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07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067)
“젠장…….”
―왜?
투란이 성낸 소리를 내자마자 드라고니아가 되물었다.
말로 하는 대신에 투란은 자신이 기억하는 꿈의 단편을 되새겨서 바로 심상을 통해 전해 줬다.
―호오? 에스탄이 말해 준 이야기의 실제 상황을 기억해 낸 셈이군?
드라고니아는 냉정하게, 한편으로는 흥미로움을 담아 투란의 짧은 꿈을 평했다.
‘이거 괜찮은 거야?’
―아무 일 없을걸? 아마도 지금 네 몸에 흐르는 뱀파이어의 피가 희석한 드라클레스의 피라서 잠깐 간섭이 일어난 모양이다만, 그저 기억의 파편일 뿐이고 너 자신의 기억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재미있을 듯싶은데?
‘너, 지금 무슨 구경거리라도 찾냐!’
―그보다 이제 하강한다. 도착했다고.
황당해하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는 짧고 간결하게 현실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어이없어 투란이 투덜거리기는 했다.
‘이 자식! 어째서 이렇게 능글거리고 심술궂어진 거야!’
―야, 여기 바로크 왕국의 상아탑이 아닌 것 같은데?
드라고니아는 가볍게 투란의 말을 짓밟는 듯한 대꾸를 하잖는가!
‘그래, 당연히 상아탑……이 아니라니! 홀시딘, 날 어디로 보낸 겁니까아!’
어리둥절하다가 당황하는 사이에 전송관은 지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나마 투명한 관짝 너머로 보이는 곳, 과녁이 어딘가를 보니 웬 강철 장대가 땅에 꼿꼿하게 박혀 있는 특이한 들판이었다. 굴곡진 언덕이 사방을 두른 탓에 살짝 분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돌과 흙 사이에 잡초 이파리만 가득한 맨땅 한복판에 강철 장대를 겨냥한 듯이 전송관이 처박히는 셈!
뭘 어찌해 볼 겨를도 없었지만 어찌해 볼 생각도 나질 않아서 투란은 멍청한 표정만 짓고 전송관이 강철 장대랑 격돌하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통.
가볍게 나무 대롱이라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전송관은 한쪽 끝자락을 장대에 대자마자 모든 속도를 잃은 것처럼 멈췄고 기우뚱하다가 지면에 다른 끝을 내려놓으며 비스듬하게 세워졌다.
끼익.
조금 삐걱대는 낌새를 머금은 소리가 나면서 투란의 앞이 어두워졌다가 뚜껑이 열리며 밝아졌다. 느긋한 햇살이 관뚜껑이 열린 관짝 안에서 멀뚱거리며 기대고 누운 듯한, 관이 기울어진 채로 강철 장대에 기대고 선 모양 때문에 덩달아 비스듬히 서 있는 듯한 꼴이 된 투란이었다.
‘방금…… 마법이겠지?’
―그 속도를 단숨에 지워 버리고 이리 얌전히 내려놨잖아. 당연히 마법이지. 이 강철봉에 담긴 마법이랑 전송관이 호응해서 이뤄진 결과야. 그러니까 이 강철봉은 전송관을 유도해서 착륙시키는 목적으로 상아탑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야.
‘여긴 바로크이긴 한 건가?’
느릿하니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둘러보며 투란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주변에 사람이 돌아다니거나 대기하고 있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그냥 벌판에 꽂힌 강철 장대에 내리꽂히고 버려졌다는 기분이 생생하게 치솟을 상황!
―참호(塹壕)가 감춰져 있어.
드라고니아가 투란이 실룩거리며 성질내려는 직전에 말했다.
‘참호?’
의아함은 오래갈 수가 없었다.
투란의 눈앞, 몇 미터 너머에서 잡초가 덮인 땅이 들썩이며 뚜껑 문이 벌렁 열리고 있었으니까.
“여어, 왔군!”
반갑게 외쳐 주는 이를 투란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바라봤다.
