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70
70. 13년의 약속.
“야. 레드.”
“뭐냐 그린.”
“핑크는 대체 언제 합류하는 거냐.”
“맞아. 너무 늦잖아.”
“보라고! 옐로도 저렇게 말하잖아!”
“찾고 있어.”
“무슨 핑크를 7년 동안 찾냐고! 대체 언제까지 시커먼 남자 네 명이 함께 다녀야 하는 건데!”
“핑크를 달라! 화사함을 달라!”
“시끄러! 그러면 너희가 찾아오든가!”
레드, 그린, 옐로, 블루.
헌터 레인저라고 불리는 이들의 악연은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훈련소에서 만나 함께 훈련받고.
우연히 같은 날 헌터 면허를 얻으며 같은 기수가 됐고.
헤어졌는데 같은 길드에서 만나 같은 팀이 되고.
던전에서 B 클래스 아티팩트로 분류된 변신 세트 5개를 손에 넣었고.
각자 레드, 그린, 옐로, 블루, 변신 세트에 선택받으며 영원히 같은 팀으로 묶여버렸다.
그린에게는 소원이 있었으니.
힐러 역할을 맡아줄 핑크가 팀에 들어오는 것.
핑크는 여성용이었으니까!
꼭 그게 아니어도 힐러는 필요했다.
B 클래스 아티팩트인 변신 세트는 굉장히 튼튼했으나 다칠 때는 다친다. 포션이 있기는 하나 즉시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 포션은 비싸거나 부작용이 심하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포션을 구하기도 어려우며 불량품이 걸릴 확률도 은근히 높다.
“야. 그린.”
“뭐냐 레드.”
“힐러는 귀하잖아.”
“귀하지.”
“귀하니까 어느 팀에서 모셔가도 빵빵하게 지원하지.”
“그래.”
“힐러라고 해도 꼭 여자는 아니니까 숫자는 절반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뭐.”
“어디를 가도 부족함이 없는 대우를 받는 여신님이 핑크 쫄쫄이를 입겠냐?”
“현실을 말하지 마! 꿈을 꾸게 두라고!”
“하하하!”
“야! 옐로!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그냥 핑크 팔자.”
“야! 블루!”
“팔아서 다른 장비를 사는 게 낫잖아. 어차피 다섯이 다 모인다고 특별히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꿈과 아이들의 꿈을 저버리겠다는 거냐!”
그들을 응원하는 아이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 알리지는 않았으나.
변신 세트 5개가 모인다고 특별히 강해지지는 않는다.
갑자기 거대 로봇을 소환할 수 있게 되지 않았다.
이들이 들어간 던전에 색이 다른 변신 세트 5개가 남아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갖췄는데 그대로면 더 실망 아니야?”
“그건 말하지 마!”
“하하하!”
“옐로 너도 웃지 말고!”
“거기까지.”
레드의 말에 그린은 즉시 입을 다물고 전투 준비를 했다.
그들은 인간 형태를 한 나무 괴물들과 맞서 싸웠다.
그동안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말은 필요 없었다.
앞장선 그린이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
멈춘 몬스터를 향해 레드가 검을 휘둘렀다.
그때 생기는 레드의 빈틈을 옐로가 작은 방패로 지키며 적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전열이 든든하게 지켜주는 가운데 블루가 적재적소에 화살을 꽂아 넣었다.
변신 세트끼리 시너지 효과는 없었으나.
오랜 악연 동안 합을 맞춰왔기에 그들은 강했다.
“아, 진짜 쪄 죽겠네!”
전투가 끝나자 그린은 헬멧을 벗고 투덜거렸다.
“이 망할 변신 세트는 통풍 좀 신경 썼으면 안 됐나.”
“그렇게 껴입었으니까 더운 게 당연하잖아. 바보냐?”
“뒤에서 깔짝거리는 활쟁이가 탱커님의 고충을 알겠냐!”
“난 괜찮은데?”
“그건 옐로 네가 이상한 거고! 그리고 네 갑옷은 내 절반 정도밖에 안 되잖아!”
딜러인 레드나 블루는 변신 세트만 입고 활약했으나 탱커 역할을 맡기에는 변신 세트만으로 부족했다.
그를 응원해주는 아이들에게는 미안했으나 그린은 싸울 때 위에 갑옷을 더 입었다.
“야 레드. 꼭 이런 밀림으로 와야 했냐?”
“이주형 던전이 우리 사정을 봐주는 거 봤냐?”
두껍고 무거운 장비를 입는 모든 탱커에게 덥고 습한 장소는 쥐약이다.
이주형 던전의 처리는 모든 헌터가 지는 의무기에 누군가는 이 던전을 처리해야만 했고.
