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88
#387화
지하 벙커를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스며든다. 저 어딘가에 있을 무림의 사천을 떠올리며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그마한 손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따라올래? 가볍게 한잔할 생각인데.」
“지금요?”
「응. 우리끼리.」
파이 첸이다. 그녀의 등 뒤에는 ‘우리’에 속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기품이 넘쳐흐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동양의 귀부인이여, 혹 함께 마실 술 중에 로마네콩티가 있는가?」
「귀부인은 아닌데, 당연히 있지. 술 좋아해, 왕자?」
필릭스 왕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왕자가 아니라 필릭스 전하라고 부르라니까. 그리고 술은 적당히 즐기는 편이다. 특히 로마네콩티 45년 산을.」
「45년 산은 없는데.」
「그럼 거절하지. 난 이만.」
저거 진짜 미친놈인가.
필릭스 왕자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사라지자 파이 첸이 남은 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갈 거지. 존슨?」
매직 존슨이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미안하군.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
「왜?」
「당장 내일 전선에 투입될지도 모르는데, 메모라이즈(Memorize) 정도는 해 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역시 대마법사. 대격변의 영웅은 괜히 되는 게 아니구나.
매직 존슨의 마음가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내가 입술을 뗐다.
“저도 지금은 안 될 것 같은데요.”
「안 돼.」
“왜요?”
「넌 왕자도 아니고, 대마법사도 아니잖아.」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어이가 없네.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놓는 건 둘째치고 이런 판국에 술을 마시자는 저 아줌마도 정말 어지간하다.
「너, 방금 속으로 내 욕했지? 이런 상황에서 술이나 마시는 생각 없는 아줌마라고.」
“……어떻게 알았어요?”
「어머, 얘 쓸데없이 솔직한 것 좀 봐라?」
파이 첸이 긴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쿡 찔렀다. 외관만 보면 20대 초반의 미인인데, 실상은 어머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기분이 묘하다.
“다른 사람 찾아보시는 게 어때요? 이정룡 씨라거나…….”
「리(Lee)?」
파이 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정룡은 이미 자신이 데려온 아레스 길드원들과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흠. 뭔가 어려운 사람이라서. 대격변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능구렁이가 다 됐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사람 보는 눈이 상당히 정확한데.
파이 첸은 저 멀리 사라지는 또 다른 후보를 힐끗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우헤이싱. 쟤는 너무 예의가 없고. 같이 마시면 술맛 떨어져.」
나는 인적 드문 숲속으로 향하는 우헤이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 드시는 수밖에.”
「아니. 술은 이런 날에 마시는 거란다.」
“……?”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니.」
“아.”
파이 첸이 왜 술을 찾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전쟁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동시에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예측하지 못한 이별이 찾아오기도 한다.
대격변을 통해 수많은 동료를 잃었던 그녀만의 전야제(前夜祭)인 셈이다.
당장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우리 중 누군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수도 있으니까.
「뭐, 어쨌건 이렇게 된 이상 표적을 바꾸는 수밖에 없네. 안 그래, 거기 잘생긴 총각?」
“저 안 간다니까요.”
파이 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양심이 없니? 너 말고 저 청년 말이야.」
파이 첸에게 지목당한 잘생긴 총각, 최 팀장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 주신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어, 팀장님. 진짜 가시게요?”
“가야죠. 파이 첸과 함께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언제 또 오겠습니까. 궁금한 것도 많고요.”
파이 첸이 까르르 웃었다.
「잘생긴 줄만 알았는데 말도 예쁘게 하네.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혹시 지금 착용하고 계신 장비. 어디서 구매하신 겁니까?”
「……그게 질문이야?」
“예.”
「얘도 만만치 않네.」
한숨을 푹 내쉬는 파이 첸을 보며 매직 존슨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미스 첸, 그럼 이제 다 같이 한잔하러 갈까?」
「다 같이? 존슨 당신 안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여자랑 단둘이 술 마시는 취미는 없거든. 하지만 여기 있는 미스터 최처럼 매력적인 남자가 동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
「난 남자가 좋아. 특히 동양인 남자.」
「그, 그래. 가자.」
역시 타임지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소수자 1위답다.
나는 바짝 굳은 채 끌려가는 최 팀장에게 전음을 날렸다.
–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 최 팀장이 두 S급 헌터와 함께 사라지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방향이었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컴컴한 오솔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컴컴한 어둠 속에 멈추어 서서 입을 열었다.
“나와.”
잠깐의 침묵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법이군.」
부스럭.
인기척과 함께 나타난 한 사람, 우헤이싱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떻게 알았지?」
저걸 말이라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차라리 일 더 하기 일이 뭐냐고 물어봐라. 그게 더 어렵겠다.”
「음. 생각보다 실력 있는 놈이었군.」
“이제 와서 칭찬하는 척하지마. 개수작 부리려는 거 뻔히 보이니까.”
「……!」
정곡을 찔린 우헤이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참 다루기 쉬운 놈이다. 서른 중반이 넘은 나이로 알고 있는데 저렇게 단순하기도 힘들다.
「그, 그게 아니라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빵즈라고 생각하겠지. 아직 정식 S급 헌터도 아닌 웬 한국놈이 너 대신 주목받으니까 짜증 났을 거고. 특유의 일차원적인 행동으로 시비부터 걸고 봤는데, 이게 영 반응도 안 좋고 저 빵즈 놈도 생각 외로 만만치가 않네?”
나는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래서 괜히 마음에도 없는 칭찬 몇 번 날려 주고, 우호적인 제스처 취하면서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 중에 틀린 부분 있냐?”
