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33
32회
해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가슴을 토닥거리기도 했다.
벗의 모습이 생경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설을 향해 드디어 해인이 입을 열었다.
“윤설아, 한 번 열어볼까?”
“으, 응.”
밥상을 앞에 두고 두 소녀의 마음이 각자 다른 이유로 두근거렸다.
윤설은 매끈한 봉서보다 더 비싼 것이 무엇일까 궁금한 얼굴이었고 해인은 오랜만에 받아보는 귀한 것에 떨리는 얼굴이었다.
친구의 동의를 구한 해인이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봉투를 들어 한쪽 눈을 감고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꺄악!”
갑작스런 소리에 윤설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벗을 살피던 그녀가 곧 봉투 안에서 나온 것에 똑같은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꺄악!”
어리둥절한 해인의 시선으로 윤설의 떨리는 눈빛이 담겼다.
“헐, 윤설아, 갑자기 왜 그래?”
“이분의 의복이 낯설지 않아. 혹여 조선에서 오신 분이시니? 나처럼 말이야. 허면, 이분을 만난다면 돌아갈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뭐, 뭐라고?”
봉투 안에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신사임당의 얼굴이 또렷한 오만 원 권이었다.
상황을 인지한 해인이 손사래를 치더니 싱긋 웃었다.
“윤설아, 이건 돈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래. 조선에서는 엽전이 있었지? 그거랑 같은 거야. 그리고 이분은 그저 그림에 불과하다고. 여기에선 종이로 된 돈을 사용하는데 거기에 훌륭한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거야. 참, 너도 알겠구나? 이분이 신사임당이시잖아.”
“신….사임….당?”
“응, 자아. 자세히 한 번 봐봐. 여기 그림도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모양처에다가 대단한 화가시잖아. 에이….. 잘 알면서.”
윤설은 해인이 쥐어준 것을 떨리는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천천히 살피던 그녀가 곧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면, 이분의 당호가 임사재이시니?”
“엥? 당호? 그건 모르겠지만, 그….뭐더라? 유명한 그림인데 가지도 있고 나비도 있고 여치인가? 그것도 있는 그림말이야. 잠깐! 검색하면 다 나오지롱. 히잇.”
해인이 네모난 판을 몇 번 두드리더니 곧 밝은 얼굴로 그것을 윤설에게 내밀었다.
그제야 윤설이 감탄에 가까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참으로 유명한 초충도가 아니니. 허면 이분이….그분이시로구나.”
“그래, 맞다. 초충도. 나의 무식을 어쩔….헤헷. 헐, 윤설아, 너 완전 감동했구나?”
윤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기억이 나는구나. 조선의 땅에도 훌륭한 재능을 타고나신 현모가 계셨다고 말이다. 여인의 몸으로 여느 사대부가의 남정네들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들을 압도할 만하다고 하셨지. 아버지께선 재능이 있으나 그것을 숨겨야만 하는 여인들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셨어. 난…. 그분의 그림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것을 보니 전해 듣던 모습과 맞아떨어지는구나. 풀벌레 그림이 너무나 수려해 닭이 쪼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단다.”
“헐, 대박! 진짜? 얼마나 잘 그리셨으면 닭이 착각을 할 정도래? 존경스럽다. 히잇. 맞아. 요즘 사람들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윤설이 다시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신사임당에서 지폐로 관심이 옮겨간 이후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림이 정교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종이의 재질은 문방사우와 꽤 친근했던 그녀에겐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표면을 살살 쓰다듬어보던 윤설의 귓가에 이번엔 해인의 감탄이 흘러들었다.
“헐!”
돈을 세던 해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친구를 응시했다.
“윤설아, 우리 부자 됐다. 대박! 아저씨가 이렇게 많이 주실 줄은 몰랐어. 휴우….이것 참… 항상 요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낙안당에선 한 일도 없는데… 남의 돈을 이렇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넹? 아니, 나만 한 일이 없지, 윤설이 넌 엄청난 도움을 준 셈이니까 받아도 되겠다. 그래, 아저씨께서 그렇게 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말이야.”
해인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지폐를 차곡차곡 모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자, 윤설아, 이건 네 몫인 것 같다. 낙안당을 심폐소생술로 살아나게 한 장본인이니까.”
