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1
1071화
나는 신속하고 주위의 상황을 읽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우선으로 둔 것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먼지구름의 크기와 지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의 세기를 통하여 적들의 숫자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최소 일만. 절대 그 이하는 아니야.’
당연하게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어림짐작하기에도 무려 아군의 세 배가 넘는 머릿수.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적들은 지치지도, 쉽게 죽지도 않는 괴물들이니까.
‘심지어 그중에는 저놈 같은 또 다른 변이체도 있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머리가 절반으로 쪼개진 채,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거인의 시체를.
장담컨대 저 거대한 체구를 지닌 괴물의 정체는 트롤도, 오우거도 아니다.
21세기 현대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대격변 이후,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종류의 괴물이 기록된 몬스터 백과사전에도 저런 괴물은 없다.
앞서 내가 마음속으로 읊조렸던 것처럼, 그야말로 변이체(變異體)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 무림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또 다른 괴물들처럼.
‘그래, 그때와 같은 흐름이다.’
변이체의 등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호북에서도, 남만야수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천주(天主)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그들이 불러온 ‘균열’이 있었음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설마…….’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줄기의 불길한 생각.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끊어 냈다.
설령 조금 전 떠오른 생각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지금은 당장 눈앞의 적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사마표, 정호군.”
불쑥 입을 연 나는 두 사람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각각 좌, 우를 맡는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사마표와 정호군이 즉각 움직였다.
각각 일천의 수하를 거느린 저들은 지금부터 아군의 양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시킨 웬수 덩어리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로 적들을 맞이할 준비 시간을 벌어 주었던 어느 초절정 고수와 함께.
“대인.”
“응? 나? 나는 빠지면 안 되나? 저들과는 별 악감정도 없는데.”
“시발 대인아.”
“……어디로 가면 되겠나?”
“좌우측. 번갈아 가면서 위급한 쪽을 도와주십시오.”
“끄응. 알겠네.”
이로써 아군의 양 날개는 더욱더 날카롭고 튼튼해질 것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긴 해도, 초절정 고수가 버티고 있는 한 결코 쉽게 허물어질 수 없을 테니까.
“빈도는 어찌하면 되겠는가?”
공동파의 장문인, 현천진인의 물음에 나는 즉각 답했다.
“장문인께서는 공동파의 제자들과 함께 후미를 맡아 주십시오.”
“종남파에게 선봉을 빼앗긴 것은 아쉽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본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겠지. 도우의 뜻은 잘 알겠네.”
적들에 의한 포위망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황에서는 선봉보다도 후미가 중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현천진인은 평범한 무림인과는 달리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마대전이라는 거대한 전란을 온몸으로 헤쳐나온 노강호였고, 그렇기에 내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그런 현천진인조차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본 것은 아니었지만.
“선봉은 종남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순간 의아해하는 현천진인을 뒤로한 채, 나는 긴장된 얼굴로 검을 쥐고 있던 한 사람을 불렀다.
“혁소평. 너와 종남파 또한 공동파를 도와 후미를 맡는다.”
종남일룡(終南一龍) 혁소평.
대설산에서의 전투로 중상을 입은 탓에 감숙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풍운검군 대신, 살아남은 종남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비단 혁소평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주변인들 모두가 동시에 보인 반응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선봉은…….”
혁소평이 말꼬리를 흐린 그때, 누군가의 걸걸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뭐 하고 자빠졌느냐. 냉큼 후미로 빠지지 않고.”
화왕(火王) 적천강.
바로 그였다.
그리고 이 드넓은 무림에 자신의 발자국을 난폭하게 박아 넣은 거인의 옆자리에는, 왕을 넘어 별이라 불리게 된 한 여인이 있었다.
철컥.
말없이 두 자루의 곡도를 연결하여 거대한 활을 완성시키는 궁성(弓星)의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저들이 누구인가.
화왕과 궁성이다.
가장 난폭한 화염을 간직한 왕중왕(王中王)이자, 한 자루의 활로 숱한 전장을 지배한 천하 무림의 별이며, 살아 있는 무림의 전설들이다.
또한.
저벅.
나 역시 그들과 함께할 자격을 얻었다.
지금 이 순간 화왕과 궁성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그들보다 조금 작고, 아직은 보다 나약할지언정.
나는,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은 이 엿 같은 전쟁 속에서 일어난 또 한 명의 거인이었다.
구구구구궁!
땅이 떨린다. 아니, 몸부림친다.
등 뒤의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제외하면 사방이 탁 트여 있던 이 갈대숲은, 어느덧 자욱한 먼지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괴물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저런 잡것들한테 겁먹은 놈들이 있나?”
나는 놈들이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오직, 내 잘못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누군가의 불행뿐이다.
“만약 두렵다면, 피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전열에서 물러나라. 결코 비난하지 않을 테니.”
내 모든 말들은 진심이었다.
누구에게나 가족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생존에 있어 비겁함이란 없다.
그렇게라도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기꺼이 보호할 것이다.
몇 년 전, 어둡고 악취 나던 그 동굴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러했듯이.
그리고 지금 내 곁에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는 이들이 있었다.
“씨바 거, 인생 뭐 있습니까? 조장님 뒤꽁무니만 쫓다 보니까 이제는 천마 할애비가 나타나도 안 쫄립니다.”
