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60
#359화
투두둑.
몸에 붙은 돌 부스러기를 털어 낸 서천마군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이 찡그려진다.
“자네, 주먹이 맵구먼. 호신강기(護身罡氣)가 없었다면 정말 크게 다쳤을 수도 있겠어.”
맵기는 개뿔이.
나는 전력을 다한 화염신장과 멸염신권을 처맞고도 멀쩡히 일어서는 서천마군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신강기는 그렇다 치고. 너 같은 놈이 템까지 끼는 건 반칙 아니냐?”
“뎀? 그게 뭔가?”
나는 서천마군의 찢어진 황색 장삼 사이로 보이는 검은색 비늘 갑옷을 가리켰다.
“네가 지금 안에 입고 있는 그거. 이 자식아.”
“아, 흑룡갑(黑龍鉀)을 말하는 거였군.”
“흑룡갑?”
이름 간지 나는 것 보소.
흑룡갑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방어구로서의 성능은 신병이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전력을 다한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아 내고도 비늘이 조금 떨어진 게 고작이니까.
‘저 정도 방어력이면 권, 장으로는 무리야.’
암천의 일반 무인들이 착용하고 있던 피갑도 상당했지만, 흑룡갑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신병이기에는 신병이기.’
흑룡갑의 존재가 있는 한, 적어도 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백염(白炎)이 필수다.
‘그것도 아니라면…….’
탐색하듯 바라보는 내 시선에 서천마군이 빙긋 웃었다.
“자네는 보면 볼수록 참 재미있는 젊은이야. 괴이한 술법도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는 투지가 마음에 들어.”
“그래서. 사귈래?”
“정중하게 거절하겠네. 이미 오랫동안 사귄 정인(情人)이 있거든.”
서천마군이 구불구불한 검신을 부드럽게 쓸었다. 반으로 뚝 부러진 검의 절단면에서 묵빛 검강이 솟아오른다.
“자네 밑천은 모두 보았으니, 이제 내 차례로군.”
서천마군이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걸음을 내디딘다. 숨 막히는 기세가 그의 등 뒤로 날개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천마군의 무공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득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제기랄.”
데엥.
어딘가 2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건 12라운드까지 치르면 끝나는 복싱 경기가 아니다. 환호와 탄식을 내지르는 관객도, 수건을 던져 줄 스태프도 없다.
목숨, 오로지 목숨을 던져야 끝나는 경기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차가운 창대가 손아귀에 잡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서천마군을 향해 창날을 겨누었다.
“들어와.”
서천마군은 사양하지 않았다.
* * *
파팟!
서천마군이 발을 뻗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사라진 신형이 다시 나타난 곳은 내 머리 위 허공이었다.
나는 솜털이 쭈뼛서는 감각과 함께 몸을 뒤로 젖혔다.
사아아악! 꽝!
손톱만큼의 차이로 콧날을 스친 놈의 발뒤꿈치가 바닥을 찍었다. 지면이 움푹 꺼지고 돌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풍압(風壓)에 베인 콧날에서 핏물이 흘렀지만 닦아 낼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쉬쉬쉬쉭!
묵빛 검기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허리, 가슴, 배, 가리지 않고 긋고 베고 휘둘러진다.
과거였다면 결코 피하지 못했을 공격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보인다.’
느려진 세상 속, 나를 향해 쏘아지는 검기를 느꼈다.
저 파괴적인 기운이 어디로 움직일지,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몸은 생각보다 앞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더러는 피하고, 더러는 창을 휘둘러 튕겨 냈다. 자욱하게 솟은 먼지구름과 전쟁 영화에서나 보던 크레이터가 사방에 가득했다.
그리고…….
후우웅!
칙칙한 빛을 뿌리는 묵빛 검강이 먼지구름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가라앉은 눈빛을 한 서천마군이 비스듬한 사선으로 검을 내리긋는다.
무슨 무공인지, 어떤 초식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 물러난다면 내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받아쳐야 한다.’
검강에 맞설 만큼 강한 힘. 내가 가진 최선의 한 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섬(一殲).’
꾸구국.
전신의 근육이 활시위처럼 당겨졌다. 발이 먼저 나가고 한껏 젖혀진 허리가 앞으로 향한다. 어깨와 팔을 타고 흘러간 회전력이 창날에 더해졌다.
콰아아아!
창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기의 집약체.
푸른 화염을 머금은 창날이 나아간다. 공기를 태우고 먼지구름을 살라 먹으며 한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
서천마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검신이 부르르 떨리며 더욱 거대한 검강이 솟구쳤다.
다음 순간, 푸른 화염과 검은 어둠이 격돌했다.
꽈아아앙-!
그러자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굉음과 함께 반경 십여 장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터져 나갔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암석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사이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빌어먹을.”
전력을 다한 일섬마저도 먹히지 않는다니.
허탈해하는 내 모습에 서천마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어깨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일섬이 남긴 전부였다.
“실망할 것 없네. 충분히 위력적인 초식이었으니까. 순간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일세.”
“하나만 묻자.”
“뭐든지.”
“처음부터 힘을 낭비하지 않고 방금 그 일격을 날렸다면…… 널 죽일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서천마군이 대답했다.
“팔 하나 정도는 가져갈 수 있었을 것 같군. 어쩌면 그 이상도. 하지만 죽는 건 자네였겠지.”
“제기랄. 그럴 줄 알았지.”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인 것 같군.”
후우우웅.
이젠 놀랍지도 않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구친 검강이 채찍처럼 휘둘려졌다.
나는 공력의 소모로 인한 극심한 탈력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안 끝났어.”
남아 있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화룡신창(火龍神槍)을 펼쳤다.
