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70
#169화
어스름한 새벽, 일단의 무리가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두 중년인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정보, 정말 확실한 거요?”
“구 할 이상.”
“구 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소.”
“그럼 나머지 일 할은…….”
“놈들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함정이겠군.”
“그러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만전에 주의를 기하는 것 아니겠소?”
두 중년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라 뒤를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병장기를 꽉 움켜쥔 그들의 눈에서는 초조함과 긴장이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똥 밟았군.”
“이하 동문이오. 대동지부를 맡게 되었을 때부터 어쩐지 느낌이 쎄 하더라니.”
두 중년인이 동질감 섞인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불과 한 달 전 신설된 태원진가와 하오문의 대동지부장이었다.
“마누라한테 승진했다고 자랑한 게 엊그젠데. 자칫하면 과부로 만들게 생겼군.”
“우는 소리 좀 그만하시오. 구 할 이상이라니까.”
“일 할에 걸리면?”
“사백이 넘는 마적 떼에 둘러싸여 죽는 거지.”
“…….”
“얼굴하고는. 이제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하고 앞이나 보시오. 슬슬 도착할 테니까.”
하오문 지부장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발소리도 죽여 가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전진했다.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그들의 모습과 소리를 가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모두의 전신이 땀과 습기로 흠뻑 젖은 그때였다.
“정지!”
한껏 숨죽인 외침의 주인은 태원진가의 대동지부장이었다. 검파를 으스러져라 움켜쥔 그가 하오문 지부장을 향해 물었다.
“방금, 아무것도 못 들었소?”
“무슨…… 아!”
하오문 지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개 너머로 들려오는 어떤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말의 투레질 소리.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사태를 파악한 두 사람이 꽉 움켜쥔 주먹을 쳐들었다. 동시에 시커멓게 재를 칠한 수십 개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 장 앞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너머, 당장이라도 활과 돌격 창으로 무장한 수백의 마적이 짓쳐 들어올 것만 같았다.
꿀꺽.
누군가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인 그 순간. 난데없이 휘몰아친 초원의 바람이 안개를 훑었다.
이윽고 드러난 광경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헉!”
“이, 이게 도대체…….”
초원의 푸른 하늘 아래, 붉은 땅이 있었다. 온통 검게 그을린 대지 위에는 피와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하오문 지부장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정보가 사실이었군.”
수십 쌍의 황망한 시선들이 주위를 훑었다. 이미 생기가 사라진 채 누워 있는 수백의 인마(人馬)가 보였다.
잘려 나간 사지가 잡초처럼 나뒹굴었고, 공포와 경악으로 부릅뜬 채 굳어 버린 눈동자는 공허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몇 마리의 말들은 굶주린 투레질을 내뱉으며 붉은 글씨가 휘갈겨진 깃발을 짓밟았다.
천풍(天風)
틀림없다. 천풍단의 깃발이다.
일찍이 그 흉포함으로 북부 고원에 이름을 떨쳤던 천풍단의 궤멸. 구 할의 짐작이 마침내 십 할의 확신이 된 순간이다.
태원진가와 하오문은 근 보름간 천풍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야 정상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지부장의 낯빛은 새까맣게 죽어 갔다.
“이, 이거…….”
“맞소. 전부 한 사람의 소행이오.”
널브러진 시신들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당했노라고.
“엄청난 고수로군.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들 중 가장 무공이 높은 태원진가의 지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 일수(一手)에 죽었소. 내장이 타들어 간 것을 보니 열양지기를 극한까지 익힌 자가 분명하오.”
“무, 무공은? 어떤 무공인지 알아볼 수 있겠소?”
“전혀. 별다른 무공을 사용하지도 않았소. 이건……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짓밟은 거요.”
단 한 사람이 사백의 마적을 도륙했다. 그것도 개미 죽이듯이 손쉽게.
사방에 흩어진 시신들은 도주의 흔적이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공포의 흔적이다.
이 가공할 무공을 지닌 정체불명 고수의 손에서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 이게 가능한 일이오?”
“가능할 거요. 우리가 직접 보고 있으니까.”
맞다.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증거고 증인이다.
두 사람이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던 그때.
“여기!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생존자?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신법을 발휘해 바람처럼 달려간 두 지부장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생존자라고?”
“숨은 붙어 있군. 곧 끊기겠지만.”
그 말처럼 유일한 생존자는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왼팔은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뜯겨 있었고, 뻥 뚫린 옆구리에서 나는 살 타는 냄새가 고약했다.
그나마 멀쩡한 축에 속하는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하오문 지부장이 말했다.
“이놈, 천풍단주요.”
“……그게 사실이오?”
“확실하오.”
천풍단주는 이미 십 년 전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얼굴도 익히 알려져 있다.
얼마 전 하오문의 대동지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거물들의 인상파기를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특히 천풍단주는 근래 자식 놈들보다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고원에서는 최소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놈인데…… 이 꼴이 날 줄이야.”
고원을 주름잡는 마적단의 단주들은 각기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였지만 그중에서도 천풍단주는 특출났다.
머리는 우둔했지만 오직 천부적인 전투 능력으로 고원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절정 고수.
그러나 이제는 죽어 가는 패배자에 불과하다.
“그나마 절정 고수라고 손을 두 번 썼군. 팔을 뜯어내고 일 권을 먹였어.”
절정 고수를 고작 두 합 만에? 이제는 기도 안 찬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그때였다.
“크륵. 크르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천풍단주가 몸을 꿈틀거렸다.
이내 힘겹게 눈을 뜬 그의 입술 사이로 텁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려, 살려 주시오.”
“천풍단주. 맞나?”
“마, 맞소. 나요.”
