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76
#775화
간혹 가다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지랄을 한다, 지랄을.”
그러나 내 신랄한 어조에도 미카엘 실베르트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놈은 오히려 환희의 여운이 남아 있는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혼자 뮤지컬 연습하면서?”
“뮤지컬?”
잠시 생각하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로군. 오늘 이 자리도 결국 한 편의 뮤지컬이지. 감독, 연출, 주연까지 모두 한 사람이 맡은.”
“우리 어머니가 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는데, 안 가리고 처먹으면 꼭 탈이 난다더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네. 탈 날 일도 없고, 흥행도 보장된 무대니까.”
“조금 전에 친 그 대사는 많이 구리던데. 과연 흥행이 될까?”
“비록 본무대 전의 리허설이었지만, 그 의견은 참고하도록 하지.”
여유로운 태도와 입가에 맺힌 희미한 웃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까워지는 놈의 얼굴에, 나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숨을 한 번 내쉬고 뱉을 때마다 커다란 바늘 하나가 배 속을 헤집는 듯한 기분이다.
이건 [망가진 신체]의 영향일까, 아니면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저 미친놈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그 친구는, 함께 왔나?”
“직접 알아보든지.”
“그것도 나쁘지 않군.”
내 어깨 너머로 굳게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네. 잘 데려왔어.”
평범한 민간인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스아아아.
어떠한 소리도, 형태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느꼈다.
원하는 목표를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주인의 몸 안으로 갈무리되는 놈의 기파(氣波)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숙련된 솜씨였고, 헌터보다는 무림의 초절정 고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지금껏 만난 일반적인 헌터의 궤를 벗어난 자.
동시에 나조차도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놈의 진정한 실력을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여서는 안 된다.
놈과 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리깔리던 찰나, 불쑥 입을 열었다.
“함께 온 거야.”
“음?”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함께 온 거라고.”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장본인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다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관절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나.”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지. 당신 같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아닐세. 중요한 건 자네와 그 친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 뿐이야. 만약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순간, 귓가로 전해지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자네의 의도지.”
“의도?”
“그래. 오늘 이곳에 온 의도.”
이미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 의심하는 눈빛에, 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그 전에 먼저 답을 들어야 하는 사람은 나지만, 좋아. 질문을 허락하겠네.”
“그러는 당신의 의도는 뭐지?”
“뭐?”
“지금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만행을 벌인 의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이 세상 전체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것.”
저벅.
불과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던 거리가 좁혀진다.
코끝이 닿을 것처럼 바짝 맞붙었고, 놈의 미세한 표정, 작은 솜털과 내뱉는 숨결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간.
지금껏 놈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분명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피와 살, 그리고 뼈로 이루어진 인간.
그런데 어째서.
“왜 그런 짓거리를 벌인 거냐. 도대체 뭘 위해서?”
미카엘 실베르트와 처음으로 대면한 그 순간부터, 놈을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분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놈에 관한 실마리를 좇으면 좇을수록, 그에 비례하여 의문도 깊어졌다.
“1994년 3월 18일 파리 10구 출생.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 도망쳤고, 함께 살던 알코올 중독자 홀어머니는 2012년 사망.”
지금껏 알아낸 한 사람의 인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나는 미카엘 실베르트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지금 나는 걷는 동시에 누군가의 과거를 되짚고 있다.
세계 문화유산이 되어 버린 제1 국회의사당을 가로지르며, 그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 걸었다.
험난했던 가정 환경에 비해 예의 바르고 모범생이었던 어린 시절.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뒤늦게 시작된 탈선과,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몇 번의 전과(前科).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사건.
“대격변이 시작된 2020년,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각성.”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벽면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무수한 시체 더미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짧은 한 줄의 글귀와 함께.
[2020. 12. 25. 파리 대전투]대격변을 통틀어서도 열 손가락에 꼽힐 만큼 치열했던 전투라고 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종소리 대신 비명과 굉음이 울려 퍼졌고,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천 명의 헌터들은 수십 배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펼쳤더랬다.
자그마치 일주일 동안이나.
어떤 지원도 없이. 말 그대로 처절하게.
그리고 일곱 번의 밤낮이 지나고 2020년의 마지막 해마저 완전히 기울었을 때.
다른 전투를 끝내고 뒤늦게 도착한 지원군이 발견한 것은 무수한 시체와 피 웅덩이 사이에 서 있던 한 청년이었다.
