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67
제67화 –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리다.
흔히들 절세 미녀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을 두고 경국지색이란 표현을 쓴다. 도봉은 한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를 넘어 대륙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절대미의 소유자였다.
백옥 같은 피부 위에 하나하나씩 뜯어봐도 완벽한 이목구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몸매 또한 뇌쇄적이었다. 착 달라붙은 상의는 어깨와 가슴과 허리의 유려하고도 육감적인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고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옆으로 트인 치마 속의 다리는 각선미라는 단어의 존재 이유를 웅변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음욕조차 일지 않았다. 태양을 마주 볼 수 없듯 감히 직시하기도 어려울 만큼 눈부신 미태였다.
그녀를 호위하는 사인(四人)의 칼잡이들은 저마다 무명을 떨친 고수들일 테지만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도봉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아얏! 뭐 하는 거요?”
나는 눈을 부라리며 안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옆구리 살을 뜯어낼 듯 세게 꼬집은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었다.
“침이나 닦아.”
나는 그제야 내 실태를 깨달았다. 도봉의 미모에 홀려 잠시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침은 누가 흘렸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손등으로 슬쩍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물기는 묻어나지 않았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안진이 계속 입을 열어 주목을 받을까 봐 나는 내 입술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딱 보니 알겠소. 제법 야무져 보이나 안 소저에겐 역부족일 듯싶소. 이제 마음을 편히 가져도 될 것 같소.”
안진의 표정이 풀렸다.
이런 순진 덩어리 같으니. 소란을 방지하기 위한 흰소리인 줄도 모르고. 천안통을 가진 노인네도 아닌데 내가 척 보고 어떻게 도봉의 무력을 알 수 있겠는가.
멀어지는 도봉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힐끗 바라보다 하마터면 입맛을 다실 뻔했다. 전날 무후의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토굴에서 야명주를 들고 앞서가던 문상의 뒤태도 아찔했지만 도봉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도봉은 실로 요물이었다.
내가 찰나지간 현혹되었음을 간파한 안진의 표정이 또다시 사나워졌다. 나는 그녀가 성질을 부리기 전에 얼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곧 검룡이 올 게요. 둘이 한 판 하면 나갑시다. 내가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소.”
“어느 쪽에?”
‘그야 이긴 쪽이지.’라고 대꾸하려다 말을 바꿨다.
“가급적 둘 모두에게 그럴 작정이오.”
왜인지는 모르나 이 답변은 안진을 만족시켰다. 그녀는 서열 싸움에서 패한 고양이처럼 얌전해졌다.
***
누군가 큰소리로 정오가 되었음을 알렸다.
도봉이 나온 지 일각쯤 지난 후였다. 검룡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명당자리를 차지해 도봉을 볼 수 있는 자들을 빼면 다들 들판 너머의 수풀에 시선을 보내며 그녀의 맞수가 어서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나도록 검룡은 도래하지 않았다. 결국 미시(未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약속한 시각으로부터 반 시진이나 경과한 것이었다. 여덟 번째 고성(鼓聲)이 끝나자마자 앙칼진 목소리가 고막을 할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봉의 음성이 틀림없었다. 분기가 실려 있어서 그럴 테지만 과히 듣기 좋은 옥음은 아니었다. 미모는 완벽하지만 모든 걸 가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좀 더 기다려 보지요, 소주. 검림에서도 삼천 리가 넘는 장도이니 한 시진 정도의 오차는 눈감아줘야…….”
“됐어. 더 이상은 못 참아. 나하고 붙고 싶거든 도산으로 오라고 해. 아니, 그 작자에겐 흥미를 잃었어. 제가 도전하고서는 꼬리를 만 겁쟁이 따윈 상대하지 않을 거야. 그보다 절대천룡인지 뭔지 하는 종자가 어디서 설치고 있는지나 알아봐. 기왕 나온 김에 위아래를 가르쳐주고 가게.”
“소주, 그건…….”
도봉을 수행한 도호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어떤 말로 그녀를 만류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군중 속에서 별안간 괴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야!”
호통을 치며 폭죽처럼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이는 안진이었다.
불룩한 포물선을 그리며 도봉 일행이 독차지한 공터로 날아간 안진이 그들의 삼십 보 전면에 나비처럼 사뿐히 착지했다. 그녀가 현시한 신법에 도호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도봉의 도톰한 입술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넌 뭐야?”
