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04
#203화
나는 눈앞에 뜬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기절하듯 잠드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퀘스트 보상에 관한 메시지였다.
– 퀘스트, [일보 후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보너스 포인트 20을 획득했습니다!
‘엄청 후하네.’
레벨 업 두 번에 보너스 포인트까지 얻었으니 퀘스트 한 번으로 4레벨 업 정도의 효과를 본 셈이다.
아마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생각 이상으로 큰 보상을 받은 듯싶었다.
‘창 닫기.’
스스슥.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사라지자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적천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미리 챙겨 온 행낭이 들려 있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아, 예. 막 깼습니다.”
“몸은 좀 괜찮고?”
“가뿐합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놈이라 그런지 기력도 금방 회복되는군. 곧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아, 다음이요. 그거 좋죠.”
“그럴 줄 알았다. 노부가 네 녀석에게 딱 맞는 걸 준비해 뒀거든. 어디 보자…….”
“저기, 노야.”
“응?”
“그, 다 좋은데요.”
적천강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점혈(點穴)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말 그대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전신이 뻣뻣이 굳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잠든 사이 적천강이 마혈(痲穴)을 점한 것이다.
지금 상태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하신 거겠지만 슬슬 다음 수련도 해야 하니까…… 헤헤.”
“아, 해야지. 수련.”
적천강이 행낭을 뒤적거리며 덧붙였다.
“이게 다음 수련이다.”
“점혈 당하는 게 수련이라고요?”
아니면 점혈을 푸는 게 수련인가?
내가 헷갈려 하던 그때, 적천강이 행낭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여기 있었군. 맨 밑에 박아 놓고 깜빡했어.”
“……그건 밧줄 아닙니까?”
“맞다.”
튼튼해 보이는 동아줄을 어깨에 두른 적천강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뭐, 뭐 하시게요?”
“금방 알게 될 게다.”
이어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커다란 바위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지면 깊숙이 박혀 있었고, 성인 장정 여럿이 두 팔을 벌려도 못 안을 만큼 컸다.
“음. 여기가 적당하겠군.”
작게 중얼거린 적천강이 손날로 바위를 내리쳤다.
서걱, 서걱.
그의 손에 어린 붉은 강기가 천근거석을 치즈 케이크처럼 자르고 쪼갰다. 불과 몇 번의 손질 만에 바위는 별 다섯 개짜리 돌침대로 변해 있었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하겠어.”
“자, 잠깐만요. 설마 여기에 절 묶으려는 건 아니시죠?”
“묶다니, 고정하려는 것이다.”
“…….”
똥이 아니라 대변이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야.
아무튼 이쯤 되니 나도 슬슬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점혈부터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부터 적천강이 뒤적거리고 있는 행낭의 존재도.
‘설마 진짜 채찍이랑 가면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동안 적천강은 밧줄로 내 몸을 바위에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밧줄을 두르고 단단히 묶은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안 떨어지겠어.”
“휴우.”
“뭐냐, 그 안도의 한숨은?”
“귀갑 매듭이 아니라서 안심했습니다.”
“귀갑 매듭? 그게 무엇이냐?”
“……일종의 포박술이죠.”
“포박이라, 군문(軍門)에서 쓰는 것인가 보군.”
“…….”
주로 일본 애들이 많이 씁니다.
‘뭐 어쨌든.’
지금의 나는 대(大)자로 서 있는 것처럼 묶였다.
양 손목과 발목, 그리고 가슴, 배, 다리. 정말 포박이 아니라 고정 그 자체가 목적인 듯싶었다.
‘하긴 마혈을 짚었으니 꽁꽁 묶을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진짜 뭐 하려고 이러는 거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던 그때, 적천강이 마침내 들고 있던 행낭을 풀어 젖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아악!
“헉.”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만성 비염 환자도 한 번에 완치될 것 같은 시원한 청량감이 코를 통해 전신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행낭 안의 물건들을 바라봤다.
“이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세 개의 풀뿌리.