「…….」
“그래, 너 같은 놈 많이 봤다. 뒤통수를 하도 처맞았더니 안 돌아가던 머리가 휙휙 돌아가더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우헤이싱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다른 수작을 부리려던 건 아니었다.」
“아니면? 혹시 나랑 친해질 생각이면 곱게 접어서 넣어 둬라. 똥 옆에 있으면 나한테까지 냄새 배니까.”
「……!」
“그런데 너 지금 뭐 하냐?”
내 나직한 한마디에, 검파를 향해 움직이던 놈의 손이 우뚝 멈췄다.
“뽑지 마라. 다친다.”
갈등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우헤이싱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순순히 따라온 거지?」
“물어볼 게 있어서.”
「뭐?」
난 우헤이싱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음(傳音). 맞지?”
「……!」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곧 대답이다. 설마 했는데,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맞나 보네. 하긴, 본토니까 여러 가지 무공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내공심법이라던가.”
「무, 무슨 소리! 그건 메시지 마법…….」
“얼씨구.”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는 녀석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무공을 접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겠지만, 나까지 속일 수는 없다.
‘잠깐 나 좀 보지.’
회의가 끝날 무렵 귓가에 닿은 것은 분명 전음이었다.
무시할 수도 있었던 제의에 응했던 이유는, 전음을 보낸 장본인이 바로 우헤이싱이었기 때문이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어?”
나는 당황하는 우헤이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확실히 신기하긴 하네. 너희 문화 대혁명이다, 뭐다 해서 무술인들 싹 다 조져 놓지 않았었냐? 그 와중에도 용케 무공이 남아 있었네.”
「주둥이 닥쳐!」
“아, 너 집안 빵빵하다고 했었지. 그럼 공산당 최고위층이 직위를 이용해서 슬쩍 빼돌린 건가?”
「…….」
순식간에 착 가라앉은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다.
엄연한 외국인인 나로서는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공심법. 즉 현대에 이르러 마나 연공법이라 불리는 이것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
‘이곳이 무림이었다면, 한바탕 피바람이 일었겠지.’
그렇게 몰래 빼돌린 금송아지를 들켰으니, 놈의 반응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방금 했던 말, 두 번 다시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딱히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투가 상당히 띠껍네.”
우헤이싱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안 후에도 네놈이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을까?」
“네 아버지가 누군진 모르겠고, 홍위병 출신이었을 것 같긴 한데.”
「……!」
“소싯적에 오함마 들고 공자 묘 때려 부순 게 너희 아버지 아니냐?”
「이 빵즈 새끼가-!」
파팟!
분기탱천한 고함과 함께 놈의 신형이 쏘아졌다.
어느새 검집에서 뽑혀 나온 직검(直劍)에서 솟구친 오러 블레이드, 아니 검강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쉬이이이잉!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닥에 닿을 만큼 허리를 젖혀 검강을 피해 낸 나는, 몸을 튕기듯 일어나며 무릎으로 놈의 턱을 쳐올렸다.
콰직!
허공으로 솟구치는 치아와 핏물. 순간 비틀거리는 놈의 두 팔을 움켜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 검. 뽑지 말랬지.”
치이이익, 우두둑!
「크아아아악!」
양손에 실린 강대한 열양지기가 갑옷을 부수고 살을 태운다.
우헤이싱의 입술 사이로 뛰쳐나온 비명은 내가 펼쳐 놓은 기막(氣幕)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노옴!」
후우우웅!
이놈, 권각술(拳脚術)까지 익혔다. 허접한 검법과는 달리 이건 제법 예리하다.
물론…….
‘무림이랑 비교하면 무공의 질이 훨씬 떨어져.’
나는 약간의 실망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꽈앙!
공력과 공력의 격돌.
내 허리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러진 놈의 다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우헤이싱의 눈동자가 충격과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잘.”
발목을 덥석 붙잡은 나는 땅을 향해 있는 힘껏 놈을 패대기쳤다.
후우웅, 콰앙!
한 번 더.
후우우웅, 쾅!
더, 더, 더.
쾅! 쾅! 콰과광!
땅이 뒤집히고 바위와 나무가 뽑혀 나간다.
잠시 후 생체 곡괭이질이 멈췄을 때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우헤이싱이 커다란 크레이터 안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래도 몸은 튼튼해서 별로 안 다쳤네.”
「흐, 흐어…….」
“야, 우냐?”
「흐어어어…….」
아주 정신이 나갔군.
혀를 차며 허리를 굽힌 나는 놈의 주머니를 뒤졌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주머니를 얼마나 헤집었을까, 마침내 원하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여기 있네. 상급 포션.”
띠링.
– [최상급 포션]을 습득하셨습니다!
“……이 아니라. 최상급 포션? 뭐야, 이 새끼.”
나는 놀란 눈으로 뻗어 있는 우헤이싱을 바라봤다. 아무리 S급 헌터라지만 이런 물건을 들고 다니다니.
상급 포션도 희귀하지만, 최상급 포션은 일 년에 한두 개 나올까 말까 하는 물건이다.
현실감조차 들지 않는 가격은 둘째치고, 희소성이 너무 높은 탓에 돈이 있어도 못 구한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걸 여기서 보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최상급 포션을 슬쩍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놈의 주머니를 뒤져 상급 포션 하나를 찾아내 부어 주었다.
“합의금 챙겼으니까 이쯤에서 봐준다. 너도 켕기는 거 많으니까 오늘 일 어디 가서 떠들면…… 알지?”
「흐으, 흐으으으…….」
“오케이. 우리 합의 본 거야.”
깔끔하게 사태를 마무리한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최 팀장으로부터 짤막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 최 팀장님
최 팀장님
지ㄴ태경시제발빠ㄹ리 와주세요
“…….”
안 돼, 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