주도권을 틀어쥐자 도봉은 맹렬하게 안진을 몰아붙였다. 그녀의 공세에 밀려 안진은 변변한 반격도 못 해보고 방어에만 급급했다.
두 여자의 격렬한 공방전의 여파는 싸움터의 변형을 낳았다. 나와 도호들이 선 곳은 우리의 보호 덕분에 변화가 없었지만 다른 곳들은 폭풍을 피해 뒤로 물러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원형이었던 공터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탈바꿈했다. 면적도 두 배 이상 넓어졌다.
나는 초조해졌다.
도봉의 칼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상대의 죽음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삼십 초가 경과할 즈음 안진이 위급지경에 처하자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장내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에 선력을 불어넣은 찰나 멈칫했다.
도봉의 파상공세에 속절없이 밀리다 결국 도산의 도호들이 버티고 선 곳까지 몰린 안진은 패색이 짙어진 순간 비장의 패를 꺼내 들었다. 중인의 눈엔 도봉의 칼에 안진이 양단된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나는 그녀가 분신술을 펼쳤음을 알았다.
둘로 나뉜 안진의 동체가 각기 다른 장공을 발하며 도봉을 합공했다. 대경실색한 도봉이 훌쩍 물러섰다. 다시 하나로 합체한 안진이 기세를 타고 도봉에게 맹공을 가했다. 전세 역전까지는 아니었으나 안진은 도봉을 압박하며 미세하나마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도봉은 필사적으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내 국면이 팽팽해졌다.
나는 선령을 끌어올렸다.
일시적으로 시공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과 함께 안진과 도봉의 표정이 생생히 보였다. 아쉽게도 도봉의 얼굴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두 여자 모두 사생결단의 각오로 다음 수를 예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기에 나는 전속력을 발해 안진에게 쇄도해서는 그녀를 낚아챘다. 내가 튀어 나가자마자 소살도도 움직였다. 선령으로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그는 나와 안진을 암해하려 들지 않고 도봉을 가로막았다.
“막 오십 초가 지났소, 소주.”
***
수십만 군중에게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축이 울릴 만큼 엄청난 함성이었다.
도봉의 싸늘한 음성이 군중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고마운 줄 알아.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 염왕을 알현하고 있을 거야.”
응혈을 토해내느라 선수를 빼앗긴 안진이 입술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 소리 질렀다.
“놀고 있네. 칼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주제에. 팔이 부러졌지, 너? 목을 부러뜨리려다 봐준 거야. 그러니 너야말로 이 언니에게 감사해야 해.”
아닌 게 아니라 도봉의 오른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팔에 이상이 없다는 듯 억지로 칼을 들어 보이려던 도봉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은근슬쩍 왼손으로 칼을 칼집에 돌려놓은 도봉이 반격에 나섰다.
“내장이 터진 년이 지껄일 소리는 아니잖아? 안 그래?”
“누가……, 웁.”
말을 하다 말고 안진이 또다시 한 움큼의 선혈을 뱉어냈다. 도봉이 고소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도 숨 막히게 예뻤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에 든 요물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피를 게워낸 안진이 언쟁을 재개했다.
“뭐가 터져? 목구멍에 가래가 꼈을 뿐이야.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다시 붙어볼까? 한쪽이 제대로 깨질 때까지 싸워보자고. 물론 뒈지는 쪽은 당연히…….”
도봉이 잽싸게 안진의 말을 가로챘다.
“네년이지.”
약이 바짝 오른 안진이 내 만류를 뿌리치고 도봉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참으시오, 안 소저. 오늘은 이만하면 됐소. 꼭 모용 소저와 재대결을 하고 싶다면 다음에 하구려.”
소살도가 나를 거들었다.
“그러는 게 좋겠소, 소주. 구경꾼들이 너무 많아 장소가 협소하오. 더욱이 저 여인은 내상이 심한듯하니 당장 결판을 내면 여러 소리가 나오게 될 게 빤하오. 중상자를 상대로 칼을 썼다고 말이오.”
도봉이 못 이긴 척 소살도가 내민 당근을 물었다.
“좋아. 아량을 베풀어 주지. 하지만 한 달 후 여기로 다시 와라. 너 혼자. 거기 네 사내를 포함해 아무도 데려오면 안 돼. 우리 둘이서만 끝장 승부를 보는 거야. 어때?”
나는 도봉에게 내가 안진의 연인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자중했다. 여기서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했다간 안진이 진짜로 폭발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중요한 행사가 남았기에 난장판이 되면 곤란했다.
“흥, 너나 졸개들을 주렁주렁 달고 오지 마. 그날 이 언니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마. 목숨은 살려줄 테니.”