이번에는 그 역할을 헌터 레인저의 그린이 맡았을 뿐이다.
“아, 진짜. 누가 엄청 효과 좋은 얼음팩이라도 만들어주지 않을까? 100개고 1,000개고 살 텐데.”
“네가 은퇴하기 직전에 나오는 거 아니야?”
“야. 블루. 그딴 소리 할래?”
“하하하!”
“옐로 너는 그만 처웃고!”
웃고 떠들고 있었으나 그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적은 식물형 몬스터.
나무 틈에 숨으면 찾기 어렵다.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밀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기보다 적을 끌어내는 편이 훨씬 낫다. 이 던전의 규모를 볼 때 적이 무한히 나올 가능성은 극히 적다. 던전 자체가 초기에 발견됐기에 이주가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도 한참 남았고.
넷은 시간을 들여 몬스터를 끌어내 제거했다.
적의 수가 충분히 줄었다고 판단한 그들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 괴물이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들의 꿈과는 다르게 그들에게 필살기 같은 것은 없었다.
착실하게 싸워 보스를 무찔렀다.
“겨우 끝났네. 아, 죽겠다.”
그린은 투구를 벗었고.
“그린!”
나무 괴물의 최후의 발악이 그린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퍽.
땅에 피가 흩뿌려졌다.
“레, 레드!”
“컥.”
“포, 포션! 포션 마셔!”
포션으로 응급처치하자 레드의 호흡이 안정됐다.
“포션 가격은 네 몫에서 뺀다?”
“지금 그딴 게 문제냐? 너 진짜 괜찮냐?”
“괜찮아. 네 대가리에 박히는 것보다 내 등짝에 박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빨리 가자.”
그들은 즉시 던전에서 나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한 뒤 검사를 진행했는데 특별히 이상은 없었다.
이틀 동안 상황을 지켜본 뒤 레드는 퇴원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린, 나 물 좀.”
“알았어.”
“그린, 나 화장지 좀.”
“그래···.”
“그린, 양말 좀 벗겨줘.”
“야···.”
“드, 등이 아파!”
“괜찮냐?”
“농담.”
“야 이 새X야! 그딴 걸로 농담하냐!”
“괜찮아, 괜찮아.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했잖아.”
괜찮지 않았다.
사흘이 더 지난날 밤.
“으아아아악!”
레드의 비명이 숙소에 울렸다.
“레드! 무슨 일이야! ···레드?”
레드의 방에 서둘러 달려간 그린이 본 것은.
전신이 나무껍질로 뒤덮여가는 레드였다.
그 나무껍질을 손을 뜯어내던 그린은 레드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멈췄다.
대신 귀가 있을 법한 장소에 외쳤다.
“야! 레드 버텨! 내가 반드시 약을 구해올 테니까!”
“그으으으르으으···.”
“약속한 거다!”
헌터 레인저는 인맥을 총동원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었고 레드는 완전히 나무로 변했다.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숙소가 있던 장소에는 여전히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세 친구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거대한 건물을 세워.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지키고 있다.
***
레벨도 잘 안 오르고.
마스코트 인형 계획도 어긋나고.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느낌이다.
‘나를 잔뜩 만들어서 집단 지성을 추구해보자!’라는 느낌으로 나를 잔뜩 늘려봤는데.
나는 늘려봐야 나였다.
슬라임을 한 통에 담나 두 통에 담나 슬라임은 슬라임이지.
머리가 복잡해 이것도 저곳도 손이 안 가는 와중 박태양 상담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의뢰인은 다름 아닌 헌터 레인저.
헌터 레인저는 나도 안다.
특수촬영물에 나오는 것 같은 복장을 하고 활약하던 헌터들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B 등급 헌터 최상위. 합이 안 맞는 A 등급 헌터 파티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레드가 나무가 되는 사고가 없었으면 A 등급에 올라갔겠지.
그들은 나무가 된 레드를 아직도 지키고 있다.
누구로부터 지키냐고?
나무가 된 인간을 연구하겠다고 달려드는 연구자들.
인간성을 잃은 자는 불태워 없애야 한다는 극단론자들.
나무를 성장하게 두면 머지않아 전 세계의 사람들을 나무로 바꿀 거라는 비관론자들.
그들로부터 레드를 지키려고 나무 주변을 건물로 감싸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뭐, 돈은 그럭저럭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저기 팔려나가 책, 만화, 영화로도 나왔으니까.
그래도 A 클래스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을 줄이야.
박태양 상담사가 를 보수로 내건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A 클래스요? 전투기라도 만들어달래요?”
진짜 전투기처럼 민간 소유를 제한하지는 않으나 그만큼 많은 돈이 많고 운이 따라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직접 얻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한 명 빠지면서 제대로 사냥할 수 있었을까?
