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2
31회
제법 단단한 음성에 윤 매니저가 멈칫하고 말았다.
낯선 모습은 준을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제 뜻대로 드라마 선택하는 거요. 이번만 제 선택을 믿어주시면 안될까요? 주제 넘는다는 거 잘 알지만 포기할 수 없어요. 놓친다면…. 인생에서 굉장한 후회로 남을 것 같아서요. 형, 제발…… 부탁드립니다.”
“뭐, 뭐라고?”
윤 매니저는 기가 찬 듯 말을 잇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이토록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언행은 처음이었고 꽤나 강렬했다.
늘 예의바르고 점잖은 이였기에 충격이 컸고 배신감마저 들었지만 거기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힘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인생까지 운운하고 있었다.
윤 매니저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준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형,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만 이해해주세요. 다시는 이런 부탁……드릴 일 없을 겁니다.”
“휴우….. 너 진짜….. 어휴……”
눈썹을 파르르 떨던 윤 매니저가 다시 생수를 벌컥 들이키더니 앙다문 입을 열었다.
“너 인마, 난 결정권 없으니까 대표님께 직접 말씀드려. 알겠어? 안 된다고 하시면 짤 없는 거다. 알지?”
“네, 형.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올곧은 대답이 즉시 튀어나오자 윤 매니저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이 얄미운…..어휴…..말을 말자. 대체 김 감독이 순진한 널 어떻게 꼬인 거냐? 아놔…. 예민정 작가랑 잘 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형,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망시키는 일 없을 테니 믿어주세요.”
“아, 몰라. 됐고. 빨리 준비나 해.”
“넵!”
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금세 방으로 사라지자 그는 제 목구멍으로 생수를 탈탈 털어 넣었다.
‘저 녀석….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참내…. 뭐에 홀린 것처럼 말이야. 저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은 처음이구먼. 아놔….그나저나 대표님께 엄청 까이게 생겼네. 어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냐…..’
토요일 저녁, 낙안당의 마당이 손님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자그마한 홀과 룸이 금세 손님들로 가득차자 그냥 돌아가기 싫은 이들은 급기야 마당의 평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문 앞 골목엔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주인 남자는 내내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요리를 내보낸 후엔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대기 손님들의 음식까지 만들어 낸 그가 직원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더니 금세 후식을 준비해 직접 룸으로 들고 갔다.
“아이고…. 스승님들, 많이 드셨습니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대접해드리지도 못했군요.”
막 젓가락을 놓던 윤설과 해인이 주인 남자를 보고 미소 지었다.
“저희야 잘 먹었지만…. 자꾸만 스승님 소릴 들으니 민망한데요? 히잇.”
“아, 그럼 스승을 스승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그래야 초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허헛.”
“어? 아저씨, 그건 뭐예요?”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들고 온 것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 이건 스승님들께만 특별히 선보이는 겁니다. 앞으로 낼 후식인데 단호박으로 양갱을 좀 만들어봤어요. 합격이면 손님상에 내려고 하니 맛을 좀 봐주시죠.”
윤설과 해인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인 남자가 스스로 요리를 응용해 선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의욕과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는 뜻이기에 가르친 입장에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맛이 없다고 해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더군다나 맛까지 좋았다.
윤설과 해인은 서로를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아저씨, 정말 대박인데요? 많이 달지 않고 고소해요. 몸이 건강해지는 맛이랄까요?”
해인의 칭찬에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하하. 정말인가요? 스승님은 어떠셨어요?”
남자가 윤설을 응시하자 그녀가 자그마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 맛이…. 좋습니다. 솜씨가 참으로…. 좋으십니다.”
진짜 스승에게까지 칭찬을 듣자 주인 남자의 광대가 더욱 승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바탕 웃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게 다 스승님들 덕분이 아닙니까. 허헛. 은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으…정말 생각하기도 싫군요. 아무튼 생각할수록 신기하다니까요. 젊은 아가씨가 어찌 이리 조선 음식에 해박하신지….허헛.”
옅게 웃음 짓던 윤설이 멈칫하자 해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에이, 아저씨가 잘 하신 덕분이죠. 뭘…. 그나저나 손님이 엄청 늘었던데요? 직원도 뽑으시고….이제 어엿한 낙안당의 사장님이 되셨네요?”
“하하. 말도 마세요. 참, 그때 계셨었죠? 그…누구더라….? 아, 민준. 그래요. 민준이 다녀간 후부터 손님들이 어떻게들 알고 찾아오는지…허헛….”
