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82
#581화
화륵, 콰앙!
불의 채찍이 지면을 후려쳤다. 쌓여 있던 눈이 녹고 예티의 피가 끓어오른다. 김화종의 악문 잇새로 씹어뱉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송천우, 이 개새끼가…….”
노집사의 부릅뜨인 눈동자는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그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끝날 거였다면, 놈이 이런 식의 죽음을 맞이할 거라면 자신의 손으로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송천우는 어디서 끌어 올렸는지 모를 마지막 힘을 발휘하여 깊은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이했다.
배반자에게는 과분한 최후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중요한 증인이 사라졌군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닙니다.”
한숨과도 같은 김화종의 중얼거림에 최민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도무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크레바스에 못 박혀 있었다.
“김 집사님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더 주의하지 못한 제 탓이니까요.”
승리는 경계심을 무디게 만든다. 결코 쉽지 않았던 싸움이라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최민우는 채 반의반도 비우지 못한 포션을 자신의 몸에 쏟아부었다.
치이익.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 그는 미약한 통증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송천우는 이것이 가족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간절했던 것 같군요.”
김화종이 거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병신 같은 놈. 이렇게 한다고 가족들이 산다는 보장도 없는데 뭣 하러.”
“그만큼 두려웠던 거겠지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는 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 최민우는 크레바스에서 시선을 뗐다. 정확한 깊이는 모르겠으나, 어림잡아도 수백 미터는 될 법한 낭떠러지다.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송천우가 추락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길드원들을 불러야겠습니다. 아니, 길드 하우스에 인력 파견을 지시하는 것이 빠르겠군요.”
이십 년이 넘도록 함께한 두 사람이다. 김화종은 최민우의 뜻을 즉각 알아차렸다.
“시신을 수습하실 생각입니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정도는 해 봐야겠죠. 송천우는 아직까지 아레스 길드의 유럽 총괄 지사장입니다.”
숨이 끊겼다고 해도 신분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의 절반이라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파장은 아레스라는 철옹성을 넘어 석고준을 뒤흔들 것이다.
“살인미수, 살인 청부, 뭐든 간에 그 아레스 길드의 부길드장이라고 해도 벗을 수 없는 오욕(汚辱)이 될 겁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석고준은 다르다. 최민우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를 성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이제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바빠질 겁니다. 저도, 김 집사님도.”
김화종이 대견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다행입니다. 김 집사님이 늘 제 옆에 계셔서.”
“도련님도 제가 더 늙기 전에 부려 먹으십시오. 석고준, 그놈이 이런 개 같은 일을 벌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최민우는 크레바스를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송천우와의 격렬했던 전투 때문인지, 아니면 상당량의 피를 흘려서인지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와 함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조금씩 몽롱해지던 의식 속에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던 최민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철벅.
눈과 피가 뒤섞인 구정물이 주위에 튀었다. 뒤따르던 김화종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하지만 최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탁한 구정물로 이루어진 웅덩이. 그 안에 반쯤 잠긴 자신의 발을 말없이 노려보다 문득 중얼거렸다.
“후회.”
“네?”
“김 집사님께서 조금 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석고준이 이런 개 같은 일을 벌인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그랬습니다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왜’가 빠져 있었습니다. 석고준이 왜 이런 개 같은 일을 벌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최민우는 웅덩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걸음만으로도 구정물이 튀고 파문이 일어나는데, 어째서 석고준은 자신을 죽일 암살자로 아레스 길드에 속해 있는 송천우를 보냈을까.
그가 대단한 실력자라서? 아니면 배반자이기 때문에?
둘 다 틀렸다. 이건…….
‘함정.’
벼락과도 같은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친 그때, 최민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떠오른 깨달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 아니고, 전신을 사로잡은 피로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흔들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드드득…….
서서히 잠잠해졌던 웅덩이에 또 다른 파문이 일고, 미처 녹지 않은 눈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설산 전체가 몸을 떨자 곳곳에서 겁에 질린 예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쩌적, 구구구구구궁!
최민우와 김화종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지면. 실처럼 이어진 대지의 균열은 등 뒤의 어둠과 연결되어 있었다.
콰드득. 쩌저저적.
크레바스(Crevasse).
도무지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벌어진 틈새로 흘러나온 어둠. 아니, 강대한 마력이 설산을 뒤흔들고 시공을 찢었다.
쏴아아아악!
그리고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갈라진 공간 너머,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건물들을. 자신들이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세상을.
“……몬스터 웨이브(Monster Wave).”
맞닿아 있으나 이어져서는 안 될 두 세상이 연결되었다. 그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포효가 온 사방을 울렸다.
– 그아아아아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심연(深淵) 앞에서, 김화종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젊은 주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벅.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마력에 의해 검게 물든 그것은 더 이상 새하얗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 * *
“팀장님. 한잔하시죠?”
넉살 좋게 소주병을 들고 다가오는 팀원의 모습에, 팀장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싫어, 새꺄.”
말과는 달리 술잔은 은근슬쩍 들어 올린 상태다. 다 안다는 듯 씩 웃은 팀원이 비어 있는 술잔을 채웠다.
꼴꼴꼴. 잔에 꽉 채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팀장은 광어 회를 초장에 푹 찍어 삼켰다. 쫄깃한 식감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시바, 그래도 맛은 있네.”
“그렇죠? 여기 헌터 커뮤니티에서 유명하다니까요.”
