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106
105회
***
윤설은 엄습하는 냉기에 온몸을 떨었다.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 미간은 일그러진 채였고 온 몸을 휘감는 고통 때문인지 눈은 떠지지 않았다.
이 순간은 그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속히 몸뚱이를 짓누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쯤 지난 것일까………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윤설의 살갗으로 온기가 차분히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흔들어 깨운 건 빛이 아닌 후각으로 스며든 알싸한 탕약 냄새였다.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동시에 윤설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쨍그랑-
문지방을 넘던 이가 흠칫 놀라 쟁반에 들고 온 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탕약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동시에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아씨가 깨어났다! 아씨가 깨어나셨어요!”
윤설의 흐릿한 시야로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이 하나 둘씩 담기기 시작했다.
미색의 천장에서 형광등을 발견하지 못한 이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키 작은 3단 장롱과 경대 그리고 촛대가 제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윤설아! 윤설아!”
상기된 음성과 다급한 발걸음들이 문지방을 넘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몹시 그리워했던 얼굴들이 눈동자로 스며드는 찰나, 윤설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 눈이 촉촉해진 아비가 딸의 눈물을 닦아주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다. 이제 됐구나. 설아….네가 돌아올 것을 믿었느니라.”
“윤설아, 어디 보자. 괜찮은 것이니? 세상에….어찌….이런 일이….널 잃는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아느냐.”
어미의 눈물 속엔 그간의 애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체통을 잊은 상전들의 눈물에 뒤꼍에 서 있던 아랫것들 역시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고명딸의 회복으로 침울함에 잠겨 있던 집안이 생기를 품기 시작했다.
세 오라비들은 식솔들과 함께 어린 누이를 문안했으며 문중 어른들도 찾아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초상집 같았던 분위기가 잔칫집으로 바뀐 셈이었다.
날마다 축하의 인사와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하지만 기쁨의 근원인 존재, 윤설만은 웃을 수 없었다.
낮 동안 담담했던 그녀는 일찌감치 청한 잠자리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녀가 병풍 쪽을 향해 돌아눕자 두 눈에 고여 있던 이슬이 도르르 떨어지더니 베갯잇을 적셨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다. 허나….내 님을….내 벗을 다시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을 안겨줄 뿐이로구나. 어이할꼬…. 그리움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준이 님….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은애하는 이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윤설이었다.
그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연모의 감정은 마구 뒤섞여 여린 마음을 괴롭혔다.
윤설의 밤은 준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몸서리치다 지쳐 잠드는 일의 반복이었다.
깨어났을 때 비교적 건강했던 모습이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대감,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우리 윤설이 깨어났을 때 분명 아무 이상이 없다 하질 않았습니까? 헌데 마음의 통증이라니…. 의원의 말이 참이란 말입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인으로부터 근심이 터져 나오자 윤설의 아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하다는 의원을 수소문해 겨우 알아낸 원인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딸이었다.
몸이라면 몰라도 마음만은 안도로 편안해야 정상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죽은 듯이 잠들었던 아이가 깨어났으니….이전과 완전히 동일하진 못할 터….아무래도 마음이 허한 게 아닌가 싶소. 주상 전하께서도 계비를 맞이하셨고 이제 더 이상 금혼령이 내려질 일은 없으니 이제, 그 일을 서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윤설의 어미가 남편을 향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는 부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부인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오. 허나 우리의 욕심이 과해 아이를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 내내 돌아보았다오. 이제 내려놓으십시다. 그게 우리 설이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소?”
별당에 든 몸종이 윤설을 향해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아씨, 어제도 또 잠을 못 이루신 것입니까? 에휴….어쩜 좋아. 두 눈이 부은 건 두말할 것도 없고….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요. 두 분 마님께서 어찌나 염려하시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이게요? 아랫것들도 죄다 얼굴이 죽상입니다.”
“…..면목이….없구나.”
“아씨, 제가 뭐 그런 말을 듣고자 한 건 아니고요…아무튼 이 탕약은 꼭 드셔야 해요. 안 드시면 모두 슬퍼할 것입니다.”
개똥이의 간청을 못 이긴 윤설이 탕약을 겨우 들이켰다.
미간을 찡그린 아씨를 향해 그녀가 재빨리 쓴맛 다실 것을 건넸다.
“개똥아, 내가 깨어날 때까지 대체 몇 날이나 흐른 것이니?”
“보름이 지나고 또 보름이 지나갔죠. 휴우….말도 마세요. 그 밤에 초상 치르는 줄 알았는데 의원이 보더니 숨이 붙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체되니까 다들 죽은 셈 쳐야 한다며….앗, 송구해요. 아씨.”
“아니다. 궁금하니 계속 말해다오.”
개똥이가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헌데 대감마님께선 숨이 붙어 있는 한 산목숨이라 하시며 지극정성으로 아씨를 보살피셨죠. 의원을 매일 불러와 침을 놓고 뜸을 뜨고 탕약을 입으로 조금씩 흘려 넣었어요. 휴우…모두가 아씨를 살리려고 어찌나 발을 동동거렸던지….”