“나? 안진이다. 편안할 안(安)에 참 진(眞).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이지. 두 번째는 내 연인인 선(善)이고. 우리 아이에겐 딸이든 아들이든 미(美)라는 이름을 붙일 거야. 안오미(安吳美). 어때? 근사하지?”
어이가 없었다. 저 여자가 미쳤나. 기가 막혔지만 나는 안진을 따라 공터로 나가지 않고 잠시 추이를 살폈다. 안진의 돌발적인 괴행과 횡설수설에 도봉이 어떻게 대응할지 자못 궁금해서였다.
도봉은 화를 내는 대신 비아냥거렸다.
“이제 보니 살짝 정신이 이상한 여자였군. 그런데 나한테 갑자기 왜 달려든 거야?”
나는 도봉이 아주 철딱서니는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분명 ‘미친년’이라는 적확한 단어를 쓰고 싶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표현을 완화한 건 안진의 신법을 의식해서였음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선이라는 이름에서 나를 떠올렸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상당히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이라 볼 수 있었다.
“몰라서 물어? 방금 내 연인을 모독했잖아? 종자? 설쳐? 위아래를 가르쳐? 뚫린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함부로 내뱉다간 대가리가 깨지는 수가 있어.”
안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처에서 소요가 일었다. 원색적인 언사에 놀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연인이 누군지 알게 된 탓이었다.
더는 두 천방지축의 대화를 감상할 여유가 없는지라 나는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군중의 머리 위를 비행해 안진에게로 날아갔다. 내 출현에 수십만 군중이 운집한 들판은 열광의 도가니로 화했다.
***
나는 도봉과 시선을 맞추었다.
미리 작심하고 나왔음에도 그녀의 미안(美顔)을 대하자 평정심이 흔들렸다. 하지만 울렁거림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내게 자기소개를 마칠 겨를조차 주지 않고 안진이 끼어들었다.
“넌 나서지 마, 선. 저 막돼먹은 여자는 내가 처리할 거야.”
가뜩이나 안진의 험한 말본새에 심기가 비틀려있던 도봉이 강하게 받아쳤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더니. 네 사내를 믿고 주둥이를 놀리는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네년의 못생긴 턱주가리를 부숴주마. 다시는 헛소리를 뱉지 못하게.”
나와 도호들은 시중잡배들의 언사를 구사하며 입씨름을 벌이는 두 여인을 말리고 나섰다.
“내게 맡겨주오, 안 소저.”
“진정하시오, 소주. 우선 절대천룡과 인사를 나눈 연후…….”
안진과 도봉은 우리의 만류를 뿌리쳤다.
“비켜, 선.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못생긴 턱주가리? 부숴? 나야말로 박살 내 주마. 덤벼라.”
“싫어. 먼저 저 미친년에게 교훈부터 내릴 테야. 이거 놔. 놓으라니까.”
도호들 중 좌장으로 보이는 민머리 노인이 도봉을 붙잡는 한편 내게 눈짓을 했다. 발버둥 치는 안진을 껴안고 있던 나는 선력을 끌어올려 사자후를 발했다.
“우우우!”
난장판이었던 장내가 일시에 고요해졌다. 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왜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고막 터질 뻔했잖아.”
나는 안진에게 엄한 눈빛을 발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앞으로 같이 다닐 수 없소.”
엄포가 아님을 알았는지 안진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언제 또 과도한 흥분으로 정신 줄을 놓을지 모르는지라 나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상견례를 한 김에 두 사람이 정식으로 비무를 하는 게 어떻겠소? 하지만 자칫 과열될 우려가 있으니 초수를 제한합시다. 오십 초면 적당할 듯싶은데, 어떻소? 그리고 도중에 한쪽이 부상을 입으면 즉각 중단하기로 하고.”
민머리 노인이 냉큼 내 제안을 수용했다.
“좋은 생각이오, 절대천룡. 그렇게 합시다.”
반발할 줄 알았는데 두 여자 모두 비무에는 동의했다.
“오십 초는 너무 길어. 십 초면 충분해, 선.”
“누가 할 소릴. 딱 십 초 만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마.”
나는 양자에게 확인했다.
“그럼 십 초로 정하는 거요?”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부인했다.
“아니.”
같은 말을 뱉은 게 기분 나쁜 듯 안진과 도봉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십 초면 충분하지만 충분히 갖고 놀다가 본때를 보여줄 거야. 그러니 그냥 오십 초로 해, 선.”