불그스름한 빛을 띤 그것들을 집어 든 적천강이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영약(靈藥)이다.”
“헐, 이렇게 귀한 걸 어디서.”
“창고를 뒤졌다. 온통 쓸모없는 것들만 가득 쌓아 놓는 바람에 더럽게 귀찮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비단이나 금은보화도 그의 눈에는 하등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뼛속까지 무인. 무공 증진에 도움 되는 영단, 혹은 비급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뭐, 사실 이 영단들도 썩 효과가 좋은 편은 아니다. 공력 증진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백 년 하수오나 설삼이 훨씬 낫지.”
“그런데 왜…….”
“굳이 이걸 가져왔느냐고?”
“예.”
“오직 이것들로만 순수한 열양지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다고 아무거나 집어먹어 봤자, 공력의 크기가 늘어날지 몰라도 힘은 떨어진다.”
“아.”
적천강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연료의 문제다. 장작을 아무리 집어넣어 봐야 불을 폭발시키는 것은 기름인 것처럼 말이다.
지금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장작이 아니라 내 몸속에 존재하는 열양지기를 한층 키워 줄 기름인 셈이었다.
‘그나저나 감동인데.’
적천강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다.
괴팍한 성격의 그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열양지기를 머금은 영약까지 특별하게 선별해서 가져왔다는 것은, 진심으로 내게 열화문의 무공을 익히게 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아직 정식으로 제자가 된 것도 아닌데.’
마음도 공력도 따뜻한 남자. 그게 바로 화왕 적천강이었다.
내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그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뭐, 뭐냐. 그 눈빛은.”
“아닙니다. 그냥 노야가 참 좋으신 분 같아서요.”
“……!”
“그거 저 먹이려고 가져오신 것 맞죠?”
적천강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저 눈에 띄었기에 가져왔을 뿐이다.”
“그러시구나.”
“더, 더 좋은 건 노부가 먹으려고 챙겨 뒀다.”
“네. 헤헤.”
“웃지 마!”
빽 소리친 적천강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지금부터 이 영약으로 네 혈도를 타통(打通)할 것이다.”
조금 더 놀릴까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심상치 않다. 나도 모르게 귀가 저절로 쫑긋 섰다.
“혈도를 타통한다고요?”
“들은 대로다. 일전에 노부가 네 녀석의 몸을 살펴보니 근골은 천무지체답게 매우 뛰어나지만, 탁기(濁氣)가 상당하더군.”
“아.”
“얼마 전까지 주색에 빠져 살았다고 들었다. 명검도 오랫동안 방치되면 날이 무뎌지는 법. 제아무리 천무지체라 한들 별수 없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가심법은 안정성이 매우 뛰어난 대신 공력을 순환시키는 힘이나 효율은 떨어졌다.
틈만 나면 운기조식을 돌리지만 지난 20년간 농땡이를 피운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럼…….”
“영약과 노부의 공력으로 몸 안의 탁기를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네 녀석에게 한해서는 벌모세수보다 훨씬 효과가 좋을 테지.”
“듣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네요.”
“글쎄, 썩 반갑지만은 않을 거다.”
“예?”
“곧 알게 될 게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의 손이 내 아혈(啞穴)을 봉했다. 혀가 굳고 소리 없는 외침이 입 안에 맴돈다.
‘뭐야, 이거!’
이제는 그야말로 눈뜬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
석고상처럼 굳어 버린 나를 보며 적천강이 씩 웃었다.
“우선 영약부터 먹자꾸나.”
주름진 손가락이 내 턱을 벌리고 세 개의 풀뿌리를 쏙 집어넣었다.
미처 털어 내지 못한 흙 내음과 입안을 가득 채운 청량감도 잠시. 딱딱한 고체는 혀에 닿자마자 스르륵 녹아 식도를 타고 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 [화령초]를 복용하셨습니다!
– [홍화초]를 복용하셨습니다!
– [염적초]를 복용하셨습니다!
– 퀘스트, [혈도 타통]이 생성되었습니다!
