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19)
2-42. 도망자(6)
#42
자이파가 언월도를 내리찍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뒤틀었다.
콰직!
수직으로 떨어진 창날이 발치를 내리찍었다.
“씨발.”
언월도의 머리 부분은 완전히 땅 속으로 사라진 채였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난 지금쯤 로/난이 되어 버렸을 터였다.
자이파가 흥미롭다는 듯 꼬리를 휘적였다.
“운이 좋군. 이걸 피하다니.”
“···오랜만이네, 영감님.”
눈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끝까지 젖혀야 했다.
나름 반가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납고 초췌해진 호랑이의 얼굴이 갑옷 위에 달려 있었다.
이 영감님도 내가 모르는 새 고생을 좀 한 것 같았다.
자이파가 갸웃거렸다.
“나를 아나?”
“그럼. 제국의 검성이신 자이파 터르겅 님이잖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검성이라니,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엥? 댁이 아니면 누가 검성이야?”
“곧 죽을 놈에게 그걸 답해줄 이유는 없다. 반역자 슐리펜은 안에 있나?”
공무를 집행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문득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꾸로 뒤집힌 장검 한 자루는 제국군 특수전단의 상징이었다.
암살이나 첩보를 전문으로 하는.
상황을 파악한 내가 입술을 뒤틀었다.
‘젠장, 기어코 배신했구만.’
과거 바르카의 은신처에서 본 편지가 뇌리를 스쳤다.
자이파는 원래대로라면 제국을 등졌을 인물이었다.
이해는 갔다.
제국에게 처자식을 잃고, 반란조차 실패하고, 수인 동포들을 구하는 조건으로 황제 아저씨랑 노예계약이나 다름 없는 각서를 썼던 것이 그였으니까.
원래 세상에서는 어찌어찌 감화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이 세계의 나는 자이파와 면식이 없었다.
바르카의 계획이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요직에 등용됐고, 지금은 그에게 이용당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나는 양손에 주머니를 꽂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도 그걸 대답해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렇군.”
자이파가 주억거렸다.
내 논리정연한 모습에 반해서 물러나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창대를 움켜쥔 그가 말을 이었다.
“제국군을 살해한 죄로 너를 처형한다.”
순식간에 뽑혀 나온 언월도가 다시금 휘둘러졌다.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참격은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하여튼 칼잡이 새끼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대화를 혓바닥이 아닌 칼로 하는 건 줄 안다.
원래 세상에서도 그랬지만 참 직설적인 노친네였다.
무식하게 큰 창날이 내 몸을 찢으려던 차였다.
카아아아앙!
요격하듯 쏘아진 성검이 언월도를 강타했다.
“젠장, 힘만 더럽게 세서는. 웨어타이거가 인간한테 이런 공격을 해도 되는 거야?”
“허.”
나는 혀를 내두르며 투덜거렸다.
자이파가 실소했다.
언월도는 내 검과 맞물린 채 공중에서 비적거리고 있었다.
묵직하기는 했지만 대머리 왕의 펀치나 아카샤의 충격파에 비하면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그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슐리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이파···!”
“로, 로난? 누가 온 거야? 방금 그 소리는?”
겁에 질린 누나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미세하게 바람 소리가 번져오는 걸로 봐서 슐리펜이 뭔가 기술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이파를 응시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오지 마. 슐리펜. 쓸데없는 짓도 말고.”
“하지만.”
“너는 누나를 지켜. 이 영감님은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알았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예상외로 고분고분하게 들어 주었다.
자이파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좋아. 대답하기 싫다면 다른 걸 물어봐야겠군.”
원래 세상의 자이파와 동일인물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것 같았다.
바닥에 침을 뱉은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렇게 멋지던 호랑이가 어쩌다 동생 똥이나 닦아 주는 개새끼가 됐어?”
“···뭐?”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걸 보면 귓구멍도 막히셨나 보군. 일단 우리 집 현관에서 더러운 발부터 치우시지.”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누나가 밀짚을 짜서 만든 발매트가 거대하고 복실복실한 발바닥 아래 짓눌려 있었다.
맞물려 있던 검이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참격을 흩뿌렸다.
보통 사람들은 인지조차 할 수 없는 검로 수십 가닥이 허공을 수놓았다.
“······!!!”
자이파의 털이 곤두섰다.
황급히 언월도를 치켜든 그가 응수에 나섰다.
날붙이가 맞닿을 때마다 불씨가 튀었다.
