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61
#360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 시간은 한없이 느렸고, 서천마군의 시간은 몇 주 전 보았던 장강의 물살처럼 빠르고 거칠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퍽!
준비 동작도, 움직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서천마군이 한 걸음을 내디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고개가 젖혀진 후였다.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파공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쉭, 퍼벅! 퍼버버벅!
어깨, 가슴, 배. 공력을 머금은 일장, 일권이 물 흐르듯 상반신을 두드렸다.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격통으로 새하얗게 물드는 시야 속, 나는 이를 악물었다.
까드득, 어금니가 깨져 나가며 잠시나마 정신이 돌아온다.
“으아악!”
후웅!
폐부에서 쥐어 짜낸 외침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허점투성이에, 느리기 짝이 없는 주먹을 붙잡은 서천마군이 혀를 찼다.
“아직도 힘이 남았나?”
“……!”
우두둑!
강철처럼 단단해진 근골도 서천마군의 앞에서는 장작개비나 다름없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아귀가 손목을 붙잡고 비틀자 살과 뼈가 함께 으스러졌다.
이미 한 번 부러졌던 왼팔의 뼈가 조각조각 나며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크아아악!”
“걱정 말게. 나중에 솜씨 좋은 술사(術士)들을 불러 치료해 줄 테니.”
“좆…… 까!”
얼굴에 튄 핏물을 닦는 서천마군을 향해, 아직 멀쩡한 오른팔을 내질렀다.
희미한 창기가 서린 백염의 창날이 놈의 하반신을 향해 찔러 들어간다.
쉬익. 턱.
그러나 창날은 너무나도 손쉽게 가로막혔다.
흑룡갑(黑龍鉀)도, 호신강기도 아닌 서천마군의 손에 의해서였다.
“덧없는 짓이야.”
묵색 강기(罡氣)에 휩싸인 손이 힘을 주어 창날을 붙잡는다. 흐릿하게 맺혀 있던 기운은 어둠에 잠식되는 것처럼 사라졌다.
“포기하게.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서천마군이 창날을 잡아당겼다.
나는 온통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범벅이 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창대를 억지로 붙잡았다.
쓰라린 고통이 밀려왔지만 참을 만하다.
고통이라면 과거에도, 지금도 지긋지긋하게 겪었으니까.
후웅, 쿠당탕!
창대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 움큼의 흙먼지가 입 안으로 들어와 핏물과 뒤섞였다.
얼음처럼 차갑고 악취를 풍기던 지하 뇌옥의 바닥이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졸립다.’
지금 눈을 감는다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지는 긴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어쩌면 무림이 아니라 현대에 있을지도 모르지.
중국 사천으로 향하는 푹신한 전용기 좌석도 괜찮고, 퀴퀴한 홀애비 냄새가 배어있는 희망 고시원의 원룸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꿈일 수도 있지.’
일 년이 넘는 그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F급 헌터 진태경에서 태원 진가의 망나니 삼공자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망나니에서 산서잠룡으로.
참혹한 전쟁과 숱한 죽음을 보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진위경부터 동생이라면 껌뻑 죽이고 싶어 하는 진무경.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도 늘 곁을 지켜 준 혁무진과 친구인 동시에 호적수인 청풍.
그리고…….
‘노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감겨 가던 눈꺼풀이 우뚝 멈췄다.
맞다. 화왕 적천강.
그가 내 뒤에 있고, 그의 앞에 내가 있다.
그렇기에 나는 쓰러져서도, 도망쳐서도 안 된다.
‘저 건방진 새끼. 태경아, 먼저 가라.’
‘혀, 형!’
‘금방 따라갈게.’
벌써 삼 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고, 그들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과거의 내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힘을 얻은 후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어떠냐. 화신귀무. 끝내주지?’
그때의 적천강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가장 절친했던 벗의 원수를 갚았다는 기쁨. 그리고 제자인지 원수인지 모를 핏덩이 하나를 지켰다는 안도가 서려 있었다.
“네. 끝내주네요…….”
찢어지고 부풀어 오른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느새 지하 뇌옥의 바닥이 더 이상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불쾌한 냉기와 악취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나마 멀쩡한 오른팔로 바닥을 짚었고, 두 무릎으로 지탱했다.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고 동작은 느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덜덜 떨리는 다리로 우뚝 섰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깊게 가라앉아 있는 한 쌍의 눈동자였다.
“대단하군. 미련해 보일 만큼.”
퍽!
코뼈가 부러지며 고개가 꺾였다. 하지만 쓰러지거나 뒷걸음질 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서천마군의 손아귀가 족쇄처럼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하지 않았나. 이미 끝났다고.”
콰득.
어깨뼈가 으스러졌다. 힘이 빠져나간 내 손아귀에서 창대가 힘없이 미끄러진다.
분명 끔찍한 고통이 잇따르는 게 당연한데, 정작 내가 느끼는 고통은 희미했다.