앞서와 달리 확연히 크기가 줄어든 푸른 화염이 쏘아진 곳은, 훤히 드러나 있는 서천마군의 목이었다.
쐐애애애액!
그리고 다음 순간, 서천마군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깨달았다.
‘읽혔다.’
깨달음이 뇌리를 관통했을 때는 늦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베어 버릴 것 같던 검강이 허공에서 뚝 꺾이며 창날을 후려쳤다.
꽈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거세게 요동치는 창대를 붙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지면 깊숙이 발목이 틀어박힌 나를 향해 검강이 휘둘려졌다.
쉬쉬쉬쉬쉭!
상하좌우. 내 몸을 중심으로 한 서른여섯 개의 방위에서 가공할 기운이 날아든다.
전신이 곤두서는 감각과 함께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쾅! 콰과과과광!
일격, 일격을 받아칠 때마다 몸이 휘청이고 숨이 막혔다. 이건 속도나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공, 그리고 공력.
서천마군의 무공은 내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에 있었고, 창을 타고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공력은 내 신체 내부를 진탕 시켰다.
‘이런 미친……!’
악문 잇새 사이로 핏물이 튄다. 찢어진 손아귀는 이미 피범벅이 된 지 오래.
나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가슴을 갈라 오는 묵빛 검강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화룡신창 이 초식. 천격.
쐐애애액, 꽈앙!
그러나 화룡의 발톱은 처음과 달리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고, 서천마군의 묵빛 검강은 조금도 힘을 잃지 않았다.
콰드드득!
지면에 긴 밭고랑을 만들며 물러난 내가 목격한 것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뇌옥과 주위에 자욱한 먼지구름이었다.
‘없다.’
앞에도, 좌우와 허공에도 서천마군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돌아서며 일장을 날렸다.
팡! 퍼벙!
동시에 울려 퍼진 두 개의 소리.
화염신장(火焰神掌)의 열기는 공기를 태웠고, 서천마군의 일장은 내 가슴에 닿아 있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심맥이 가닥가닥 끊기는 고통이 뒤를 잇는다. 나는 울컥 치미는 핏물을 삼키며 튕겨 나가는 신형을 바로 잡았다.
“놀라웠네. 진심이야.
“……!”
그건 본능이었다.
어느새 옆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저절로 팔이 움직인다. 목덜미를 향해 쏘아지던 수도(手刀)가 팔뚝을 가격했다.
우두둑!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고통. 이어 채찍처럼 휘둘러진 서천마군의 발끝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퍽, 콰앙!
암석을 부수고 벽면에 틀어박힌 나를 향해 서천마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빛에 서린 감정은 감탄과 기쁨이었다.
“대단하군. 정말이지 대단해. 지금 자네가 뭘 했는지 알고 있나?”
나는 피가래를 뱉으며 대답했다.
“몰라, 이 씨벌놈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네. 전력을 다한 날 상대로 삼백 초를 넘게 버텼으니까.”
“삼백 초라. 그거 눈물 나게 기쁘네.”
“별로 기뻐하지 않은 것 같으니 다르게 말해 주지. 경천신니와 그 장로들이 오백여 초를 버텼다면 어떤가?”
“아니, 전혀.”
“어째서?”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서천마군을 향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어차피 죽었으니까.”
삼백 초, 오백 초, 천 초를 버틴다고 해도 싸움에서 진다면 결국 패자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경천신니나 독왕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쿨럭.”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앞서 서천마군이 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왼쪽 팔은 골절, 가슴 쪽도 뼈에 금이 갔나.’
정말 된통 당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숨쉬기가 불편하더라니.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백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내 모습에 서천마군이 눈동자를 빛냈다.
“아직 보여 줄 게 남았나?”
“물론.”
“그 또한 괴력난신의 힘이겠지. 어서 보여 주게. 어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나는 어린애처럼 흥분하는 서천마군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취한 행동의 전부였다.
“……?”
“뭐 해, 안 들어오고.”
서천마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뭘 한 거지?”
“보여 주고 있잖아. 네가 원하는 괴력난신의 힘.”
“뭐?”
“내가 몸은 잘 쓰는데, 머리는 영 아니거든. 한자 팔 급 시험도 떨어지는 빡대가리라서. 그런데 무협 소설에 괴력난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더라고. 뭔지 모르니까 검색해 봤지.”
이렇게 말해 봤자 내가 하는 말의 절반도 못 알아듣겠지.
시야가 흔들린다. 숨을 내쉴 때마다 폐부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따끔거리고, 언제나 가볍던 창대가 만근의 바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괴력난신.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 그런 뜻이더라고.”
나는 비틀거리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서천마군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을 뿐이다.
“괴력난신이 별거냐. 이 모양, 이 꼴이 나도 싸우겠다고 버티는 놈이 괴력난신이지.”
남은 스탯 포인트? 없다.
몸 상태? 서 있는 것이 용할 정도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간 지금, 내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 가지는 희망이 아니다.
‘독기.’
희망은 사람을 일어나게 만드는 동시에 나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독기가 남아 있다면, 마지막까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쓰러지지 않기로 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화왕도, 청풍도 날 위해 싸웠으니 괴력난신이 아니라 귀신이 된다 해도 놈을 막아서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남아 있는 공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한 줌밖에 되지 않은 기운이 위태롭게 창날을 향해 몰려든다.
미약한 창기(槍氣)가 반딧불이의 그것처럼 어둠을 밝혔다.
“개 잡소리 그만하고 들어와. 이 괴력난신 성애자 새끼야.”
서천마군은 침묵했다.
수많은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끝에, 깊게 가라앉은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