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an’s Shooter RAW novel - Chapter 283
마탄의 사수 (283)
“엉?”
“왜?”
“내 정신 좀 봐라. 나 스탯도 안 찍고 있었다.”
“형……. 형은 진짜 참 퓌비엘 인이구나. 전쟁에 정신이 팔려서 스탯을 안 찍다니.”
기가 차다는 표정의 기정을 보며 이하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크, 크라벤이랑 막 휴전 협정하고― 그때라서 어쩔 수 없었― 아, 맞다.”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알렉산더가 나타났다는 신호를 막 받은 때였기에 여유 따위도 없었다. 이하는 〈해신의 아들이 인정한 자〉 업적과 그 명예의 전당으로 받은 스탯 포인트를 민첩에 투자하며 또 한 가지가 떠올랐다.
“뭐야, 이불이야?”
이하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보며 기정이 물었다.
가방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이하는 팡, 팡 구김을 털어 내며 말했다.
“아니, 코트. 드레이크가 줬어.”
“응? 뭐라?”
누가 줘?
“크, 크라벤의 드레이크? 그 총사령관 NPC? 바다의 최강자?”
“응. 휴전 협정 맺으면서 줬는데, 이것도 정신이 없어서 그냥 가방에 짱 박았었네.”
“드레이크가 준 방어구를 가방에 둘둘 말아서 넣어 놨다고? 형?!”
진짜 미친 거 아니지? 라는 표정의 기정을 보며 이하는 다시 한 번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바빴을 뿐인데…….
“형이 기여도 1위 할 만하네. 그렇게 정신없이 전쟁터만 돌아다녔다니, 허, 참. 그나저나 그거 뭔지 옵션 좀 봐 봐.”
기정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하는 자신을 놀리기만 하는 얄미운 사촌동생에게 어떻게 갚아 줄지 잠시 생각했다.
“궁금하냐?”
“당연하지! 특급 NPC가 준 거면 최소 희귀급? 아니, 이름빨만 보면 영웅급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빨리 보고 말―”
“궁금하면 탱 좀 서라.”
“뭔 탱?”
“레벨 190 넘는 몬스터가 어디서 나오냐? 너 걔네들한테 몇 대 맞아도 살 수 있지?”
때마침 적절한 게 있었다. 정보 길드의 쥬에게 가도 얻을 수 있겠지만 기정을 만난 김에 써먹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하의 설명을 들은 기정은 입을 쩍 벌리며 사촌형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이템 정보에 대해서 한 번 물어보려다가 완전히 코 꿰었다.
* * *
“오, 레벨 200쯤 되면 이런 사냥터에 오나 보구나. 분위기 쌈빡한데?”
스산한 바람이 이하의 얼굴을 스치고 갔다.
이하가 말했던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곳을 기정이 고른 사냥터. 주변엔 몬스터도 없고 오직 이하뿐이었다.
―형! 뭐해? 준비됐― 어, 떴다!
“으으음, 확실히 미들 어스는 경치 구경만으로도 값어치가 있는 게임이라니까. 자아, 그럼 준비를 해 볼까나.”
이하는 블랙 베스를 꺼내어 천천히 양각대를 펼쳤다. 머릿속에서 급박한 외침이 계속 들려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눈을 찌푸린 후, 이하는 자리에 엎드렸다. 스코프의 캡을 열고 우선은 낮은 배율로 대략의 위치를 확인했다. 멀리서 꼬물꼬물대며 방패를 들어 올리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앞에 선 쓰리 핸드 오우거.
통상 레벨 195이상, 지금의 기정이 상대하고 있는 녀석은 대략 레벨 200 수준이었다.
―형! 형!! 빨리― 어, 어어― 크윽―! 형, 준비됐지? 이제 쏠 거지?
―오, 기정아. 보는 위치는 여긴데 목소리는 내 머리에 바로 들리니까 무슨 자동차 극장 온 것 같다. 너 자동차 극장 가 봤어?
―허, 헛소리 말고! 형! 빨리이이! 나도 오래 버티려면 힘들다고!
이하가 떠올렸던 것은 블랙 베스의 퀘스트였다.
2,000m 거리에서 레벨 190 이상의 몬스터를 일격에 상대해야 한다.