아비의 사랑을 다시금 느낀 윤설의 가슴이 먹먹함으로 물들어갔다.
‘아버지 덕분에 살아났거늘…. 지금 내 모습은 심한 불효가 아닌가….’
“그런데요 아씨, 헤헷. 실은 좋은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좋은….소식?”
“예에. 아씨께서도 기뻐하실 만한 소식이 분명합니다.”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개똥이 신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대단한 가문과 혼담이 오가는 줄 압니다.”
“뭐, 뭐라고? 호…혼담?”
개똥이 배시시 웃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진 마세요. 이 또한 아씨를 위한 두 분 마님의 마음이라니까요? 이제 혼인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씨가 매일 초췌하시니 일가를 이루어 편안하길 바라시는 것이죠.”
“그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구나.”
뜻밖의 단호함에 개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씨, 어찌 그러셔요?”
“그만 눕고 싶다.”
개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나자 자리에 누운 윤설이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혼인이라니….아니 된다. 내겐…정인이 계시거늘….시공을 초월한 은애함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거늘….준이 님…. 너무도 그립습니다. 저는 이제 어찌 해야 할까요?’
하루가 느리게 흐르더니 또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윤설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낯선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고 잠시 머물던 후대를 날마다 그리워했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준을 떠올렸고 별무리가 반짝이는 밤하늘에선 함께 천문대에 올랐던 그 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의 입맞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제 입술에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정인을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재회를 꿈꾸는 건 불가능했다.
윤설은 둘 사이를 가른 운명에 좌절하는 한편, 원망하기도 했다.
며칠 후, 낯선 이들이 대문을 부지런히 넘나들더니 사랑채가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런 풍경은 비단 한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집안 전체가 마치 설렘을 품은 듯이 들떠 있었고 아랫것들 역시 즐거운 얼굴로 움직이고 있었다.
모처럼 별당의 뜰을 거닐고 있던 윤설에게도 밖의 분위기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침 부엌을 다녀오는 개똥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씨, 드디어 혼례일이 잡힐 모양입니다. 상대 도령 댁에서 사람들을 보내셨지 뭡니까?”
“뭐, 뭐라고?”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나는 순간,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제 어미를 찾았다.
“오, 어서 오너라. 설아, 오늘은 기운이 좀 나는 것이냐?”
어미가 반색하자 윤설이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다.
“어머니, 제 혼담이 오간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오냐. 안 그래도 오늘쯤 네게 이야기해줄 참이었단다.”
“어찌….제게 먼저 묻지 않으셨습니까?”
후대의 사고방식을 떠올린 윤설이 멈칫하는 순간, 어미가 당황스런 얼굴로 딸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많이 서운했느냐? 그래, 뜻밖이라 당황할 만도 하겠구나. 이 어미 역시 그랬으니 말이다. 허나, 설아… 그리 여기진 말거라. 대감과 난 여전히 널 아끼기에 널 떼어놓는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지경이구나. 더군다나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너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지당한 것이겠지. 꽤나 고심했단다. 이젠 어여쁘게 장성했으니 너의 앞날을 펼쳐나가야 하지 않겠니? 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기에 이 사달이 난 건 아닌지….죄책감도 들었단다. 설아, 어미와 아비는 오직 네 행복만을 원해 어렵게 결심했으나 실은 대감께서 내색하지 않으신 부분도 있단다.”
윤설이 동그래진 눈으로 어미를 응시했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대감께서 등청하실 때마다 수군대는 소리들이 있다더구나. 하나뿐인 여식이 혼인할 연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문불출을 하니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란다. 평소 대감을 시기하던 이들이 면전에서 트집을 잡았다고 하더구나. 휴우…. 하지만 그들을 원망하여 무엇 하겠느냐? 아님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헌데 설아,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하늘이 도우셨지 무엇이니?”
“예에? 그 어인 말씀이신지….”
“대감과 친분이 두터우신 여흥 민가에서 먼저 혼담을 주셨단다. 네가 누워있는 동안 금혼령이 풀렸기에 좋은 혼처가 사라질 만도 했거늘….”
윤설이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안채로 건너온 건 어미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기 위함이었지만 그녀는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비의 수모는 가슴 아팠고 내색치 않은 부성애에 이젠 보답할 차례였다.
여흥 민가는 제 가문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명문가였다.
성사된다면 대등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결합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윤설이 보료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고명딸을 끔찍이 여기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고 그들의 뜻에 따르는 건 의무이기 이전에 스스로 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엔 준이 살아 있었다.
‘정인을 품은 채 어찌 다른 낭군의 부인이 될 수 있을까? 참으로 가슴이 아프구나. 준이 님….그립습니다. 해인아…. 난 이제 어찌 하면 좋단 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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