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 hua's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패군, 제갈고천이 술병을 기울였다.
별빛을 담아 반짝이는 술은 폭포수와 같이 아름다운 굴곡을 그렸다.
쪼르르―
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술잔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투박한 나무 그릇에 술이 가득 차오르며, 월광과 밤하늘이 담겼다.
겨우 한 손에 잡히는 술잔에 담겨 있는 세상을 삼키던 제갈고천은 바로 앞에서 술을 홀짝이는 천휘를 응시했다.
이제 이립은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믿기 힘들군.’
제갈고천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애써 태연하게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있지만 속은 경악에 차 있었다.
이렇게나 어린 청년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진법을 파괴했다.
그것이 어디 그냥 진법이랴.
소천지생진법이었다.
순리를 역행하고, 비틀어서 천무지경의 고수라도 생문을 찾으려면 고생하기 마련인 절고의 진법이었다.
그것을 방증하듯 자신의 벗들 또한 생문을 찾는 것이 전부였거늘.
앞의 청년은 달랐다.
말 그대로 아예 부수고, 박살 냈다.
‘괴물이로군.’
속에서 경악이 절로 떠올랐다.
제갈고천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괴물 혹은 천재라고 불리어 온 자였다.
무의 극이라고 생각한 천무지경을 뛰어넘어 무신지경이라는 경지를 개척한 팔무신 중 한 명인 그를 괴물이라고 안 부르는 것도 이상하리라.
하지만 그런 그조차 지금 눈앞에 있는 천휘는 규격 외의 존재로 보였다.
얼핏 보아도 천무지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것은 물론이고, 지금 무신지경의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보이니.
어찌 경악을 안 하리.
‘나 역시 저 나이대에는 천무지경조차 아직 멀게 느껴지는 경지였건만.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대체 이 아해는…….’
그렇게 한참이나 천휘를 훑어보던 그가 입에서 술잔을 떼며, 물었다.
“자네는 화산파의 도사인가?”
“그렇죠. 여기 도복도 입었는데요.”
천휘가 슬쩍 소매를 들었다.
적과 흑으로 이루어진 소매에 선명하게 그려진 매화가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화산파의 도복이었다.
하지만 제갈고천은 그 소매를 보고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옷이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내가 묻는 것은 본질이라네.”
“무슨 본질이요?”
“가령 같은 검을 지녔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은가. 어떤 이는 협을 위해 검을 다룰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검을 겨누기도 하지.”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말하는 의도야, 이미 알았다.
하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되물었을 뿐이건만, 제갈고천은 그 대답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은 복잡하지만, 즉 내가 화산파의 도(道)를 제대로 걷는 도사가 맞냐, 이 말이네요.”
“그렇지.”
제갈고천은 가느다란 실눈 속 눈동자를 움직여, 천휘의 입을 꿰뚫을 듯 쳐다봤다.
천휘는 생각에 잠겼다.
‘화산파의 도를 걷냐라…….’
마땅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무공과 강자뿐이었다.
그 외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던가.
그냥 화산파의 도사가 되었기에 도가의 무공을 익혔을 뿐.
딱히 우화등선이라거나, 그런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생각을 마친 천휘의 입이 열렸다.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도가의 길을 걸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무의 끝이지.’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천휘의 눈이 아득해졌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무학들.
그 끝에 도달해 삼라만상을 얻어 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때.
쿵.
제갈고천이 앉아 있는 곳 근처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내공을 발출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감정이 주변의 공기를 완전히 압도한 것이었다.
‘오호, 의념(疑念)까지 다루네.’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제갈고천이 한 짓이 무엇인지 천휘는 아주 잘 알았다.
저것은 내공이 아니었다.
무신에 도전해 천외천을 엿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자연스럽게 가지는 본연의 위압감이었다.
그 상태로 제갈고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러면 자네의 본질은 무엇인가?”
은은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짓눌려 전신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천휘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이 압박감과 강렬함.
그것이 그에게 흥분을 선사했다.
“저는 저죠.”
제갈고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말 그대로인데요.”
천휘는 ‘뭘 또 묻는 것이냐’는 표정을 내비치며 말을 이어 갔다.
“도사인지 아닌지가 뭐 중요한가요? 도사든 아니든 나는 나이거늘.”
“……!”
제갈고천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 격렬한 감정의 변화에 주변 공기가 크게 흔들리며, 일그러져 갔다.
심오한 말이었다.
그리고 직설적인 말이었다.
배경 따위를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란 존재만을 보라는 것이었으니.
꼭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천휘가 담겼다.
그의 모습이 패기로 똘똘 뭉쳐, 세상에 홀로 맞서 싸웠던 과거의 자신과 겹쳐져 보였다.
‘나도 저러던 때가 있었지.’
아지랑이와도 같은 상념 속에서 눈을 감은 제갈고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만약 자네와 같은 인물이 나온다면 화산이 아니라 무당이나 소림…… 그도 아니면 곤륜일 줄 알았건만, 이것 참 세상일은 도통 예측하기가 힘들군.”