‘일격’이라는 조건이 붙는 이상 두 번의 데미지를 입혀서도 안 되고, 이하 외의 타인이 데미지를 입혀서도 안 된다.
즉, 지금 기정은 말 그대로 팔 셋 달린 오우거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방어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짜식, 한 번 고생 좀 해 봐야 형 대우를 할 줄 알지.”
이하는 빨리 쏠 생각이 없었다.
미들 어스 지식 좀 모른다고 형을 그렇게 무시해?
물론 그렇다고 기정이 죽을 때까지 넋 놓고 바라본다는 건 아니었다. 티릭― 티릭― 티릭― 스코프의 클릭을 조정하며 이하는 기정을 관찰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하아, 하아, 형! 제발! 쏴 주세요! 나 스킬 썼다고! 내가 쓰리 핸드 오우거보다 레벨이 높다지만 이 녀석 공격력만큼은 동렙 이상급이란 말이야!
이하가 주문했던 것 중 하나가 ‘몬스터의 덩치가 클 것’이었다.
레벨은 200으로 기정보다 15 이상 낮지만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공격력만큼은 레벨 210 이상을 내는 몬스터. 힐러도 없이 기정이 단독으로 탱킹하기엔 꽤나 힘에 부치는 상대였다.
거대한 몽둥이를 든 팔 세 개가 번갈아 가며 휘둘러졌다.
기정의 귓속말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기정이 방패를 들어 올릴 때마다 쾅―! 쾅―! 하는 효과음이 이하에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형, 진짜 나 농담 아니야! 나 진짜로 형!
기정은 이제 말도 꼬이고 있었다.
회피와 탱킹을 같이 하는 수준급의 움직임을 보이는 별초 길드의 길드 마스터도 반격 스킬 없는 무작정 몸빵에는 별 수 없었다.
―까불래, 안 까불래.
―어, 엉?
―앞으로 까불 거야, 안 까불 거야.
―혀어엉? 지금 그런 장난할 때가―
―쓰으읍, 까불 거야, 안 까불 거야.
이하는 킥킥, 홀로 숨죽여 웃으며 기정과 쓰리 핸드 오우거의 공방을 바라보았다.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구시렁거림 내지 울음소리 같은 게 잠깐 머릿속에 들렸다.
그 뒤에 곧바로 이어진 것은 기정의 항복 선언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엉님! 안 까불 테니까 얼른 얘 좀 처리해 줘요! 빨리!
―진짜지?
―당근 진짜지!
―‘당근 진짜지’?
―무, 물론 진짜입니다, 엉님! 얼른 쏴 줘! 나 벌써 HP 1/5 빠졌다!
“뭐야, 잘 버티네.”
죽는 소리를 그렇게 내면서도 과연 기정은 준랭커급의 실력이 있었다.
동레벨대의 몬스터를 잡을 때 5인 파티가 기본이라는 미들 어스에서, 거의 동레벨에 가까운 몬스터를 홀로 장시간 탱킹하면서도 HP는 겨우 20%의 소모라니.
“어쨌든 당분간은 말 좀 듣겠네. 흐.”
이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기정도 이하를 도와주는 셈이나 다름없는 것.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그 장난을 잘 아는 사촌형제였다.
‘거리 2,000…… 2,045m. 풍향 동, 풍속 4m/s, 안정화 완료.’
기정을 향해 오른팔, 왼팔, 중간팔이 번갈아 뻗어 나간다.
기정이 고생하는 모습만 바라본 건 아니었다. 쓰리 핸드 오우거의 공격패턴과 움직임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는 사실상 나도 못 가 본 곳, 미지의 장소다.’
2,000m 거리의 저격은 미들 어스 내에서도, 현실에서도 도전한 적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별다를 바 없다. 이하가 나선 것도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케 해상에서 크라벤과의 전투, 그리고 알렉산더를 노렸던 1,800m 거리의 저격을 몇 회나 성공시킨 경험이 이하를 성장시킨 상태였다.
이하의 머릿속에 가상의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그리고 쓰리 핸드 오우거의 중간팔이 움직이려는 시점.
‘차분한 마음.’
투콰아아아앙─────!
