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62
#361화
저벅, 저벅.
서천마군의 걸음에는 일말의 다급함이나 머뭇거림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머리 위 천장에서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암석 부스러기가 떨어져도, 칠흑 같은 어둠이 앞을 가로막아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사대마군(四大魔君)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다만 한 가지, 지엄하신 천주(天主)의 명을 완수하지 못할까 우려되기는 했다.
‘진태경, 그 아이에게 한참을 붙잡혀 있었군.’
설마 이렇게까지 시간을 지체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떠오르는 진태경의 생각에, 서천마군은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부풀어 오른 둔덕이 느껴진다. 찢어진 손아귀와 피가 흘러나오는 팔뚝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부상이다.
‘혹이라.’
진태경은 사지가 부러진 채 매달려 있었다.
분명 공력은 바닥났고, 평범한 절정 고수라면 진즉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호신강기로도 온전히 막아 내지 못했다니.”
서천마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태경은 한낱 피륙으로 호신강기를 뚫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서천마군의 머릿속에 혼신(渾身)과 필사(必死).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이것이야말로 괴력난신이 아닌가.’
참을 수 없이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무공의 경지로 치자면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청풍이 앞서겠지만, 진태경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람. 그 자체로 강하다.’
절정의 경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공. 그리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집념.
때마침 진태경의 힘이 다하지 않았더라면, 서천마군은 망설임 없이 그의 숨통을 끊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인가.”
서천마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굳게 닫힌 철문 앞이었다. 대부분의 뇌옥이 창살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치료실의 거대한 철문은 단연 눈에 띄었다.
물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서천마군의 기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군.’
서천마군은 망설임 없이 수도(手刀)로 철문을 내리그었다.
손날에 실린 강기는 한 뼘 두께의 강철로 이루어진 철문과 잠금장치를 손쉽게 베어 냈다.
스겅, 쿠웅!
절반으로 갈라진 철문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치료실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긴 서천마군이 한 사람을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그대가 신의(神醫)인가?”
한빙석(寒氷石)으로 이루어진 침상의 옆,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잔잔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세상 사람들이 붙여 준 헛된 미명일 뿐이오.”
“그대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 이름과 나이, 심지어는 사내인지 여인인지도 모른다기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네.”
“그래서, 직접 보니 어떻소?”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군. 구름 위의 신선처럼 고고한 척하는 도사 놈들보다 훨씬 신선 같아 보이기도 하고.”
신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려. 이 늙은이가 신선이라면, 악귀를 몰아낼 힘 또한 지녔을 테니 말이오.”
“내가 악귀처럼 보이는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서천마군이 빙그르르 제자리를 돌았다.
평범한 얼굴과 체격. 온통 찢어지고 피로 물든 장삼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중년인이었다.
“천주께서 하늘로부터 지상에 임하시니, 전능하신 그분의 권능 아래, 충직한 네 사람의 종이 있도다.”
서천마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악귀도, 신선도 아니라네. 그저 그분의 명을 따르는 한 사람의 종일 뿐이야.”
“……!”
그 말에 묻어나오는 진심을 느낀 신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주? 종?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눈앞의 사내는 그야말로 광인(狂人)임이 분명했다.
“허튼소리!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르는 그대가 악귀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오!”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어쩌겠나. 그분의 뜻에 반하는 이들을 지우는 것도 내 소임인 것을.”
“다, 당신은 도대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서천마군의 모습에 신의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배어 나오는 짙은 혈향에 욕지기가 치밀 정도였다.
“썩 나가시오.”
“음? 지금 뭐라 했나?”
“썩 나가라고 했소. 진료 중에는 그 누구도 들어와서는 아니 되오. 특히 당신 같은 악귀는 더더욱.”
딱딱하게 굳은 신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천마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꽉 막힌 의원인 줄 알았더니, 농담도 잘하는군. 이보게, 신의. 진료는 이미 끝났다네.”
“끝나지 않았소.”
서천마군이 즐거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적천강이 있었다.
“글쎄, 내 소견으로는 환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네만.”
“그 전에…… 의원의 허락을 구해야 할 거요.”
신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파파팟!
펑퍼짐한 소매 안에서 수십 개의 빛줄기가 튀어나왔다. 각각 크고 작은 침들은 직선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호선을 그리며 목 뒤의 사혈(死血)을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쏘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보는 서천마군의 웃음은 되레 짙어졌다.
“재미있군.”
투두두둑!
그 어떤 동작도 없었다. 다만 서천마군의 전신을 감싼 강대한 호신강기가 제 역할을 톡톡히 했을 뿐이었다.
수십 개의 침이 호신강기에 가로막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안타까워.”
콰드득.
서천마군이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침들을 낚아채어 뭉개 버린다.
신의가 아무리 무공을 배웠다고는 하나, 서천마군과의 격차는 하늘과 땅의 간극만큼이나 광활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진료는 끝났네.”
“……!”
서천마군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신의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공할 공력의 소유자만이 보일 수 있는 허공섭물(虛空攝物)의 기예.
무언가에 퉁겨지듯 날아가, 서천마군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신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악……귀.”
“거리낌 없이 살수(殺手)를 펼친 의원이 할 말은 아닌 듯싶은데. 가만있자, 그럼 자네 역시 악귀가 아닌가?”
“그대의 손에 묻을 피를 생각한다면, 내 기꺼이 악귀가 되겠소!”
쉬익, 턱.
신의가 피를 토하는 외침과 함께 내뻗은 일장은 간단하게 가로막혔다.