그 수상하다는 눈길에 그가 한숨을 쉬며 바로 몇 마디 덧붙인다.
“뭘 처음 보는 것처럼 노려봐? 나야, 툴로쉬라고!”
투란은 카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시늉으로 대꾸한다.
“아, 툴로쉬…… 그 아저씨랑 닮으셨네요? 머리카락이 분홍색이고 눈동자가 빨강빛인 데다가 살갗이 그렇게 타 버린 갈색만 아니라면, 툴로쉬 아저씨라고 했어도 믿을 뻔했어요!”
명랑한 말투지만 의심을 가득 담은 것이 분명한 투란의 태도에 툴로쉬가 머리카락을 들쑤시고 긁적이면서 쓴웃음을 짓고 대답하려 했다.
“아, 이건…….”
이렇게 첫마디가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큰 웃음으로 끼어들었다.
“우하하핫, 이 녀석 재밌구먼! 설마 변장 좀 했다고 진짜 딴사람이냐고 의심하는 거냐? 정말로? 우하하핫! 알드바인처럼 구석진 곳에서 뭔 재밌는 일이 있겠냐 싶었는데, 이런 녀석이 나돌아다닌다면 한번 들러 볼 만한데?”
우렁차게 낄낄거리는 말투가 강철 장대 위에서 터져 나온 외침을 가득 채우며 포장하고 있었다.
툴로쉬는 그렇게 외친 이를 흘깃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투란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오싹한 탓에 살짝 식은땀까지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올려다봐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누군가였고, 햇살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무 낌새도 없이 불쑥 전송관 위에 덧씌워졌으니까.
―신속(神速)의 이동…… 이랑 비슷하다만, 마법의 기척이 전혀 없다. 뭔가 본인의 능력인가 싶은데?
드라고니아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기이한 인물을 결코 얕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조심스러움에 한가득 덧칠된 듯했다.
터억, 툴로쉬가 다가오는 사이 투란의 앞으로 기이한 작자가 내려섰다.
역광(逆光) 속에 그림자가 어둠처럼 가렸던 그 얼굴, 차림새가 고스란히 투란의 눈동자에 비춰 들었다. 찰랑이는 귀걸이, 목걸이와 반지, 팔찌가 현란하게 투란의 눈을 어지럽히는데…….
“이분은 쥴. 어떤 분인지 알겠어, 투란?”
툴로쉬가 갑작스럽게, 분홍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빨간 눈동자에 흥미를 담아 묻고 있었다.
“아는 분인가요?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어, 요새 제가 기억이 좀 오락가락하고 상태가 안 좋아서…….”
눈을 깜박이면서 투란이 몹시 힘들다는 표정을 순식간에 꾸며 내며 대답했다.
툴로쉬는 이 대답에 흠칫했지만, 투란에게 좀 더 다가와 전송관에 기대며 팔짱을 끼는 기이한 사내 쥴은 낄낄거리며 다시 말문을 열고 있었다.
“처음 보는데 기억이 날 리가 있냐! 괜히 툴로쉬 겁주지 말라고. 쟤가 엘더 헌터이기는 한데 은근히 새가슴이라서 그런 소리 하면 몬스터 로드의 광증(狂症)부터 떠올리면서 되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거든. 으흐흣, 그럴 때 놀려 먹는 재미가 있기는 한가? 으흐흣, 야, 툴로쉬 눈 치켜뜨지 마. 이 녀석, 투란이라고 했지? 이 투란은 아주 멀쩡하거든. 광증 따위는 전혀 없어. 내가 보증한다니까?”
투란은 맹하니 쥴을 바라보며, 지금 나오는 말의 기이함을 새삼 실감하면서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작자, 대체 뭐지? 장신구가 모두 상위 마도구인 것 같은데?
드라고니아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놀라움을 담아 속삭였다.