무당과 곤륜이라면 이해가 갔다.
자신과 같이 팔무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곳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소림은 달랐다.
현 팔무신 중 아무도 없다지만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란 말도 있는 대문파이지 않은가.
그에 반해 화산은…….
‘신비한 일이구나.’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천휘를 훑기를 잠시, 그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뭐,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하겠네.”
“그거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언제 이야기를 끊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런가?”
제갈고천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굽실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앞의 청년은 달랐다.
고개를 빳빳이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마치 자신과 동등한 위치인 듯, 그를 바라봤다.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의 눈꺼풀이 살짝 들렸다.
감춰져 있던 사백안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의 어둠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그럼 이제 얼굴도 봤으니 용건은 끝났는가?”
“에이, 그건 아니죠.”
천휘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이걸 느끼고도, 어떻게 그냥 가겠어요.”
“허허, 그런가?”
말과 함께 둘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 순간.
쩌저적―
둘 사이의 공간이 갈라져 갔다.
투기와 투기의 충돌.
공기는 더 버티지 못하고 처참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봤다면 경악했으리라.
지금 둘이 있는 초가가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강해.’
천휘의 입술이 천천히 비틀렸다.
투기 속 드러난 내력이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고, 압박해 왔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압도적인 내공량에 천휘는 전신이 뜨거워졌다.
‘이런 감정 오랜만인걸.’
당장에 검을 뽑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빈틈을 보이면 위험해.’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목숨과 직결되었다.
그만큼 상대는 강했다.
아마 전생의 그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어도 당시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였을 정도로.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건 제갈고천도 마찬가지였다.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가 이어져 가던 어느 순간.
스윽―
제갈고천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남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겠군.”
그는 말과 함께 투기를 거두었다.
놀라운 속도였다.
그가 한 호흡도 안 되는 시간에 투기를 거두자, 마찬가지로 바라보던 천휘 또한 투기를 거뒀다.
그리고 그 역시 남쪽을 보며, 말했다.
“쩝, 오랜만에 손 좀 푸나 했는데.”
“자업자득이 아니겠나?”
“조금 신중할 걸 그랬네요.”
천휘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중에 찾아오죠.”
그 말과 함께 천휘가 사라졌다.
제갈고천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 천휘가 사라진 방향을 보더니, 작게 입을 뗐다.
“아마 그건 힘들 것일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이 제대로 옷도 입지 못한 채로 달려와, 제갈고천의 앞에 섰다.
“괘, 괜찮으십니까?”
평소에는 진중하기 그지없는 제갈신이었건만, 지금 그는 당황한 티가 역력한 상태였다.
“허허, 놀라게 했구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제갈고천의 상태에 마음을 추스른 제갈신이 농담을 던졌다.
근 십 년 동안 못 본 것치고 부자지간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 보였다.
이내 제갈신이 옷매무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누가 한 것입니까?”
그의 눈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이곳은 금지였다.
제갈세가 내에서도 허락받지 않은 이상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
그런데 누군가 침입했다.
아니,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소천지생진법을 완전히 박살 내 놨다.
“내가 했다.”
“네?”
제갈고천의 대답에 제갈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소천지생진법을 설치한 이후 제갈고천은 근 사십 년을 그 안에서 생활해 왔다.
그런데 직접 그 진을 박살을 냈다는 것은.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흥분한 제갈신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다시 강호에 나오실 겁니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단호한 답에 제갈신의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그러다 그는 순간 흠칫했다.
“아직이라는 말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제갈신을 본 제갈고천이 뒷짐을 지며, 고갤 들었다.
“그래, 아직은…….”
* * *
천휘는 암향표를 극성으로 펼쳤다.
은밀하게 움직인 천휘는 지금 사방을 포위한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지나쳐, 무사히 별채의 지붕에 도착했다.
휘이이―
선선한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지만, 달아오른 몸은 식지 않았다.
어찌 식으랴.
그렇게 강렬한 위압감과 힘을 보았거늘.
오히려 떠올릴수록 점점 더 들끓을 것만 같았다.
“패군이란 말이지?”
천휘의 시선이 북쪽 끝을 향했다.
제갈고천이 있던 텃밭과 초가가 보였다.
깔끔한 전각들이 무리 지어 있는 제갈세가의 내원에 저런 초가와 텃밭이 나타나니,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그때 그곳에 빛이 비쳤다.
작고, 희미한 불빛은 곧 꺼질 것처럼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지만.
그 안에 있는 제갈고천의 존재감은 멀리 있음에도 이곳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어느새 주먹을 쥔 손에는 흥건한 땀이 맺혀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등도 살짝 축축했다.
“상당히 재미있어졌어.”
이런 긴장이라니, 대체 얼마 만인가.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그 세월은 수십 년을 족히 넘어야 하리라.
천휘는 숨을 깊게 삼키고, 뱉었다.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가 불어온 바람에 빠르게 사라져 갔다.
“팔무신이라…….”
중얼거리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흥분이 다시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저런 고수가 일곱이나 더 있다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