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23
#222화
츠츠츠츠.
창날 위로 일렁이는 푸른 화염.
그것은 놈의 강철 같은 가죽과 비늘도 막지 못한, 강대한 기운의 집약체였다.
와이번의 유일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눈동자를 뚫지 못할 리 없다.
“뭘 봐, 씹새끼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거대한 눈동자를 향해 창을 꽂아 넣었다.
퍼걱! 치지지직!
가죽? 비늘?
창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핏물이 솟구치고 열양지기가 망막을 태웠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팽창하며 놈의 아가리가 찢어질 듯이 벌어졌다.
– 그아아아아아!
그건 영혼의 울부짖음이었다.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이 딱 벌어진 놈의 주둥이에서,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귀 터질 뻔했네.’
공력을 일으켜 청력을 보호했음에도 귀가 먹먹할 정도다.
창을 박아 넣고 사뿐하게 지면에 착지한 나는 몸부림치는 놈을 응시했다.
쾅! 콰과광!
그나마 멀쩡한 한쪽 날개와 꼬리를 사방팔방으로 휘두르며 발광하던 놈이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크르르르륵.
집채만 한 괴수의 머리.
검은 핏물이 콸콸 쏟아지는 눈동자는 절반쯤 으깨져 있었다.
어지간히 담 큰 사람이라도 뒷걸음질 칠 정도로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이 학습 능력 없는 새끼. 3년 전에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냐?”
비록 두 눈을 잃었다 해도 감각은 남아 있는 법.
고통으로 부르르 떨리던 놈의 고개가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 크륵. 인. 간.
“왜. 와이번.”
– 도. 대. 체. 어. 떻. 게?
불신에 가득 찬 음성에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웃음을 저놈에게 못 보여 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뭐 그런 거지.”
– 내. 마. 법. 은. 완. 벽. 했. 다!
“아, 그건 인정. 좀 놀랐다.”
와이번이 어떤 몬스터인가.
빌딩만큼 거대한 동체와 날개. 웬만한 공격은 다 튕겨 내 버리는 단단함에 브레스까지 쓸 수 있다.
타고난 피지컬 하나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놈이 마법까지 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고작 감속 마법 한 번에 민첩이 50이나 깎일 줄도 몰랐고.’
그때 들었던 시스템 알림에 의하면 ‘용족 특성’으로 인해 마법이 몇 배나 강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내가 그동안 포인트 모아 둔 게 꽤 되거든. 저축이 습관이라서.”
무림 햇병아리 시절에는 포인트를 얻는 족족 스탯을 올렸다.
그때의 나는 약했고, 당장 다음 날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강해지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도 무기가 될 수 있겠구나.
마치 무림인들이 최후의 절초를 마지막까지 감추는 것처럼.
– 그. 게. 무. 슨. 오. 크. 소. 리. 냐!
“뭐긴. 네가 마법 걸어 봤자 끄떡없다는 소리지.”
나는 느긋하게 인벤토리를 열어 새로운 창을 꺼내 들었다. 손톱으로 창날을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 소리에 장님이 된 놈의 몸이 퍼뜩 떨렸다.
– 뭘. 하. 려. 는. 것. 이. 냐!
“알면서 뭘 물어.”
저벅. 저벅.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바짝 웅크린 놈의 몸뚱어리가 움찔거렸다.
“밀린 거 정산해야지. 3년 동안 붙은 이자까지 쳐서.”
타협점은 없다. 놈과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은 내가 아니다.
“죽여 주마.”
– 크아아아!
하지만 놈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비록 내게 한쪽 날개와 두 눈을 잃었지만 명실상부한 네임드 몬스터. 최후의 발악을 할 정도의 여력은 남아 있었다.
– 힐!
스아아아.
다시 한번 거대한 동체를 감싸 안는 검은 마력. 단번에 피가 멎고 새로운 살들이 차오른다. 내가 알고 있던 회복 마법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였다.
마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다. 크. 바. 인. 딩!
촤르르르륵!
뿌연 먼지와 흙으로 뒤덮인 황무지에서 난데없이 솟구쳐 오른 가시넝쿨이 내 온몸을 칭칭 감았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시스템 알림.
삐빅!
– [Lv.??? 카루스]가 속박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 [용족]의 특성으로 인해 마법이 강화됩니다!
– [근력]이 일시적으로 10 하락합니다!
– [체력]이 일시적으로 10 하락합니다!
– [민첩]이 일시적으로 10 하락합니다!
가시넝쿨이 발목부터 다리, 허리와 팔에 이어 목까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넝쿨에 톱날처럼 돋아 있는 가시가 얇은 가죽 갑옷을 뚫고 피부를 파고들었다.
삐빅.
– [마비 독]이 당신의 신체에 침투했습니다!
– [신경 독]이 당신의 신체에 침투했습니다!
– 상태 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허. 뭐야 이건?”
– 크르르르륵.
놈, 아니 카루스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흘렸다. 끔찍하게 부서졌던 눈동자는 어느새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 방. 심. 했. 구. 나. 인. 간!
“방심?”
잠깐 고민하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방심했네.”
– ……뭐. 냐. 그. 여. 유. 는?
“보통 이런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면 둘 중 하나지. 허세 가득한 놈이거나, 아니면…….”
띠링.
– [백독불침]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 [마비 독]이 해독되었습니다!
– [신경 독]이 해독되었습니다!
– 상태 이상, [중독]이 사라집니다!
“방심해도 괜찮을 만큼 믿는 구석이 있거나.”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걸음을 내디뎠다.
허벅지 두께의 가시넝쿨이 온몸을 조이고 있었지만 내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는 김에 대출혈 서비스 해 준다. 근력 50. 체력 50.”