태원진가의 지부장이 그의 완맥을 향해 공력을 흘려 보냈다. 눈빛이 조금, 아주 조금 또렷해진다.
“안심해라. 살 수 있다.”
거짓말이다.
살려 주고 싶은 마음은 그들도 굴뚝같지만 이미 늦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지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누구의 소행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풍단주의 몸이 화살 맞은 새처럼 퍼득거렸다. 동시에 하나 남은 팔이 지부장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죽어 가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억센 힘. 벌어진 입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느, 늙은이. 늙은이였소. 놈은 불구덩이에서 올라온 마귀요.”
“놔라!”
“전부 죽었소. 나도 죽었소. 나도 이미 죽은 거요. 마귀가 죽인 거요.”
“이, 이놈이!”
대경실색한 지부장이 황급히 몸을 빼려던 그때, 천풍단주의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생기가 빠져나간 몸뚱어리가 천천히 기울더니 이윽고 쓰러진다. 부릅뜬 눈동자가 푸른 하늘을 노려봤다.
“허억, 허어억. 죽었소?”
고개를 끄덕인 하오문 지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넋이 나갔더군.”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지. 저 상태로 근 이틀을 버틴 셈이니까.”
“그나마 약간이나마 소득이 있었으니 다행이오.”
“늙은이라는 것 빼면 뭐가 있소?”
“초절정의 경지, 그것도 열양지기를 주로 사용하는 노고수요.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손속도 냉혹하지. 만일 대동을 넘어서 우리 쪽으로 왔다면 금방 눈에 띌 거요.”
잠시 머뭇거리던 하오문 지부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오.”
그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노고수인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마두(大魔頭)의 등장인지. 그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본가에 전서를 띄워야겠소.”
“나 역시.”
어두운 낯빛으로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천풍단주가 말한 늙은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또…….
‘그는 어디에 있을까?’
* * *
나무꾼이 노인을 만난 것은 이름 없는 산의 중턱에서였다.
험한 산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는 노인을 처음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산신령인가?’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 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엉거주춤 엎드린 나무꾼을 보며 노인이 물었다.
“뭔가?”
“저는 장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령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잠깐 침묵하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별 미친…… 마,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우화등선(羽化登仙)시켜?”
“어, 아니십니까?”
나무꾼, 장 씨는 노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신선이라면 척 보자마자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팍팍 풍기고 고상한 말투를 써야 하는데…….
“신선이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 봤어? 가뜩이나 앞섬이 휑해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구먼.”
저 괴팍한 말투하며, 군데군데 찢어지고 헐렁한 복색하며.
신선과 비슷한 점은 엄청나게 늙은 것밖에는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자무식이라.”
멋쩍게 웃는 장 씨를 향해 노인이 손을 휘저었다.
“알았으면 이만 가 보게.”
“예.”
공손히 고개를 숙인 장 씨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
“…….”
“……거기 자네.”
“예?”
노인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왜 자꾸 따라오나?”
“아,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만.”
“여기로 쭉 가면 뭐가 나오는데?”
“장가촌이라고. 조그마한 마을이지요. 저도 거기 삽니다.”
“장가촌? 보아하니 집성촌인가 보군.”
“맞습니다.”
노인이 끌끌 혀를 찼다.
“여기에는 왜 이리 집성촌이 많아? 반 시진 전에도 홍가촌인가 뭔가 하는 게 있더만.”
“홍가촌이요?”
“왜, 아는 곳인가?”
“예. 당연히 알죠. 압니다. 한데…….”
장 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홍가촌은 이곳에서 족히 삼백 리는 떨어져 있을 텐데요. 혹시 다른 곳과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겨우 반 시진 전의 일도 기억 못 하는 천치로 보이는가?”
삼백 리는 제법 하체가 튼실한 장 씨도 넉넉히 이틀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한데 반 시진 만에 삼백 리를?
촌무지렁이인 장 씨는 안쓰러움에 내심 혀를 찼다.
‘오락가락하는 노인이군.’
행색부터가 딱 그렇다. 비쩍 마른 몸뚱어리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
노인은 자신 같은 나무꾼들이나 오르는 이 산에 어쩐 일로 오게 된 걸까.
‘아, 혹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내다 버리는 불효자들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이 노인도 그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순박한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던 장 씨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어르신, 이것 좀 드십시오.”
“응? 이게 뭔가?”
장 씨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혹시나 싶어 챙겨 온 것인데…… 저는 배가 불러서요.”
이른 아침, 부인이 챙겨 준 주먹밥이다. 힘을 쓰고 난 후라 배가 고팠지만 눈앞의 노인은 오죽할까 싶었다.
“별거 아니지만 드시지요.”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하는구먼.”
“…….”
“농일세.”
조잡한 주먹밥과 장 씨를 번갈아 쳐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마침 속이 허했는데 잘됐군.”
손바닥만 한 주먹밥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운 노인에게 장 씨가 지게를 내밀었다.
“위에 타시지요. 나뭇단 위에 오르시면 그럭저럭 가실 만할 겁니다.”
“응? 여길 타라고?”
“예. 산길이 험합니다. 어차피 내려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장 씨가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럽니다.”
잠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이 혀를 차더니 지게에 올랐다. 장 씨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가벼웠다.
“편안하십니까?”
“엉덩이를 쿡쿡 찔러 대서 죽겠네.”
“조금 천천히 갈까요?”
“천천히는 무슨. 날듯이 뛰어가야지. 아, 그리고 돌아가셨다는 자네 아버지 말인데…….”
“네.”
“어떤 분이셨나? 나를 보고 생각날 정도면 어지간히 잘생기고 훤칠하신 분이었던 모양이군.”
“…….”
부쩍 말수가 줄어든 장 씨의 눈앞에 장가촌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