– 당신은 퀘스트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강제 진행됩니다!
‘으헉!’
연달아 울리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신체 내부를 휩쓰는 엄청난 열기.
그제야 앞서 적천강이 했던 말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더럽게 아프다!’
점혈 당한 탓에 소리를 지르지도,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눈만 부릅떴다.
황급히 공력을 끌어 올리려던 그때, 적천강이 남루한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아파도 참아라. 고통은 잠깐이지만 무공은 오래간다.”
툭, 투투투투툭!
흐릿해진 그의 손가락이 내 전신을 찌르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충격에 공력이 흩어지고 낯선 영약의 기운이 몸 안을 누빈다. 나는 끓어오르는 열기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 * *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핏발 선 진태경의 눈동자와는 달리 적천강의 그것은 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순조롭다. 아니, 폭발적이야.’
천무지체라 그런가?
공력이 전달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영약이 품고 있는 삼십여 년의 기운은 마음껏 날뛰며 전신 세맥을 내달렸다.
진태경은 공력을 일으켜 기운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적천강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길들이는 것은 나중이다. 아직은 마음껏 날뛰도록 놔둬야 해.’
길든 투우(鬪牛)는 돌격하는 방법을 종종 까먹는 법.
새로 주입된 삼십 년의 기운은 어떤 제약 없이 막아서는 모든 것을 뚫어 버려야 한다.
자칫 잘못되면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시도. 초절정 고수인 적천강도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놀렸다.
‘견정(肩井), 아문(雅文), 봉안(鳳眼), 입동(入洞)…….’
툭, 투투툭!
그의 인도에 따라 수백 개의 혈도가 열리고 닫히기를 한참. 이내 진태경의 전신에서 검은 땀과 함께 퀴퀴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어지간히 비위 좋은 사람도 헛구역질할 정도로 끔찍한 악취였지만 적천강의 입가는 기쁨으로 실룩였다.
‘됐다!’
이러한 현상은 대량의 탁기가 배출되고 있다는 증거.
그 짐작을 뒷받침하듯 땀의 색이 점점 옅어지고 악취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투명해지고 향긋한 체취가 풍긴다. 적천강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버, 벌써?’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최소 세 시진은 이어질 줄 알았던 과정이 고작 한 시진도 안 되어 끝나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약의 기운이 거의 줄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탁기를 제거하고 순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기운이 소실되기 마련인데, 진태경은 달랐다.
‘역시 천무지체…… 명불허전이다.’
이대로라면 탁기를 모두 제거하고도 삼십 년의 공력을 고스란히 얻을 수 있을 터.
그러나 적천강의 눈동자에는 만족 대신 욕심과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임맥과 독맥. 통칭 임독양맥이라 부르는 산을 넘을 수 있다.
대다수의 무림인이 일평생 수련에 매진해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공력과 깨달음이 필요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천무지체. 그리고 내 도움이 있다면.’
그럼에도 곧장 임독양맥을 뚫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진태경이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걸 어찌한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적천강이 마침내 입을 뗐다.
“임독양맥을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
고통을 참느라 핏발 선 눈이 파르르 떨린다. 적천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진태경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그만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을 겪어야겠지. 한 번의 실수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
“네가 선택해라. 만약 노부를 믿고 맡기겠다면 눈을 두 번 깜빡여라.”
다음 순간, 진태경은 망설임 없이 눈을 깜빡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엿보이지 않는 두 번의 깜빡임.
굳은 신뢰의 눈빛을 느낀 적천강은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이 녀석이 나를 이 정도로 믿고 있었단 말인가?’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른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한번 해 보자꾸나.”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공력이 진태경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 * *
띠링.
– 퀘스트, [혈도 타통]에 관한 정보가 변경됩니다!
– 퀘스트, [임독양맥]이 생성되었습니다! 정보가 갱신됨에 따라 난이도와 보상이 조정됩니다!
시스템 알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시발…….’
분명히 한 번 깜빡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