이 말에 투란은 다시 쥴의 상태를, 조금 전처럼 찰랑이고 현란한 장신구가 아닌 맨얼굴부터 뜯어보듯이 바라봐야 했다. 그렇게 보니 쥴의 외모가 꽤 특이해서 개성적이라 부를 평온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어딘가 기형(畸形)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썹 한 끝자락, 코 한 귀퉁이, 입술 한쪽에 구멍이 뚫렸다가 메워지는 몰골이 선명한 것이 장신구를 얌전하지 않은 것도 꽤 써 대고 바꿔치기하는 습성이 엿보였고 갈색 바탕의 머리카락이 이마 양쪽 위로 밭고랑처럼 초록과 노랑으로 줄을 그어 뒷머리로 넘어가게 염색해서 얼굴을 가려도 그 색채만 유지하면 누구라고 짚어 줄 수 있는 듯하다.
상태가 이 모양이니 누군가 스쳐 가면서 ‘그 쥴이란 작자는 말이지.’라며 몇 마디 떠들 만해 보이는데, 투란은 쥴이란 이름을 그렇게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언더섀도우인가, 하는 생각은 드라고니아가 곧바로 ‘아냐.’라고 부정해 줬다.
“저어, 툴로쉬…… 이분이 도대체…….”
그나마 머리색이랑 눈깔 색을 바꿨어도, 살색도 꽤 달라지기는 했지만 툴로쉬라고 적당히 알아볼 수 있기에 그쪽을 향해 투란이 ‘빨랑 설명해 줘!’란 의미를 느릿한 말로 보채 보았다.
“도감에서 봤을 거야, 투란. 쥴 마르테인. 그 대목은 안 봤나?”
“쥴…… 마르테인……? 어, 음, 얼핏 봤을지도……?”
엉거주춤하니 투란은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니, 아무 말이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해서 나온 중얼거림이었는데 쥴이 곧바로 반응해 온다.
“엥? 뭐야, 얘도 칼디아크의 이상하고 신기한 도감을 가졌다고? 알드바인의 대마법사가 숨겨 둔 패라면서? 그런데 어떻게 데릭네 상회에 들락거렸냐? 그건 툴로쉬 네가 안내를 한다 해도 잘 안 될 텐데? 흐음? 야, 꼬마 투란. 너 혹시 로열클래스냐?”
“네?”
투란은 정말 멍청이처럼 맹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툴로쉬는 쥴을 향해 살짝 높은 목소리로 타박한다.
“그렇게 들이대고 묻지 말라니까요! 도움받겠다고 사람 불러 놓고 뭐 하자는 겁니까! 적당히 좀 하세요, 적당히!”
“야, 이만하면 적당하잖아! 그냥 물어본 건데 뭘! 로열클래스면 뭐 어때서! 아니, 로열클래스 정도 돼야 말이 되는 상황이잖아? 으하하핫, 이거 이번에야말로 일이 잘 풀릴 것 같은데? 으하하핫.”
쥴은 툴로쉬와 투란을 둘러보며 좋아라 웃고 있었다.
뭔가 재밌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한 기묘한 낌새가 가득한 그 태도에 투란이 새삼 소름이 끼치고 등골에 땀이 솟는 것을 느꼈다.
―하이로드, 하이로드 쥴 마르테인! 이거 실물이냐!
드라고니아가 화들짝 놀란 외침을 뇌리에 꽂아 주고 있었다.
너무 센 그 외침에 투란은 눈가를 실룩이면서 엉겁결에 속삭임을 토해 내고 말았다.
“하이로드…… 쥴?”
“으하……? 음하하핫, 진짜 도감 갖고 있고 읽어도 봤나 보네? 하지만 기억하는 속도는 굼벵이로구나! 으하하핫!”
쥴이 유쾌하게, 한층 더 높게 웃었다.
툴로쉬가 분홍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한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투란,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지?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해 줄 테니까, 일단 우리 거처로 들어가자고. 임시로 파 둔 참호지만, 알드바인에서 구한 마도구로 꾸민 거라 꽤 안락하고…… 이야기 나누기도 좋으니까.”