벗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윤설이 제 앞에 놓인 봉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해인아,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네가 나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야. 게다가 나 역시 이토록 귀한 것을 받을 정도로 큰일을 한 건 아니란다. 그저 돌아갈 방법을 알고자 행동한 것이니 순수한 도움은 아닐 테지. 그래서 더더욱 받을 수 없단다.”
해인의 마음이 감동으로 차분히 물들기 시작했다.
진심이 조롱받는 세상에선 오로지 결과가 중요할 뿐이었다.
마음을 다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대충 건성으로 때우고는 대가를 요구하는 손들이 아무렇지 않게 활개 치는 세상이었다.
이미 조선에서 온 소녀의 순수함에 감동하고 있던 해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만의 진실함이 더욱 와 닿아 또다시 해인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중간에 붕 뜨고 만 봉투가 왠지 민망해 보인 듯 윤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기….해인아……이러면 어떻겠니?”
“응? 뭔데?”
“아저씨께서 애써 주신 것이니 되돌릴 순 없는 노릇이고…..난 어차피 이곳의 돈이 필요치 않으니 말이다. 이걸 네가 가지는 편이 좋을 듯하구나.”
“왓? 헐, 안 될 일이지. 어우 야, 내가 아무리 돈 때문에 열일을 한다고는 해도 이건 아니다.”
해인이 벌게진 얼굴로 펄쩍 뛰자 윤설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네 마음, 잘 안단다. 허나, 이것을 가진다고 한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해인아, 난 하루빨리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뿐이란다. 허면……. 아, 그래. 그간 네게 신세진 것을 갚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니? 난생 처음 본 이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니? 그래, 이것으로나마 네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할 듯하구나.”
“유, 윤설아………”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은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법이었다.
또다시 감동으로 일렁인 해인의 마음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윤설의 양보와 배려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분명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량 내부의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운전대를 잡은 윤 매니저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입은 마치 자물쇠라도 걸어놓은 듯 굳게 잠긴 상태였고 미간을 찡그린 얼굴에선 한숨만이 잦았다.
조수석에 앉은 준이 제법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형…. 죄송해요.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시죠?”
“흐음……”
“이번 한번만 믿어주세요.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담담한 음성 속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지만 준의 한 마디에 윤 매니저가 버럭 하고 말았다.
“얌마! 너 대체 대표님을 어떻게 설득시켰기에….으휴….말을 말자. 말을 말아. 너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아냐?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야. 서운하다. 정말.”
윤 매니저는 준에 대해 서운함이 앞섰지만 사실 무엇 때문에 그런 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민준을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그와 가장 가깝다고 느꼈고 무언가 큰일을 해내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준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을 고집하자 그는 내심 서운했고 대표까지 설득 당하자 기거이 분노가 일고 말았다.
“알죠. 제가 왜 형 마음을 모르겠어요.”
“말은….아주 참기름이 좌르르 흐르지. 쳇.”
“제 성공 하나를 위해 언제나 수고하시는 형이잖아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더 좋은 조건으로….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시려는 거고요…. 저, 형을 만나 이만큼 컸다는 거, 잘 알아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푸세요. 형 마음이 불편하시니까 저도 좀……”
“흥, 칫. 잘났다. 민준. 그래, 아주 잘생겼지. 길거리 캐스팅, 누가 했는데……”
“풉”
준이 순식간에 빵 터지자 그가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지금 그 리액션 뭐냐? 부정의 몸짓이냐?”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매니저님, 자아, 이것 좀 드시죠.”
“뭐! 이게 뭔데?”
신호 대기로 차를 세운 윤 매니저가 곁눈질을 하자 준이 싱긋 웃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껍질을 반쯤 깐 사탕이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진한 밤색의 그것은 윤 매니저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 맛이었다.
순식간에 침이 고인 이가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탕을 낚아챘다.
“너….. 이까짓 걸로 때우려 하지 마라.”
“넵. 당연하죠. 저야 언제나 형님께 충성이잖아요.”
“으이그….말은 청산유수지.”
싸늘했던 공기가 훈훈함을 품은 지 얼마 안 될 즈음,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는 방송국을 백 미터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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