“턱만이 아니라 팔다리도 분질러주려면 오십 초로 늘리는 게 낫겠지. 그걸로 하자.”
나는 도봉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금 말했듯 비무 도중 누구라도 부상을 당하면 바로 멈춰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임의로 개입할 수밖에 없소.”
민머리 노인이 내게 화답했다.
“지당한 말씀이오, 절대천룡. 나 또한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리다.”
민머리 노인과 나는 은밀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 순간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난 나는 신음성을 삼켰다.
소살도(笑殺刀) 최필(崔弼).
최근 수십 년간 강호 출입이 뜸해 세인들에게 잊혔으나 도산 창립을 전후해 한참 활동을 하던 삼십여 년 전에 이미 초절정 상(上)의 강호로 평가받으며 도제의 오른팔이라 불린 도호(刀豪)였다. 말하자면 십자무련의 건곤장과 비슷한 위치였다.
양 관주가 보여준 용모화에서는 고수머리가 수북하던 예전 모습이 나와 있어 언뜻 떠오르지 않았는데 웃음기를 보자마자 별호가 연상되며 바로 얼굴이 겹쳐졌다.
설마 소살도였다니.
도봉 호위대의 대장 격이니 무명소졸은 아닐 터이지만 이 정도의 거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나는 새삼스레 긴장했다.
현재의 무력은 알 길이 없지만 도산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다면 소살도는 건곤장에 버금가는 강자라 보아야 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 싸워도 승산이 희박할 거라는 뜻이었다.
의아한 면도 있었다.
강호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상대를 죽이기 직전 미소를 짓는 괴벽으로 유명한 소살도는 다혈질에 오만 무쌍한 성정으로도 악명 높은 위인이었다. 하지만 목전의 노인은 진중하고 정중했다. 진짜 소살도라면 작은 주인에게 반말을 일삼는 안진을 불문곡직 즉결처분하려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소살도가 아니라고 보기엔 용모화에서 봤던 얼굴과 너무나 흡사했다. 허전한 두부에 곱슬머리를 붙이고 면상에 자글자글한 주름살만 지우면 영락없는 당사자였다.
도봉이 무영도수에 이어 낙일쾌검까지 꺾은 나에게 위아래를 가르쳐주네 마네 하며 허세를 부린 것도 민머리 노인이 소살도 본인일 시 이해가 갔다. 자고로 믿는 구석이 있으면 개도 더 크게 짖는 법이었다.
하여 나는 노인이 소살도일 거라 결론 내렸다.
그의 언행이 소문과 다른 건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변했거나 나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한 탓이리라 여겼다. 나는 전자이기를 바랐다. 후자일 경우 그가 본색을 드러내면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었다.
***
도봉과 안진만 남겨두고 소살도를 포함한 네 명의 도호들과 나는 뒤로 물러났다.
두 여인에게 주어진 전장은 일천 평가량의 원(圓)이었다. 도봉이 안진과 비등한 무력의 소유자라면 둘이 싸우기에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군중이 몰려있는지라 더 넓히기가 어려웠다.
앞줄을 차지한 관전자들은 전부 무림에서 나름 방귀깨나 뀐다는 족속일 테니 격전의 여파가 미치더라도 알아서 해결할 것이었다. 설사 피해를 본다고 해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소살도 등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보자 뜬금없이 양천이 떠올랐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십중팔구 군중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선행했을 터였다. 세상엔 나나 도산의 도호들보다는 양천 같은 이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리는 손을 치우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것처럼 기세등등했던 두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쌍방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지했다는 방증이었다.
아름다운 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안광을 쏘아내며 도봉이 천천히 등으로 손을 올렸다. 보석이 알알이 박힌 도파(刀把)에 희디흰 소수(素手)가 닿자마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칼과 일체가 된 그녀는 보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천상의 미녀가 아니라 서슬 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절정의 도객이 되었다.
도봉의 발도에 맞춰 안진의 기운도 변했다. 그녀는 단구의 말라깽이 소녀가 아니라 태산 같은 무게감을 발산했다.
수십만 개의 입들이 모여 있음에도 잡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흡사 태풍 전야의 적막 같았다.
나는 집중했다. 이제 곧 펼쳐질 두 여자의 승부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중이 소리 없이 피워올린 열광의 운무를 청화로 전환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