우두둑, 힘을 주어 늙은 의원의 손아귀를 부러트린 서천마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당 가주가 한 말이 맞았군. 그대가 갖고 있었어.”
서천마군이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신의의 손이었다.
그의 주름진 손가락에는 의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이것이 만독지환(萬毒指環)…….”
은은한 광채을 띤 고리와 빛과 어둠을 한데 가둬놓은 듯한 보석.
무언가에 홀린 듯 황홀한 눈빛으로 이번 임무의 목적을 바라보던 서천마군이 신의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만독지환을 빼내어 자신의 손에 끼웠다.
“천주께서 기뻐하시겠군.”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신의가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할 셈이오.”
“궁금해하지 말게. 어차피 자네 역할을 여기에서 끝이니까.”
쉬익, 퍽!
칼날처럼 쏘아진 장력이 신의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하단전이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저 멀리 튕겨 나간 신의가 피를 토했다.
“쿠웨에에엑!”
“이제 의원의 허락은 필요 없어 보이는군. 안 그런가?”
신의는 절망했고, 서천마군은 크게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마침내 천주께서 원하시던 만독지환을 손에 넣었고, 천하를 주름잡는 세 개의 문파를 이 땅에서 지웠다.
이제 그를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끝내고 귀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 함께 가도록 하지. 그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거든.”
한빙석 위,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적천강을 향해 속삭인 서천마군이 허공섭물로 그의 신형을 끌어당겼다.
아니, 끌어당기려던 그때였다.
우우우웅.
“……!”
낮고 작은, 흡사 벌떼가 우는 듯한 소리.
서천마군이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그것은 공기의 떨림이었고, 아주 미세한 진동이 점점 가까워졌다.
‘설마, 벌써 붕괴가 시작된 건가?’
서천마군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철문이 사라진 치료실의 밖, 컴컴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저게 무슨…….”
짐짓 눈살을 찌푸린 다음 순간. 서천마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우우웅, 구구구구궁!
거세지는 진동, 찢어지는 바람과 공기.
그리고.
콰아아아!
공간을 지우며 쏘아지는 거대한 빛.
아니, 푸른 화염에 휩싸인 한 자루의 창.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의 이름에, 서천마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괴력난신! 실로 괴력난신이로구나!”
앙천대소(仰天大笑)와 함께 일어난 거대한 어둠이 쏘아졌다.
푸른 화염에 휩싸인 백염(白炎)이 어둠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지하 뇌옥을 떨어 울리는 굉음 사이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실은 가족, 제자 아니면 출입 금지야. 이 씨벌놈아.”
* * *
저벅, 저벅.
나는 먼지구름을 헤치며 나아갔다.
천장에서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암석도, 칠흑 같은 시야도 내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저 너머에 있을 한 사람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괴물 같은 놈. 이 정도로 죽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진다. 서천마군의 몸에 웅크린 거대한 기운이.
그러나 전만큼 두렵지는 않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고강한 공력이 손에 잡힐 듯했다.
‘천력마.’
나와 서천마군 간의 격돌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기회였다.
천장이 붕괴하며 떨어진 암석이 구속구를 끊어 주었고, 마두라 불리는 노인은 수십 년 만에 뇌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천력마의 첫 마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죄수들을 모두 죽였더군.’
‘쿨럭. 그래서?’
‘네놈, 왜 날 살려 뒀지?’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나?’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당장 네놈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으니.’
‘촌각만 더 기다려. 알아서 끊길 테니까.’
‘놈!’
병신들끼리의 대화였다.
사지가 으스러진 놈, 이미 근맥이 잘려 나간 놈.
하지만 천력마가 나보다 나았던 점은, 그나마 공력이 온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고,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과 마지막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다.
‘죽이기 싫었어.’
‘어째서?’
‘최소한 내가 아는 당신은 마두가 아니었으니까.’
‘……!’
‘정파의 나쁜 놈보다는 마교의 착한 놈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라서. 그런 사람을 죽이면 내가 꼭, 마두랑 같은 부류가 될 것 같았거든.’
사실 망설이고 망설였다. 천력마를 죽이면 막대한 경험치와 몇 번의 레벨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은 포기였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서천마군은 레벨업 한두 번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찝찝한 감정을 안고 죽느니, 이렇게 후련한 상태로 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 나를 한참이나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천력마는,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지.’
나는 천력마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손을 휘저었다.
막대한 풍압에 먼지구름이 흩어지며 놈의 모습이 드러난다.
“형 왔다.”
“크하! 크하하하!”
나는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채 폭소를 터트리는 서천마군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십여 미터 뒤, 문이 사라진 치료실에 비틀거리며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천강이 무사하다는 뜻이다.
‘다행이다. 늦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비로소 웃음을 그친 서천마군이 고개를 들었다.
“자네, 몰라볼 만큼 변했군.”
“선물을 받았거든. 생각지도 못한 사람한테서.”
“선물?”
“그래. 공력을 받았지.”
서천마군이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격체전공(隔體傳功)!”
“뭐, 그렇게 부르기도 하던데.”
“자네가 말하던 그 힘을 사용했나? 흡정마공과 같은?”
“아니.”
“기연을 얻었군, 하하!”
“공짜는 아니야. 한 가지 부탁을 받았지.”
“부탁?”
“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공력을 넘겨주며, 천력마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서천마군을…….’
“죽여 달라더라.”
투두두둑. 덥석.
손을 뻗자, 벽면 깊숙이 박혀 있던 백염이 뽑혀 나와 손아귀에 잡힌다.
삼 갑자의 공력으로 덩치를 부풀린 화룡이 날개를 폈다.
“넌…… 죽었어.”
서천마군이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