자이파는 거의 모든 공격을 받아쳤지만 횟수로 찍어 누르는 검격은 웨어타이거의 거구조차 뒤로 밀려나게 했다.
열 번에 한 번 꼴로 막아내지 못한 참격이 그의 몸 위로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카아아앙!
크게 회전하며 날아든 검격이 언월도를 강타했다.
“크음!”
자이파가 이를 악물었다.
노도처럼 검을 퍼붓던 내가 마침내 칼질을 멈췄다.
우리는 어느새 오두막과 스무 걸음 이상 떨어진 곳까지 와 있었다.
현관문부터 이어진 자이파의 혈흔이 장미꽃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숨을 고르던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놀랍군. 너 같은 실력자가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던 거냐.”
“평행세계. 여기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이지. 거기서 당신은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야. 내 여자친구···아니, 전 대장군과도 앙금을 풀었고 말이지.”
“요즘 애송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농담인가?”
“농담 아냐. 그나저나 이쪽의 댁은 어째 좀 약해진 것 같네. 실망스러운걸.”
“뭣이?”
“멍청한 갑옷을 챙겨 입는 것부터 짐작은 했다만···그냥 진실을 말해줄 테니까 잘 들으쇼 영감님. 우리가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지금 군인 같지도 않은 군인 몇 놈 죽인 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다행히도 자이파가 개소리 집어치우라며 검격을 날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피를 빼서 그런지 머리가 좀 식은 것 같았다.
‘그 친위대인지 뭔지 하는 놈들처럼 세뇌된 것 같지도 않고.’
솔직히 자이파와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고집불통에, 지성보다는 무력을 숭상하는 원시인이었지만 그래도 본성 자체는 괜찮은 호랑이였다.
애초에 원래 세상에서는 술친구 사이였으니.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내가 입을 뗐다.
“댁은 바르카에게 놀아나고 있는 거야. 그 개자식은 당신을 형제가 아닌 써먹기 편한 도구 정도로만 여기고 있어. 그쪽의 아들인 아라단 터르겅이 그 증거 중 하나지.”
“네놈이 어떻게 그 이름을···!”
자이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동공이 세로로 좁혀지며 어깨 위로 살기가 솟구쳤다.
아들 문제에 예민한 것은 여전해 보였다.
“댁도 알겠지만 바르카는 흑마법을 전공했지. 그 중에서도 특출난 건 강령술이고. 믿기 싫겠지만, 녀석은 가엾은 아라단의 시체를 되살려서 자신의 비수처럼 휘두르고 있어.”
“무슨 근거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일단 내가 온 세상에서는 그랬어. 여기라고 다를 것도 딱히 없는 것 같고. 신뢰도가 높아질 만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어디보자. 댁이 살았던 곳이 아마 북부의···”
나는 자이파의 편지에서 읽었던 정보들을 쭉 읊어 주었다.
과거에 살았던 마을이나 아내의 이름, 송곳니의 밤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날의 감정까지.
처음에는 덤덤했던 자이파의 얼굴이 점점 당혹감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니까···네 말은 바르카가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종교 집단의 주교라는 거냐?”
“정확해. 잘은 모르겠는데, 지금 북부 꼬낙서니가 말이 아니지 않아? 막 기형아도 태어나고. 그거 전부 그 새끼가 한 짓이야.”
“북부를 망가뜨린 것은 제이거라는 얼간이였다.”
“답답하네. 그러니까 그 제이거를 조종한게 댁의 동생이었다고. 이렇게 말해도 못 믿겠어?”
“······이제 그만해라.”
자이파가 으르렁거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확실히 의심을 심어 줘야 했다.
나는 자이파의 만류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정 못 믿겠으면 당장 바르카한테 가 봐. 궁전 어딘가에 당신 아들이 있을 테니까. 나 때는 망토 안쪽에 숨기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지···”
“닥쳐라, 애송아! 입을 찢어버리겠다!”
그때였다.
참다 못한 자이파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림자처럼 시커먼 기운이 언월도의 창날을 휘감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자이파의 오러였다.
나는 침착하게 응수에 나섰다.
애초에 말만으로 설득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공간을 절단하며 날아온 일격이 내 검과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카아아아아앙!!
난폭한 충격파가 대기를 찢으며 터져 나왔다.
숲 위로 새떼가 날아올랐다.
오두막의 창문이 일제히 박살났다.
“꺄아악!”
“누나?!”
불현듯 집 안에서 누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깨진 창문 앞에서 머리를 감싼 채 떨고 있는 누나와, 누나를 몸으로 감싸고 있는 슐리펜이 눈에 들어왔다.