“어, 네…….”
전송관에서 한 발 떼어 땅을 디디며 투란은 엉거주춤하니 대꾸했다.
남은 발도 꺼내려다가 투란이 흘깃 전송관을 돌아보며 묻는 말을 덧붙인다.
“아, 그런데 이건…….”
상아탑에 도착했다면 전송관이 어찌 되든 간에 마법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허허벌판이라 해도 어울리는 곳, 정령막까지 두르도록 되어 있는 마도구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둬도 되는가?
“다 챙길 거니까, 들어가. 얼른 발 빼라고.”
유쾌해진 쥴이 기분 좋게 말하고 있었다.
투란이 그 말에 따르듯 재빨리 발을 빼는데, 툴로쉬가 뭔가 속삭였다.
얼핏 들어도 마법의 시동을 거는 키워드였고, 전송관이 곧바로 반응했다.
멀쩡한 관짝이 담요로 만든 모형이었다는 듯이 펄럭이며 강철 장대를 휘감았고 장대는 길이가 줄어들었다. 곧 장대는 드라고니아가 말했던 대로 강철봉이란 말에 어울리는 모양이 되었고 두툼한 담요 같은 깃발을 둘러 감아 울퉁불퉁해졌다.
쥴이 그 두툼하고 울퉁불퉁한, 어찌 보면 가는 기둥으로도 보이는 강철봉을 뽑아 어깨 위로 걸치면서 말한다.
“자, 들어가자.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괜한 놈들이 냄새 맡고 쫓아와서 귀찮잖아.”
마치 여태 시간 끌고 떠든 것은 투란과 툴로쉬였다는 듯한 태도!
툴로쉬는 굳이 따지지 않고 한숨만 쉬는 표정으로 투란에게 손짓하며 열린 뚜껑 문 안으로 들어갔다. 투란도 머뭇머뭇하는 시늉을 잠깐 하면서도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쥴이 그 뒤를 이어 들어가니, 뚜껑 문이 소리 없이 닫히며 다시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잡초가 한 무더기 덮인 모양만 남았다.
―홀시딘이 꾸몄던 거처 같군?
드라고니아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지난날을 되짚은 듯이 말했다.
투란도 바로 동감할 수 있었다.
몰튼노트 기간틱을 잡으러 갔을 때, 무쇠뿔 오우거를 찾아갔을 때, 거미 군단의 서식처를 공략할 때…… 홀시딘이 꾸몄던 거처랑 거의 똑같은 재질로 이뤄진 참호 안은 꽤 편안한 주거(住居)의 형태를 갖춘 채였다.
“산맥의 제법 깊은 곳에서도 안락한 주거 생활을 누리게 해 줍니다, 금전 열 닢에 집이 당신과 함께합니다……라면서 금전 약탈자이신 대마법사가 마구 팔고 있는 마도구로 지어진 곳이니까, 조금 더 감탄하고 놀라라고 투란. 으하하핫.”
쥴이 다시 낄낄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투란은 멍하니 그 말속에 담긴 낯선 한마디를 되뇌어 봤다.
“금전…… 약탈자?”
“응, 옛날에는 파나틱 플레임이었잖아? 요새 알드바인의 대마법사는 헌터들 사이에서 금전 약탈자라고 불린다니까! 으하하핫.”
쥴이 잘 물었다는 듯, 물어줘서 기쁘다는 듯이 떠들었다.
투란은 도감에도 실린 하이로드의 말이었지만 툴로쉬를 보며 그런 말이 정말 있느냐고 눈짓으로 물어야 했다.
헛기침과 함께 툴로쉬가 나지막하게 투란의 눈길에 답한다.
“마도구의 수준을 생각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가격이기는 하니까. 심술꾸러기 녀석들이 가격 좀 낮춰 달라고 투정 부리는 말일 뿐이지. 자, 저쪽에 편히 앉아. 마실 것도 좀 내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네…….”
투란은 홀시딘의 새로운 별명에 감탄하며 얌전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