하아, 이 여자가. 천하의 소살도를 두고서 졸개라니.
안진의 망언에 한때 강호의 공포로 군림했던 노(老)도객이 노발대발할까 봐 간이 졸아들었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 안진을 무시한 소살도가 도봉에게 퇴장을 권했다.
“검림에서 올 아이와의 대결은 의미가 없어졌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소주?”
“그치한테 항의서한 보내는 거 잊지 마. 그 작자 때문에 엉뚱한 년을 잡도리하느라 칼만 버렸잖아.”
안진이 발끈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계속 이년 저년이래, 저년이. 누군 욕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안진이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쌍욕을 시전했다. 이에 질세라 도봉도 그 예쁜 입술에서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욕설들을 쏟아냈다.
심히 궁금했다. 도봉은 그렇다 치고 안진은 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이런 상스러운 말들을 배웠을까. 나처럼 어린 시절에 천하를 주유한 것도 아닌데.
설마 도원의 도사들이 욕쟁이들이란 말인가. 재수 없는 늙은이를 떠올려보니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을 듯싶었다.
소살도가 반강제적으로 도봉을 끌고 가고서야 상황이 끝났다.
그에게 떠밀려 장내를 벗어나기 전 시종여일 나에게 무심한 척하던 도봉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유혹의 느낌이 물씬한 눈빛이었다. 그냥 내 착각이었을까. 찰나지간 벌어진 일이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도봉의 모습이 군중 너머로 사라지자 안진이 더 버티지 못하고 좌정하고는 운공에 들었다. 나는 그녀를 호위하며 멀리 떨어진 이들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선력을 담아 중얼거렸다.
“검룡은 언제 오려나. 상대가 없어졌으니 나라도 어울려줘야겠군.”
기대했던 대로 군중이 웅성거렸다. 이제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었다. 진득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방금 전 펼쳐졌던 일전 이상의 비중을 가진 역사적인 대결을 보게 될 판인데 누가 그 기회를 놓치려 들겠는가.
***
내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었다.
만약 안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도봉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았다면, 도봉은 지각한 검룡과 비무를 시작했을 터였다.
검룡의 정확한 무위는 알 수 없으나 도봉과 비등한 수준이라고 가정할 시 둘의 충돌은 양패구상으로 끝났을 공산이 컸다. 승부욕이 지나치다 못해 생사까지 도외시하고 달려들던 도봉의 성정을 감안할 때 파국은 기정사실이나 진배없었다.
둘이 다치는 거야 하등 상관이 없지만 그리되면 나는 삼천 리나 달려와서는 빈손으로 돌아갔어야 할 판이었다. 도봉-검룡의 비무가 청화를 피워 올리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진이 도봉을 쫓아내 준 것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크나큰 공을 세운 셈이었다. 나는 안진이 너무 기특해 그녀의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졌다.
검룡인지 건망인지 검제의 후인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아직까진 들판을 떠나는 이들이 없었지만 군중의 동요는 구름 한 점 없는 야밤의 보름달처럼 확연했다.
땅거미가 지고 본격적으로 어둠이 내려오자 하나둘 이탈하는 자들이 나오더니 어느 시점부터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우장평을 빠져나갔다. 절대다수의 군중은 달빛만으로 초절정 고수들의 공방전을 감상할 안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관전 포기는 당연지사였다.
나는 나이와 이름밖에 모르는 검림의 작은 주인에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개자식 같으니. 약속을 했으면 늦게라도 와야 할 게 아닌가. 오기만 하면 팔다리를 분질러버릴 테다.
내가 벼르고 있음을 아는지 검룡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시가 임박해오자 나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자는 오지 않을 것 같소. 나도 이만 가 봐야겠소.”
꿋꿋하게 남아있던 이삼만 명의 군중에게 작별을 고한 나는 마침 운공을 마친 안진을 안아 들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아쉬움을 담은 탄식들이 나를 환송했다.
허탈했다.
횡재는 고사하고 손해만 본 셈이었다. 우장평에 오느라 허비한 이틀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나저나 비상사태였다. 사냥감들이 달아나 버렸으니 남은 아홉 도시들에선 건질 게 없었다.
십대악인을 잡으면 일거에 손실을 회복할 수 있지만 꽁꽁 숨어버린 자들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비무행을 하자니 나와의 대결을 수락할 이가 나올 성싶지 않았다.
난감했다. 건곤장에게 예고했던 날이 이제 십칠 일밖에 남지 않았거니와 그것과 무관하게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면 소중한 시간이 헛되이 흘러갈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짰다. 뭔가 묘안이 있을 터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던가.
궁하면 통한다더니 절박한 심정으로 궁리를 거듭하자 암흑으로 물든 전망에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자시 운공에 들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