혁무진이 불쑥 내뱉은 한마디에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온 그때, 녀석이 나직이 덧붙였다.
“따르겠습니다. 지옥 끝까지라도.”
“……!”
“……!”
일순간, 주위의 공기가 찌르르 울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방을 뒤덮은 거대한 울림들도, 그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괴물들의 괴성도 이 세상에서 지워진 듯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몰아내는 강철의 파도가 일어났다.
차차차차창!
모두가 손에 쥔 병장기를 곧추세우며 함성을 내질렀다.
육신의 피로도, 본 적 없는 괴물들에 의한 공포도 잊은 그들은 맹수처럼 포효하며 일렁이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자신들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떠올리며, 놈들에 의해 죽어 간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런 그들의 선두에는, 바로 내가 있다.
“오직 두 가지만 명심해라.”
나는 선봉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의 진형을 유지할 것.”
처처척!
나아가는 걸음을 따라 갈라지는 인(人)의 파도.
더불어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빈자리.
각각 일천의 병력이 결집한 다른 곳과 달리, 텅 비어 있는 그곳은 당장이라도 허물어트릴 수 있는 거대한 구멍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둘째.”
사박.
갈대를 밟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좌측에는 궁성이, 우측에는 적천강이.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의 등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따라온 화룡각의 대원들이.
머릿수로 치자면 한 줌도 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비어 있던 선두의 공간이 빈틈없이 메워지며 하나의 진이 완성되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것.”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은 그때.
그그그긍!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수한 그림자들이 온 사방을 뒤덮으며 쏟아졌다.
삼천여 명의 정예로 이루어진 원형진(元型陳)을 향해.
아니, 강철로 무장한 이 거대한 수레바퀴를 향해.
쉬이이잉, 콰앙!
궁성의 손가락 끝을 떠난 빛줄기가 어둠을 찢어발기며 폭발한 그 순간.
콰드드득!
강철의, 죽음의 수레바퀴가 마침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괴물들과 맞닿았다.
딸랑.
음산하고도 사이한 방울 소리가, 휘몰아치는 피 보라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어둠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단순히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 어둠을 장막으로 삼아 몸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설령 한 사람 한 사람이 흑의(黑衣)로 전신을 빈틈없이 둘러싸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둘러싼 장막을 간파해 내고 안을 엿볼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런 위협을 줄 수 있는 이들은, 수백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무수한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와중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수하들이었지만.
딸랑.
흑의인은 손에 쥔 요령(妖鈴)을 흔들었다.
낡고 거무튀튀한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 방울 소리는 탁했으나, 한편으로는 선명하게 뻗어 나가 또 다른 명령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사방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숨어 있는, 흑의인의 또 다른 동료들이 그러하듯이.
“마침내 시작됐군.”
콰아앙!
저 멀리, 굉음과 함께 번뜩이는 섬광을 확인한 흑의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괴물들이 쉴 새 없이 내지르는 괴성으로 인해 소리만으로는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했지만, 궁성의 것임이 분명한 저 빛줄기는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였다.
“목표로 했던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포위망은 제대로 갖추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흑의인은 못내 아쉬웠다.
일각.
단 일각만 더 놈들이 빠르게 움직여 갈대숲을 빠져나갔다면, 자신과 동료들은 훨씬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한 채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벌어진 것. 별수 없지.”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고, 흑의인을 포함한 서른 명의 술사(術士)에게 주어진 역할은 명확했다.
“놈들의 머릿수를 최대한 줄이고, 가능하다면 진태경을 생포할 것.”
불과 반나절 전, 혈주에게서 전달받은 명령을 조용히 읊조린 흑의인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죽이는 것도 아닌 생포라니.”
명령에 앞서 적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바 있는 흑의인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다.
저들 중에는 초절정 고수가 무려 여섯이나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그중 두 사람은 화왕과 궁성이다.
진태경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여 모든 전력을 퍼붓는다면 죽일 가능성은 충분할지 몰라도,
생포는 매우 어려운 임무였다.
“빌어먹을.”
혈주를 향해 무심코 욕설을 내뱉은 흑의인은 본능적으로 헛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곳에는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멍하니 서 있는 괴물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엿 같군.”
흑의인은 짜증 섞인 목소리와 눈빛으로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혈주가 무서워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이, 이지를 상실한 채 악취만 뿜어내는 저 괴물들이 오늘따라 유독 꼴 보기 싫었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
딸랑.
흑의인이 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으로 요령을 흔들자, 호위를 위해 주인의 곁을 둘러싸고 있던 일백 마리의 괴물이 망설임 없이 뒷걸음질 쳤다.
정확히는, 흑의인이 아는 바로는 그러해야 했다.
저벅.
“……?”
흑의인은 눈을 깜빡였다.
구십구 마리의 괴물이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혼자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 단 한 마리의 괴물을 바라보며.
“아니, 이게 무슨.”
흑의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그제야 뒤늦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괴물은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우왕좌왕하다 이렇게 말했다.
“와, 와아아. 신기하다. 이런 괴물 처음 보죠?”
“……!”
“저, 저도 처음, 에이 씨.”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괴물, 아니 사람인 것이 분명한 누군가가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