띠링.
– 100포인트가 소멸하였습니다!
– 포인트가 능력치에 적용됩니다!
두둑, 뿌드득.
압도적인 힘과 근력으로 찢고 부순다.
용족의 특성 덕분에 크게 강화되었을 뿐, 카루스가 구사하는 마법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감속 마법, 속박 마법. 다음은 뭐냐?”
이미 눈동자는 거의 다 회복된 상태.
멀쩡하게 넝쿨을 빠져나온 내 모습을 본 카루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 ……너. 너!
나는 팔에 붙은 넝쿨 조각을 툭툭 털어 냈다.
“마법 배워 놓은 거 더 없어? 이거, 하도 자신감이 넘치길래 인수분해 정도는 하는 줄 알았는데 덧셈 뺄셈 마스터였네.”
– 어. 떻. 게!
“나만의 마법이지.”
– 마. 법. 이. 라. 고?
“어. 마법.”
나는 손에 쥐어진 철창을 역수(逆手)로 고쳐 잡았다.
예비 동작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 창이 내 마법이고 놈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후읍.”
깊이 숨을 들이켰다. 전신의 근육이 작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세상이 느려진다.
나는 허리를 젖힘과 동시에 팔을 뿌렸다. 미처 외우지 못한 마법 주문과 함께.
“터져라, 참깨.”
쉭, 후우우웅!
지평선을 물들인 붉은 석양, 그리고 그보다 더 진한 핏빛으로 물든 놈의 눈동자를 푸른 섬광이 파고든다.
태우고, 부수고, 터뜨린다.
뻑!
– 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들으며 놈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얼굴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얼굴들이다. 3년 전 그날 이후, 내 발목에는 늘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분노, 죄책감, 복수심. 켜켜이 쌓이고 쌓인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무겁고 버거웠다.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어느덧 나는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앞서 죽어 간 이들의 넋을 늦게나마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이제야.’
조용히 마음속으로 뇌까리던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놈을 중심으로 마력이 출렁거렸다.
– 크아아악! 슬로우! 다크 바인딩! 매직 애로우!
연달아 터진 세 개의 마법.
나는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빛살 같은 속도로 감속 마법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자마자 가시넝쿨과 마력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앞을 가로막는다.
쉬이이잉! 서걱!
푸른 불꽃이 그리는 반원을 따라 모든 것이 베어지고 갈라졌다. 틀렸음을 직감한 놈이 하나뿐인 날개를 퍼덕거렸다.
굳이 조준할 필요도 없을 만큼 거대한 표적지. 다시 한번 손아귀에서 섬광이 쏘아졌다.
쐐애애액! 퍽!
– 캬우우우우!
후우웅!
날카로운 비명. 이어 가시가 삐죽 솟은 놈의 꼬리가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들었다.
쾅!
그러나 이미 나는 반 박자 앞서 뛰어오른 상태.
바다 위 암초처럼 드문드문 서 있던 황무지의 바위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인벤토리 오픈. 장착.’
하강과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촤아악. 검은 핏물과 함께 토막 난 꼬리가 흙먼지 사이를 뒹굴었다.
– 크아아악!
서걱, 서걱, 서걱.
그것은 정확히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나는 놈이 발악하듯 쏟아 내는 모든 공격을 막고, 피하고, 베었다.
그러다가 문득, 더는 아무런 공격도 날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 크륵, 크르륵.
잘려 나간 두 날개와 토막 난 꼬리.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두 눈.
커다란 피 웅덩이에 잠겨 있는 놈의 아가리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살고 싶으냐?”
– …….
“그럼 치료 마법을 써. 기다려 주지.”
– 사, 살. 려. 줄. 텐. 가?
“아니. 이대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 ……!
“앞으로 열 번만 더 버텨. 널 죽이는 건 그다음이다.”
놈의 몸뚱어리가 파르르 떨렸다. 검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뻥 뚫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 잔. 혹. 하. 구. 나. 인. 간. 이. 여.
“네가 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 나. 는. 할. 일. 을. 했. 을. 뿐. 이. 다.
“알고 있어.”
인간은 몬스터를, 몬스터는 인간을.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역사이자 굴레다. 또한…….
“나도 마찬가지고.”
복수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짧은 침묵 끝에 모든 것을 체념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 ……죽. 여. 라.
꿈틀거리던 몸뚱어리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핏물이 엉겨 붙은 놈의 미간을 향해 창을 겨눴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고맙다.”
지금까지 살아있어 줘서. 그리고 내 손에 죽어 줘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와 함께 힘주어 창을 내질렀다.
푸욱.
미간을 부드럽게 파고든 창날에서 흘러나온 열양지기는 맹수처럼 날뛰며 모든 것을 살라 먹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두개골과 살, 뇌수, 그 밖의 모든 것을.
띠링.
– [Lv.115 카루스]를 처치하셨습니다!
– 업적, [네임드 몬스터 처치]를 달성하셨습니다!
– 당신은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지급됩니다!
– A급 게이트, [블랙 와이번의 둥지]를 완벽하게 클리어했습니다!
– 모든 보상을 합산 중입니다…….
– 엄청난 양의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
.
시스템 알림이 파도처럼 덮쳐 온다. 뜨겁게 달아오른 창대에서 손을 떼고 생각했다.
‘해냈구나. 드디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뭔가에 홀린 듯이 서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진태경 씨!”
“태경아!”
최 팀장, 김 집사, 임꺽정. 송송이.
새로운 인연으로 만난 내 길드원. 내 사람들.
경쟁하듯 달려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풀썩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