“우와, 역시 대세는 다르네요?”
해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주인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허헛. 다음 주엔 방송국에서 촬영도 온다고 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헐, 방송국에서요? 우와….이제 낙안당 예약 안 하면 못 오겠는데요? 우리도 이제 예약해야 할 듯?”
“아이고, 그럼 쓰나. 스승님들은 언제라도 반갑게 모셔야지. 암요.”
한바탕 웃음이 휩쓸고 간 후였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아가씨들 앞에 흰 봉투 하나가 놓였다.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한 얼굴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찰나, 주인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부끄럽게도 이제야 고마운 마음을 전하게 됐군요. 그간 형편이 안 되어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어찌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자아, 약소합니다만, 제발 받아주세요들….”
윤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유지하는 동안, 안에 든 것을 추측한 해인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헉, 아저씨, 말도 안 돼요. 저희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아이고, 무슨 그리도 서운한 말씀을….”
“정말이에요. 무얼 바라고 도와드린 게 아닌 걸요?”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시선에 담기자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이 무엇이기에……그러는 걸까? 그나저나 저리 흰 종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마치 비단결 같구나. 청나라의 것일까? 아저씨께서 해인이에게 값비싼 종이를 선물로 주시려는 게로구나.’
해인이 펄쩍 뛰자 주인 남자가 이번엔 윤설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엉겁결에 봉서를 쥔 그녀가 흠칫 놀라 도로 그에게 내밀고 말았다.
“이, 이렇게 값비싼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울상에 가깝게 변해갔다.
“아이고,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요. 열어보면 정말 얼마 안 된다니까요. 거 참…. 내, 스승님들 덕분에 일어서게 된 것이 너무 고마워 마음을 표한 건데…. 자꾸 이러시면 액수가 작아서라고 생각하렵니다.”
윤설과 해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받을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마움을 표하는 진심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감한 마음들이 눈빛으로 드러나자 해인이 곧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성의를 모른 척 할 수 없네요. 에휴, 난감해라. 저희 정말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알죠. 알다마다요. 돈에 욕심 부리는 인간들은 처음부터 노래를 할 테죠. 하지만 저는 압니다. 스승님들은 진심으로 제게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을요…. 마음을 표하고 싶으나 아가씨들 선물을 고를 줄도 모르고…. 그저 필요한 것 하나씩들 사세요. 그뿐입니다. 받아주신다면 저도 한결 편안하게 살 것 같아서 그럽니다.”
당황과 난감함으로 어쩔 줄 모르던 이들이 낙안당의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몇 걸음을 걸어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 남자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짓은 고마움의 표현이자 부담 갖지 말고 가라는 것이기도 했다.
윤설과 해인이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더니 골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대로 기운 밤…..
초를 켠 옥탑 방에 은은한 향기가 번져갔다.
윤설과 해인은 밥상 위에 올려둔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해인이 맞은편에 있던 친구를 응시했다.
“윤설아, 아무래도 괜히 받은 걸까?”
“그, 글쎄다. 나도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구나. 어찌 이렇게도 뽀얗고 매끈한 것이 있단 말이니. 얼마나 값비싼 것일까? 내, 평생 이렇게 흰 것은 처음이란다. 조선에선 구하기 힘드니 아마도 청나라에서 온 것이겠지? 아니면 서역이려나?”
“으, 응? 뭐라고?”
당황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금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윤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벗을 바라보았다.
“내가 또 실수를 한 모양이로구나.”
“앗, 미안. 너무 오버했지? 윤설아, 너 설마…아저씨가 이 봉투만을 주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응. 그것만도 구하기 힘든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아…… 내가 그동안 너무 복에 겨웠나봐.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온 조선에선 종이가 귀했을 텐데….그치? 웃어서 미안. 난….때때로 순수한 네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느끼거든.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이해해주라.”
윤설은 벗의 해명을 알아듣긴 했지만 봉서에 담긴 비밀을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런 마음을 드러내는 듯 이번엔 윤설이 해인을 향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허면, 봉서 속에 다른 것이라도 있단 말이니? 실은….무언가가 들어있다면 값비싼 종이일 거라 여겼다만…..”
“앗, 정말? 히잇. 아마 봉투보다도 훨씬 더 비싼 게 있을 걸?”
“훨씬 더….. 비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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