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55
54회
준의 대답에 앞자리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해인과 윤 매니저에게선 막 시작한 연인들의 설렘이 여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준에겐 그저 부러운 모습이었다.
그가 곁에 앉은 이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윤설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윤설 씨, 불편하신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조금은 걱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상황이 불편하실까 봐요….아니시라니 안심이 되네요.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또 함께 가게 되어서 기쁩니다.”
진심 어린 한 마디에 윤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곧 수줍은 시선에 준의 싱그러운 미소가 담기자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윤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많이 힘드셨죠? 저도 오늘은 좀 힘든 하루였네요. 음…. 윤설 씨, 제 친구 되어주신다는 약속, 유효한 거죠? 그럼…. 힘들었던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시선을 떨구려던 윤설이 멈칫했다.
지난번 숲에서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인을 제외하고 온통 낯선 사람들 틈에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그녀에게 민준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었다.
마음속의 얘길 해준다는 건 그녀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윤설은 역시 낯선 존재가 분명했다.
그런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윤설은 준에게 신뢰를 느꼈고 지금 제 도움을 요하는 청에 응해주고 싶었다.
“편히 말씀해보십시오.”
준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의 일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집중력이 떨어져서 NG를 많이 내고 말았어요. 휴우…. 감독님께는 물론….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께 어찌나 죄송했던지….. 오늘의 저는 바보 같이 느껴졌어요.”
준으로부터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오자 윤설이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이기에 완벽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루의 실책을 반성하는 님의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에게 장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안다면 앞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잘 해오셨으니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허면,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젊은 아가씨의 조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륜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준은 진심 어린 말에 제 부끄러운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낸 것도 그랬지만 이번 역시 그녀에게 속내를 밝힌 건 스스로도 의아한 일이었다.
이상했다.
윤설에겐 어떤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
“휴우…. 윤설 씨에게 위로를 받으니 하루의 피로가 사라지는 것만 같네요. 고맙습니다. 오늘은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군요.”
준의 너스레에 윤설이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윤설 씨…. 그 미소…. 정말 사랑스러워요. 언제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요?’
늦은 밤 비교적 한산한 도로를 내달리던 밴이 낯선 장소에 멈추었다.
윤설과 조금은 수줍고 설레는 분위기를 이어가던 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준아, 오늘 다 같이 힘들었는데 기분 전환도 할 겸, 한강 야경 좀 보고 가자. 윤설 씨도 좋죠?”
윤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자 조수석에 있던 해인도 뒤를 돌아 제 친구를 응시했다.
“윤설아, 한강 야경 끝내주거든. 걱정 말고 우리 구경해보자. 나 사실 처음이야. 히잇. 콜?”
윤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벗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살짝 상기된 표정은 소망을 의미했다.
들어주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곧 네 사람이 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은 쌀쌀한 밤공기가 청량하게 다가왔다.
“캬, 야경 죽이네. 준아, 우리도 처음 아니냐?”
“그러네요.”
“사람이 이런 재미도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 안 그래? 그치? 해인아?”
“네. 그럼요.”
윤설과 준이 유독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윤 매니저가 겸연쩍은 얼굴로 준에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무언가를 말했다.
두 남자의 모습에 이번엔 해인과 윤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할 말을 마친 이가 준의 어깨를 툭 치자 그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윤 매니저가 기지개를 쭈욱 펴며 해인에게 다가갔다.
“하아…. 야경 좀 봐. 해인아, 우리 좀 걸을래?”
수줍게 웃던 해인이 윤설을 보며 눈을 찡긋하더니 곧 그를 따라나섰다.
윤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윤 매니저는 금방 다녀오겠다고 안심시켰지만 벗과 멀어지는 건 언제나 그녀에게 불안한 일이었다.
준이 윤설을 바라보았다.
“윤설 씨, 우리도 좀 걸을까요?”
“저…저는…..”
“아, 힘드시군요. 그럼, 저기 벤치에 좀 앉으실래요?”
윤설은 벤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을 향한 준의 배려라는 걸 깨달았다.
곧 두 사람이 한강을 바라보고 앉았다.
정면을 바라보게 된 윤설이 저도 모르게 나직이 탄식을 내뱉더니 서둘러 입을 막았다.
“괜찮아요. 윤설 씨. 저도 막 환호하려던 참이었어요. 말로만 듣던 곳에 이렇게 와보니 정말 아름답네요. 마음에…. 드세요?”
윤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떠오른 둥그런 달은 언제나 보아왔던 것이어서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고 다리를 따라 수놓아진 등불은 마치 금은보화처럼 반짝였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윤설은 처음 이곳에서 보았던 환한 빛을 떠올렸다.
“밤바람이 차네요. 추우시죠?”
가녀린 등을 어느새 준의 외투가 포근히 감싸 안자 윤설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와 행동은 낯설지만 여린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윤설은 자신이 헤픈 여자가 아닐까를 염려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어할 수 없는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윤설이 스스로와 다투는 사이, 준이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아까…… 한 가지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오늘 하루 전력을 다하지 못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거든요.”
“그것이…… 무엇인지요?”
윤설의 대답은 그저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든 건지를 설명할 순 없었다.
“연기에 몰입을 힘들게 할 정도로 저를 흔든 존재는….. 바로 윤설 씨입니다.”
“예에?”
한없이 동그래진 눈이 준을 응시하자 그가 윤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런 마음, 처음입니다. 윤설 씨를 처음 본 건 민속촌에서였죠. 그날, 당신을 본 이후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윤설 씨는 날마다 제 마음 속에서 깨어나 제 생각 속을 걸어 다니죠. 저를 살며시 흔들어 웃게도 하고 애태우기도 하는군요. 누군가를 만나본 적 없기에 이런 감정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윤설 씨를 보면 편안해졌고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얘길 꺼내게 되더군요.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상형을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땐, 어리기도 했고 일에 몰두할 때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죠.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길 소망했습니다. 거창할 필요는 없죠. 그저…. 힘들 때 한쪽 어깨를 내어주며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그런 사람…. 저 역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지내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저는 그 사람을 만났다고 확신합니다. 윤설 씨……당신을 많이 좋아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제 마음…. 받아주실래요?”
이미 동그래진 윤설의 두 눈이 촉촉이 차오르고 있었다.
흠칫 놀라고 만 그녀의 가슴에 동시에 인 것은 바로 설렘과 두려움이었다.
한창 이성에 눈뜰 나이였지만 또래의 사내와 가까이 할 수 없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그저 취미를 소일거리 삼았던 윤설이었다.
더군다나 고명딸을 애지중지했던 부모로 인해 정혼자가 정해지지 않은 터였다.
당연히 사내를 연모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후대에서 만난 남자의 고백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좋아한다고 했다.
그냥도 아닌 많이라고 했다.
윤설은 낯선 사내와 마주앉은 자신을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그의 고백을 통해 깊은 울림을 느끼고 말았다.
설렘은 당연한 것이었다.
꾹꾹 눌러 담기에 바빴던 본능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커다란 두려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후대의 남자와 장래를 꿈꾼다는 건 윤설의 상식을 초월한 지점에 있었다.
돌아가야 할 여자와 그녀를 붙잡고 싶은 남자가 서로를 뜨겁게 마주보는 사이, 강변을 수놓은 가로등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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