“바로 당신이지.”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폐허에서 홀로 살아남은 그림 속 청년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미카엘 실베르트.”
나직한 부름에,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선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해 주지. 제법 애쓴 모양이야. 각성 전의 기록들은 이미 말소되어 찾기 힘들었을 텐데.”
“정확히는 당신이 말소시킨 거겠지. 전과자 출신이라는 게 알려져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부정하지는 않겠네. 저 기록이 언젠가 내 앞길을 가로막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때마침 모두가 혼란하던 시기라 손 쓰기도 쉬웠지.”
담담하게 대꾸한 미카엘 실베르트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고작 그게 전부라면 좀 실망이군.”
“뭐?”
“내가 태어난 파리 10구는 똥통 같은 곳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싸움이 일어났고, 밤마다 총성이 울려 퍼졌지. 학교를 오갈 때마다 지나던 골목길 담벼락은 항상 검붉은 색이었어. 하지만 누구도 담벼락에 묻은 피를 닦지 않았네. 어차피 그다음 날이면 또 붉어질 테니까.”
“…….”
“내 고향은 그런 곳이었네. 낮에는 각양각색의 인종들로 이루어진 갱단이 거리를 활보하고, 밤에는 유흥가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났지. 아까 내 어머니더러 알코올 중독자라고 했나?”
미카엘 실베르트는 덤덤하게 반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녀가 마약 중독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군. 내가 수업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낡아빠진 소파 위에 누워 흐느적거리고 있었지. 처음 보는 낯선 남자들과 함께.”
누구에게나 아픈 과거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일을 회상하는 미카엘 실베르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씨만 뿌리고 도망친 아버지라는 남자와 법적으로만 어머니일 뿐인 여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 폭행과 절도로 얼룩진 삶을 이어 가던 아이. 그것이 바로 나일세. 하지만 동시에 파리를 두 번이나 구원한 영웅이자 위기에 맞닥트린 사람들을 위해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인 선구자이기도 하지.”
“……!”
“오래전에는 이런 내 과거가 수치스러웠네. 그러나 이제는 아니야. 빈민가의 아이에서 세계의 영웅까지. 훌륭한 마케팅 아닌가?”
나는 잠시 말을 잊은 채 미카엘 실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저렇게 마모될 수 있을까.
그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을 인생의 시계는, 60년이 아니라 600년을 작동한 것처럼 닳아 있었다.
그의 마음과 함께.
그리고 그런 내 시선에, 미카엘 실베르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마치 괴물을 마주한 것 같은 눈빛이군. 이제 자네도 내가 두려워졌나?”
“자네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과 존경심을 품더군. 그런 눈빛을 보인 것은 자네가 처음이 아닐세.”
“그중 몇몇은 이미 죽고 없겠지.”
“스스로 숙이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꺾어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어리석었어.”
저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적들이 아니라, 바로 나를 향한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꺾어 버리기 전에 고개를 숙이라는 권고. 일이 틀어질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저 치밀함.
가만히 미카엘 실베르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나는, 잠시 내려앉았던 짧은 침묵을 깨트렸다.
“반은 틀렸고, 반은 정답이야.”
“무슨 뜻인지?”
“지금 당신을 괴물로 보는 건 맞아. 하지만 이건 두려움이 아니라 동정이다. 더불어 환멸이라고 해도 좋겠지.”
“……!”
“그냥 묻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지. 이 미친놈한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나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실망이네. 내가 고작 전과 몇 개로 당신 발목을 붙들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뭐?”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미카엘 실베르트를 뒤로하고, 나는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후웅. 벌컥.
손끝에서 뻗어 나간 기운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부드럽게 밀어젖혔다.
동시에 활짝 열린 두 문 너머로 계단을 통해 서서히 가까워지는 인기척들.
나는 굳은 얼굴을 한 미카엘 실베르트를 향해 고갯짓했다.
“바쁜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하려던 발족식이나 시작해. 이 좆 같은 새끼야.”
“……!”
“등기 이전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집주인 행세하고 지랄이야, 시벌 놈이.”
차갑게 얼어붙은 미카엘 실베르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직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이 주사위의 눈이 1일지 6일지는 곧 결정될 것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느냐도 함께.
그리고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인간이 아닌 괴물의 손에는 더더욱.
저벅. 저벅. 저벅.
마침내 고요해진 회의장 내부로 진입한 수백 명의 발걸음.
바야흐로 역사에 기록될, 신(新) 세계 헌터 연맹의 첫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