높은 확률로 샀을 거다.
잘도 그렇게 돈을 모으고 인연을 만들었네.
역시 가짜 아니야?
이번에 헌터 레인저가 보수로 내건 보수는 .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고 할까.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아티팩트다.
아티팩트 정보를 숨기는 일은 종종 있으니 이상하지는 않은데.
정말 A 클래스 아티팩트 맞아?
정말로 가짜는 아니지?
불길하지만, 포기하기는 아까운데.
선지급을 요구하자.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가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건물에 도착했다.
우리 비상식량이 입김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집이지만, 나쁘지는 않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딱 봐도 미련하게 생겼네.
그러니까 이런 의뢰를 맡겼겠지.
나중에 환불을 요구해도 절대로 들어줄 생각 없다.
“나무는 어디에 있나요?”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에는 줄기가 근육처럼 비비 꼬여 솟아오른 흉측한 나무가 있었다.
“A 클래스 아티팩트 정도라면 Sole Alchemy와도 거래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저를 부른 이유가 뭔가요?”
“으로 닦았더니 이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남자가 을 나무에 대자 나무껍질의 표면이 깎여나갔다.
때를 밀 듯이 나무껍질을 전부 벗겨내면 레드가 나오는 거 아냐?
“계속해도 될지 몰라서 멈췄습니다.”
“잘하셨어요.”
나도 괜찮다고 장담은 못 하겠다.
아니, 십중팔구 문제가 생길 것 같다.
그래도 에 반응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일지도?
“시험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한데. 그 전에 아티팩트부터 주세요.”
선지급을 요구했다. 나중에 입을 싹 닦을지도 모르니까.
실패하면 돌려주면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레드를 원래대로 돌리자 못 했을 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을 때도 받아 갈 거다.
남자는 커다란 수정구슬 같은 물건을 내게 줬다.
수정으로 만든 눈깔 같다.
“그걸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레드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 정말이다.
을 통해서 나무를 봤더니 두 개의 생명이 뒤섞인 게 보인다.
그 밖에도 다양한 정보가 보인다.
이거 그거다.
게임으로 치면 보스 몬스터 체력 바와 상태 이상을 보여주는 모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알 거다. 이게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에 따라 게임 난이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A 클래스 아티팩트 취급받을 가치가 있는 물건인데?
그대로 고개를 돌려 헌터 레인저 사람들을 봤고 멈칫했다.
너덜너덜하잖아.
하긴 그런가.
헌터 레인저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도 나왔다.
그들은 연예인처럼 돈이 된다 싶은 장소에는 가리지 않고 출현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인상 깊은 사연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수백억에 달하는 돈을 벌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면 이야기는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사연은 한국에서나 특별했다.
저주받아 돌이 된 이야기는 흔하다.
몸이 기괴하게 변해 죽은 이야기는 이따금 들린다.
식물이 되고도 생존한 이야기는 희귀하지만, 찾으면 있다.
슬라임이 된 이야기는 아마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이런 시설을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겠지.
A 클래스 아티팩트를 살 돈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돈이 없다면 본인들이 직접 구하는 방법뿐이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A 클래스와의 인연은 생기지 않지만.
몸을 갈아 넣는 대가로 그들은 희망을 얻어냈다.
그 희망이 사실은 절망이 탈을 쓴 모습이 아닌지는 확인해봐야겠는데.
“우리 둘만 두고 나가주세요.”
“레드를 꼭 부탁드립니다.”
“꼭 구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따라 헌터 레인저는 떠나갔다.
아니, 13년이나 버텨놓고 나랑 단둘이 두는 건 무슨 생각이야?
내가 갑자기 확 불이라도 지르면 어쩌려고?
주변을 둘러봤다.
카메라가 몇 있다. 전부 가렸다.
반응은 없네.
진짜로 나랑 레드 둘만 남겨둘 생각인가.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보아하니 은 그들이 최근에 발견한 아티팩트.
가격이 한창 비쌀 때다. 이것을 팔아치우기만 해도 평생 돈 걱정 따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것을 한 사람을 구하려고 소모하다니.
레드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조차 없을 텐데.
벌써 13년이다, 13년.
된장도 13년 전에 만들었다면 숙성된 게 아니라 썩었다고 판단한다.
그 시간이면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보기는 좋네.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꽤 좋아한다.
요즘 들어 부쩍 피곤했는데 혈관에 에너지음료를 주입한 것처럼 정신이 명료해졌다.
전력을 내볼까.
을 입에 던져 넣었다.
실패할 생각은 없다.