탄두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쓰리 핸드 오우거의 중간팔이 기정의 방패를 내리치고 나서 생기는 잠깐의 딜레이.
탄두가 도달하기까지의 시간과 쓰리 핸드 오우거의 행동에 딜레이가 생기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한 이하의 샷은 틀림이 없었다.
기정은 방패를 내리고 이하 쪽 방향을 바라보며 두 팔을 휘저었다. 사촌동생의 명중 신호와 함께 이하의 머릿속에 팡파르가 울렸다.
빠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사일런트 스나이퍼(B)〉
축하합니다!
사거리 2,000m 거리 이상의 목표물을 적중시켰습니다! 발포한 당신 스스로도 느끼고 있겠죠? 공격 적중 후 3.4초가 더 지나야 소리가 들릴 테니, 미들 어스에서 당신을 알아차릴 존재는 극히 적을 것입니다. 허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인간과 인외의 존재들의 ‘예외’를 조심하세요. 미들 어스는 당신이 가진 힘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보상: 민첩 +13
〈사일런트 스나이퍼〉업적의 첫 번째 등록자입니다.
업적의 세 번째 등록자까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며, 기존효과의 200%가 추가로 적용됩니다.
효과: 민첩 +26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스킬―마나 증발탄을 배웠습니다.
[블랙 베스의 봉인―4]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오? 오오?”
레벨 업과 더불어 블랙 베스 퀘스트를 노렸던 건데 뜻하지 않은 업적 하나가 이하의 눈에 걸렸다. 400m 이후 사라져 버렸던 거리별 업적. 블랙 베스가 현대식 저격총으로 변화하고 1,000m, 1,500m에서도 등장하지 않아 그냥 사라졌나 했던 건데…….
‘2,000m……. 그렇구나, 머스킷의 100m부터 시작했던 업적이 저격총으로는 2,000m부터 시작인 셈이야.’
칭찬하는 내용에 비하면 업적의 등급 자체는 겨우 B급.
몇 m 단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로 한참이나 더 있다는 것을 이하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형, 끝났어?
―오야. 렙업 완료다. 이제 163 달성.
―굿, 굿! 히히, 얼른 와서 템 먹어, 지키고 있을게.
이하는 자리를 정리하곤 스탯 5포인트를 민첩에 투자한 후 기정에게로 향했다. 우선은 스킬과 블랙 베스의 퀘스트 확인이었다.
‘대체 얼마 만에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 건지. 아무리 무기가 사기급이라지만 루거나 키드에 비하면 너무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닌가. 나도 막 블렛스톰! 이런 거 배우고 싶은데.’
남들이 들었다면 스킬 전부 줄 테니 그 무기를 내놓으라고 말할 정도로 블랙 베스가 사기급이긴 했지만, 역시 사람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하는 피식 웃으며 스킬 상세창을 띄웠다.
〈마나 증발탄〉
설명: 노련한 포식자는 먹이의 발버둥조차 틀어막는다. 영문도 모르는 먹이는 반항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효과: 탄착 반경 30m 범위 내 모든 신규 마나 동결
(기존 스킬 유지, 신규 스킬 시전 불가)
마나: 200
지속시간: 탄착 후 10분
쿨타임: 1시간
“음……? 으으음?”
신규 마나 동결? 기존에 썼던 마법은 유지되지만 새로운 마법은 시전 봉인된다는 뜻.
‘디스펠은 이미 시전 된 스킬조차 취소시켜 버리는 스킬이지. 아오, 그 정도만 되면 진짜 대박일 텐데!’
골드 드래곤 베일리푸스의 위력을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용이 눈만 부라리고 콧김만 뿜어 대도 날아오던 마법들이 몽땅 사라졌었다.
골드 드래곤급이 되지 않더라도 비예미의 스킬만 되어도 좋았을 텐데. 공중에 뜬 마법사조차 플라이 마법이 취소되며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나마 범위 마법이라는 게 다행인가. 게다가 탄착 지점에서 반경 30m라면 생각보다 넓긴 한데…….’
디스펠급이 아니라는 게 다소 아쉬운 점이었지만 거의 처음으로 주어진 ‘후한 쿨타임’, ‘후한 효과 범위’를 보며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