파편을 미처 막아내지 못했는지,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릴 양, 괜찮으십니까?”
“저, 저는 괜찮아요. 그쪽이야말로 이마에서 피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슐리펜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자이파에게는 일절 시선을 돌리지 않는 모습에서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슐리펜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머리가 뜨거워졌다.
뒤통수 너머로 자이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한눈을 파는 거냐!”
붉은 눈동자는 이미 분노에 휩싸인 채였다.
하늘 높이 도약한 자이파가 두 손으로 언월도를 휘둘렀다.
나는 응수하는 대신 허리를 뒤로 젖혔다.
시커먼 수평선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같은 방향의 먼 곳에 있던 언덕이 양단됐다.
콰아아아앙!!
작렬하는 굉음에 뒤이어 마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죽어라!”
그때 자이파가 착지했다.
검은 맹호는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오러로 휘감긴 참격이 내 목을 노리고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카아앙!
튕기듯 상체를 들어올린 내가 놈의 검격을 받아쳤다.
“뭣이···!”
“너 때문에 우리 누나 다칠 뻔 했잖아, 이 까맣게 탄 똥고양이 새끼야!”
머리에 열이 확 올랐다.
나는 그대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검신이 붉게 물들며 예기가 솟구쳤다.
힘을 주자 붉은 칼날은 맞닿아 있던 언월도를 썰면서 파고들었다.
“무슨.”
자이파의 눈이 커졌다.
그가 대처하기도 전이었다.
그대로 언월도를 잘라 버린 내 검이 호선을 그렸다.
자이파의 갑옷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촤아악!
검로를 따라 갈라진 갑옷 틈새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커억!”
자이파가 피를 토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강을 잡지 않아서 누나가 다칠 뻔했다.
검을 납도한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력원을 전환하자 심장이 엇박으로 뛰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
황금색 빛무리가 오른팔을 휘감았다.
근밀도가 폭발적으로 높아지며 팔이 무거워졌다.
내 영원한 은사이자 친구인 바렌 교수의 오러였다.
“잠깐···!”
비틀거리던 자이파가 헛숨을 들이켰다.
자신에게 닥칠 재앙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했다.
그는 다급하게 고철이 된 언월도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두 팔을 교차시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역시 웨어타이거는 사기 종족이다.
그냥 팔뚝을 겹쳤을 뿐인데, 흑철로 만든 방패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막으면 이건 니 몸 아니냐?!”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은 없었다.
허리를 회전시키며 반동을 준 내가 자이파의 가드에 주먹을 꽂았다.
뼈 부러지는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가드가 풀린다.
틈새로 파고든 정권이 놈의 명치에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금색 광채를 끌며 날아간 자이파의 몸이 거대한 느티나무에 처박혔다.
“커어억!”
뿌리 깊은 거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자이파의 아가리가 다시금 피를 토했다.
오른팔을 휘감고 있던 빛무리가 눈 녹듯 사그라졌다.
“후우···후우···.”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숨이 찼다.
나는 천천히 자이파에게 다가갔다.
부러진 왼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피 섞인 침이 벌어진 아가리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꼭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머리 좀 식히고 다시 봅시다.”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오랜만에 쓰는 기술이라 그런지 숨이 벅찼다.
보통 사람이 맞았다면 이미 사지가 분해됐겠지만, 원체 튼튼한 사람이니 길어도 이틀이면 정신을 차릴 터였다.
별안간 뒤편에서 슐리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제일검이었던 사내를···!”
“어. 왔냐.”
뒤를 돌아보자 벙쪄 있는 누나와 슐리펜이 보였다.
슐리펜의 이마에는 누나가 붕대 대용으로 감아 준 앞치마가 돌돌 감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쪽에서는 좀 빨리 이어지려나?
큭큭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좋아. 정했다.”
“무엇을 말이냐.”
“앞으로의 행보 말이야. 방금 자이파랑 싸우고 깨달았어.”
자이파는 날벼락처럼 덮쳐온 적이었다.
근원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와 같은 추격자들은 계속 우리를 찾아올 터였다.
나는 두 손으로 누나의 귀를 틀어막았다.
“일단 제국을 한 번 멸망시켜야할 것 같다.”
“······뭐라?”
“웅? 로난 방금 뭐라고 했어?”
슐리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누나가 갸웃거렸다.
사실 필레온 아카데미에서 내 얼굴이 팔린 순간부터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던 것이다.
황궁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더 귀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