“도움을 기다리는 거라면 헛짚었어. 사천당문은 멸문당할 테니까. 아니, 지금쯤이면 모든 게 끝나 있을 수도 있겠군.”
우두둑!
이번에는 다리다. 그나마 온전하던 두 다리의 정강이가 동시에 부서지며 중심을 잃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일어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서천마군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남에서처럼 누가 자네를 도울 수 있을까. 보름이 지난 후에야 이 소식을 듣게 될 검성? 고군분투하고 있을 검성의 후인? 그도 아니라면…….”
서천마군의 고개가 움직였다.
나와의 격돌로 파괴되고 무너진 텅 빈 뇌옥 너머, 굳게 닫힌 철문 하나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자네의 스승?”
“쿨럭.”
“바뀌는 것은 없다네. 바로 오늘 당문과 청성, 아미는 멸문할 것이고. 자네들은 모두…….”
“쿨럭!”
서천마군은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흙과 핏물이 뒤섞인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의 얼굴을 덮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이미 사지가 으스러진 내가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찰나라고 부를 만큼 짧은 순간, 내 목을 잡은 채로 굳어 버린 놈을 향해 나는 있는 힘껏 박치기를 날렸다.
뻑!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서천마군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공력은 진작 고갈되었고, 심각한 내상으로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던 내게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나 스스로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젠 생각할 시간도 없겠지.’
방금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어루만지던 서천마군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정말이지…… 위험한 친구야.”
나는 흐릿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대가리를 깨트렸어야 했는데.”
“마지막에 호신강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괴물 같은 놈.”
“허,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나를 바라보는 서천마군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쳤다.
그것은 언뜻 보면 분노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경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구구구궁, 쿠궁!
소리의 진원지는 나와 서천마군이 아니었다.
지하 뇌옥. 수백 장에 이르는 이 공간 전체가 몸을 떨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주먹만 한 돌이 떨어져 내렸고, 지면은 조금씩 갈라졌다.
소음과 진동은 금세 멎었지만, 서천마군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힐끗 천장을 바라본 서천마군의 중얼거린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그리고 곧장 등을 통해 작은 충격이 전해졌다.
쿵!
벽이다. 놈이 나를 벽면으로 집어 던진 것이다.
쿨럭, 핏물을 토해 내는 내 귓가에 덤덤한 목소리가 닿았다.
“거기에 잠시 앉아 있게. 금방 다시 돌아오지.”
“너…….”
“만일 자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데려갈 것이고, 혹시 죽어 있다면…….”
잠시 침묵하던 서천마군이 말을 이었다.
“그것 역시 나쁘지 않겠지. 자네는 위험한 사람이거든.”
“머, 멈춰.”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서천마군의 뒷모습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놈을 붙잡아야 했다. 적천강과 신의가 붙잡히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쿨럭. 쿠에에엑!”
벌어진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군데군데 섞인 덩어리들은…… 빌어먹을. 내장 조각이다.
처음 보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짙은 절망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불구가 된 사지와 치명적인 내상.
마음은 서천마군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으스러진 팔과 다리로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신음과 함께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서천마군의 신형이 사라진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나와 서천마군의 격돌로 초토화된 그곳에는 크고 작은 크레이터와 무너진 벽면 같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죄수들이 갇혀 있던 뇌옥 안은 휘어진 창살과 떨어져 내린 바위로 인해 부서진 사슬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에 나는 깨달았다.
‘끝났구나.’
싸웠고, 졌다.
막고자 했으나 막아서지 못했고. 지키려고 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서천마군. 놈이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하남에서와 같은 행운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문과 아미, 청성은 멸문의 수순을 밟을 것이고 청풍은 그들을 홀로 감당하지 못한다.
‘아마 죽거나 사로잡히겠지.’
차라리 녀석이 도망치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벌이지지 않을 것이다.
청풍은 그런 사람이니까.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은인을 구하겠다며 지하 뇌옥으로 돌아오고야 말 녀석이니까.
나는 출구가 있는 컴컴한 저 너머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빌어먹을…….’
전부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청풍도, 적천강도, 괜한 일에 휘말려 화를 겪게 될 신의도.
그나마 혁무진과 궁기방을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구구궁.
지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작은 진동이 느껴진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소리다.
복싱처럼 12라운드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작 3라운드만에 쓰러졌고, 아마도 곧 죽을 것이다.
‘미안해. 모두.’
캡슐의 이용설명서에 적혀 있던 간단한 규칙.
무림에서 죽으면 현실의 나도 죽는다.
두 세계를 오가며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이 지하 뇌옥처럼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눈앞이 흐릿해진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귀를 통해 전해지던 소리도 서서히 멀어져 간다.
그리고 모든 감각에서 떨어져 나가려던 그 순간, 한 노인의 얼굴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에 뜯겨 나간 흔적이 남아 있는 쇠사슬.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몸에 훌쩍 큰 키.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천력마(天力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