“그래?”
“네. 검색하면 후기도 많이 올라와요. 레이드 끝내고 한잔 걸치면 최고라고.”
“그 인간들이야 레이드 끝내고 마정석도 실컷 주웠으니까 술맛이 좋겠지. 나처럼 공친 새끼는 없을 거 아냐.”
“……아이고. 팀장님 또 이러신다.”
팀장은 입맛을 다셨다. 만약 그가 길드에 소속된 입장이었다면 레이드를 공치건 빠따를 치건 별 상관없었겠지만, 프리랜서 헌터 팀을 이끄는 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서라도 지금 주위에서 웃고 떠드는 녀석들의 일당을 챙겨 줘야 하는 것이다.
물론 넉살 좋게 다가온 이놈도 포함해서.
“팀장님. 화나신 거 아니죠?”
“됐어, 인마. 술이나 한잔 더 줘 봐.”
“옙.”
경례를 척 붙이고 열심히 술을 따르는 팀원의 모습에, 피식 웃은 팀장이 난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레이드는 무산되었지만, 얼마 전 내린 눈으로 새하얗게 물든 전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역시 평창이 풍경은 좋아, 풍경은.’
하긴, 이러니까 주위에 스키장을 잔뜩 지었겠지.
내심 중얼거린 팀장은 연신 술잔을 비우며 주위 경관을 감상했다. 오늘도 스키장을 찾은 수많은 인파와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곤돌라는 저 인간들이 얼마나 생각 머리가 없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야, 웃기지 않냐?”
맹렬하게 회를 집어 먹던 팀원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산 위에는 떡하니 게이트가 있고, 마력이 7퍼센트나 증가했는데도 저 지랄을 하고 있다는 게.”
심지어 내려와서 확인해 보니 저 아래 부산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단다.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긴, 뭐 나 어릴 때 코로나 터졌을 때도 스키장 가던 병신들이 있었지.”
“메로나요?”
“……됐다. 그냥 마저 처먹어.”
한숨을 푹 내쉰 팀장은 다시 술잔을 털었다.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을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던 그때였다.
“어, 어어! 어어어어!”
“뭐야.”
“……쟨 또 왜 저래?”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외침에, 팀장은 물론이고 주위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쏠렸다. 아까부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20대 여자 헌터가 스마트폰을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와, 대박! 미쳤다! 미쳤어요!”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그런 것 같긴 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 제가 말했었죠. 위에 마스크 쓴 존잘남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팀장은 아까 마주쳤던 일단의 헌터들, 그중에서도 맨 뒤에 있던 한 청년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랬지. 그 인간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 하루 레이드 공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와, 진짜 대단하다. 김소혜. 눈썰미 미쳐 버린 건가? 어떻게 그걸 알아보지?”
“듣다가 미쳐 버릴 것 같으니까 제발 무슨 소린지 좀 얘기해 줄래?”
“이거 보세요, 이거!”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스마트폰에 눈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화면에 뜬 얼굴을 확인한 팀장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뭐야, 이거 진짜야? 닮은 것 같긴 한데…….”
“맞다니까요! 팀장님 저 못 믿으세요?”
“응.”
“아, 씨. 이번에는 확실한 거니까 믿으세요! 제가 아이돌 덕질만 삼십 년을 하면서 길러 온 눈썰미가 있는데!”
“너 스물다섯 살이잖아. 아버지께서도 덕질 하신 거니?”
“아무튼 맞아요! 제 말이 틀리면 오늘 일당 안 주셔도 돼요!”
자본주의의 노예가 일당을 걸다니. 팀장은 그제야 믿을 마음이 생겼다. 더불어 호기심도 함께.
‘만약 이게 사실이면…… 이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이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지?’
스마트폰에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얼굴과 함께 짤막한 기사가 떠 있었다.
[평화 길드 최민우 팀장. “긴급 구조팀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거물. 그것도 엄청난 거물이다.
비록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침착한 눈빛과 특유의 분위기가 닮은 것도 같았다.
‘이게 사실이라고 치면, 다른 헌터들도 전부 평화 길드 소속이라는 건데.’
최근 들어 워낙 유명해진 인물이라 팀장도 최민우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 봤다. 하지만 그중 절반만 사실이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길드원들을 이끌고 평창에 있는 B급 게이트 방문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잠깐. 그럼 아까 내려오는 길에 봤던 그 아저씨도?’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었다.
구구구구궁!
거대한 진동이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찰나 모든 소음이 멎고 사람들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빨리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팀장이었다.
진동이 울리기 직전, 그의 시선은 이미 한곳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곳은…….’
기대를 안고 올라갔다가 허망하게 내려와야 했던 장소. 바로 [예티의 겨울 산맥]이라 불리는 B급 게이트.
그리고 다음 순간, 팀장의 부릅뜬 눈동자에 비친 것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산의 일부와 그 위에 내려앉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처참히 무너지는 곤돌라와 건물의 잔해 속에서, 정신을 뒤흔드는 끔찍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 그아아아아아!
몬스터 웨이브. 그리고 게이트에 남아 있던 사람들.
숨 막히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팀장은, 간신히 쥐어짜 낸 음성으로 외쳤다.
“신고! 당장 신고해!”
겁먹은 질문이 돌아왔다.
“어, 어디로요?”
“헌터 협회, 평화 길드, 진태경…… 어디든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