[분해+ 스킬의 레벨이 38로 올랐습니다.]―
[분석 스킬이 분석+ 스킬로 성장합니다.] [분석+ 스킬의 레벨이 40으로 올랐습니다.]―
[특성 : 슬라임☆☆의 레벨이 38로 올랐습니다.] [분석+]로 성장한 눈에 보인다.레드는 저주 때문에 나무로 변한 게 아니다.
애초에 나무로 변하지도 않았다.
식물형 기생 몬스터가 레드의 몸을 뒤덮고 체내 구석구석 뿌리를 내린 상태다.
하나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나뉘어 있다.
몬스터에 작은 상처를 내고 내부에 촉수를 뻗었다.
반응이 없네.
기생 몬스터 주제에 기생 당한 적 없어?
남에게 기생하려면 기생 당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지.
그나저나 튼실하게 자란 것 봐. 아주 지극정성으로 돌봤네.
가느다란 슬라임 촉수가 기생 몬스터의 전신에 퍼졌다.
현재 뿌리가 어떤 식으로 레드의 몸을 침식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장기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장기를 둘러싸듯이 침식했다.
레드에게서 영양분이 아니라 마나를 빨아먹으려고 숙주로 삼은 모양새.
영양분은 땅에 내린 뿌리 쪽으로 흡수하고 있다.
마나 공급기로 삼은 만큼 레드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죽이기는커녕 레드의 건강 상태는 꽤 양호한 편이다.
아마 헌터 레인저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기생 몬스터를 돌봐줬기 때문이겠지.
영양이 충분하고 안전도 확실하다면 괜히 숙주를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대신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지 장기를 쥐어 터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뿌리 배치다. 알기는 어려운데 혈관과 신경에 연결된 뿌리도 있다.
자기를 죽이려고 들면 숙주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악의로 가득하다.
그런데 같이 죽을 생각은 또 없는 것 같다.
휴면 상태인 씨앗이 보이니까.
장기와 뇌의 손상은 딱히 안 보이니 저 뿌리들만 잘 제거하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기생 몬스터에 침식된 상태로 13년이다. 정신이 과연 온전히 남아 있을까.
남아 있다면 좋겠는데.
기껏 기생 몬스터를 제거해 몸은 고쳤는데 정신이 죽은 상태라면 조금 그렇잖아?
자,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몬스터는 반응했으나 이미 늦었다.
내 촉수가 전신에 퍼졌는데 무슨 수로 저항해.
몬스터의 육체는 순식간에 [분해+]돼 내게 [흡수]됐다.
[분해+ 스킬의 레벨이 39로 올랐습니다.] [흡수 스킬의 레벨이 39로 올랐습니다.]잘 먹었습니다.
13년 만에 레드가 세상에 나왔다.
음···. 아이들은 보면 안 될 것 같은 상태네.
촉수가 전신에 빽빽이 꽂힌 모습이니까.
촉수를 빼면 죽겠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촉수 끝에 사람을 달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우선 레드의 체내에 잔류하는 불필요한 성분을 제거했다.
끊어진 혈관과 신경을 으로 연결했다.
뿌리가 낸 구멍들도 으로 막았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알아서 재생될 거고 내 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킬 거다.
정신만 돌아오면 되는데.
각성제를 주입하고 촉수를 회수했다.
남자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열렸다.
나를 보더니 동공이 흔들린다.
그야 깨어났더니 눈앞에 슬라임 탈을 쓴 인간이 있으면 황당하겠지.
뭐, 저 반응만으로도 충분하다.
잘도 정신을 유지했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뻐끔거리기에 을 던져 넣어줬다.
“감사···합니다.”
“의식이 있었나 보네요?”
“희미하게···.”
“잘도 버텼네요.”
“약속···했으니까요. 기다리겠다고.”
아, 영화에 그런 내용이 있었지.
약을 구해오겠다고 그린이 말하고 침식된 레드가 가까스로 대답하는 그런 내용이.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나.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역시 이 넷은 전부 바보들이다.
***
조금 기운이 났다.
한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낸 보고서의 내용은 진짜인지, 인터넷에 올라오는 악플 가운데 악플러가 쓴 건 없는지, 배신자는 배신할 준비하는 게 아닌지, 올라오는 리뷰는 비꼬는 게 아닌지, 배송해 온 몬스터 소재는 그냥 먹어도 되는지, 연금센터와 미국에서 을 제대로 팔고 있는 건 맞는지, 세상 어디에서는 내 을 범죄에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어지럽고 피곤했다.
그런데 많이 나아졌다.
네 바보를 봐서 그럴까?
괜히 바보 연기를 하는 코미디언이 꾸준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가벼워진 머리를 리듬에 맞춰 흔들며 [분석+] 스킬을 분석해봤는데.
“어라?”
슬라임랜드 계획을 통째로 바꿔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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