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62
61회
드라마 촬영이 완전히 끝난 후, 옥탑 방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해인은 또다시 알바의 세계로 진격했고 윤설은 또다시 홀로 남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윤 매니저와 연애에 푹 빠진 벗이 이전보단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였다는 점이었다.
해인을 보내고 난 윤설이 습관처럼 창을 열더니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방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벗의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더욱 못할 짓이었다.
해인의 은혜를 갚은 겸, 무료함을 달랠 겸, 윤설은 언제나 제가 하던 일들을 이어갔다.
손바닥만 한 옥탑 방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마음을 먹으면 금세 정돈을 할 수 있어서 시간이 남기 일쑤였다.
쌀을 꺼내 그릇에 담아 씻어내는 손길이 익숙했다.
허기진 벗이 언제라도 먹을 수 있도록 밥을 짓는 일은 소소한 일들 중에 가장 보람 있는 것이었다.
밥솥에 쌀을 넣어둔 윤설이 드디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해인의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바구니 속엔 그동안 수놓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어가는 윤설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났다.
조선에서 하던 일들은 소일거리인 동시에 제 정체성을 되새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후대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만큼 조선과 멀어질 것 같은 두려움은 언제나 윤설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십니까? 참으로….그립습니다. 소녀, 아직도 돌아갈 방도를 찾지 못하여 이렇게 있지만….. 반드시 알아낼 것입니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도리가 아닐는지요….’
식솔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던 윤설에게 문득 한 사내가 스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준이었다.
언제나 다정한 눈빛과 음성으로 다가왔던 사람……
친절하게 배려하며 때론 따뜻이 격려도 해주었던 사람…..
해맑은 미소는 잔뜩 얼어있던 그녀의 마음에 훈풍을 불어넣어주곤 했다.
그리고 최근…. 북한강변에서 제트스키를 구경했던 날…..
제 귓가에 스며든 그의 온기를 떠올리던 윤설이 흠칫 놀랐다.
“아야…..”
수를 놓고 있던 바늘이 제 손을 찌르자 윤설이 곧 현실로 돌이켰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은 낯선 사내를 편안하게 떠올리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그리워하면서도 준을 자꾸만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돌아갈 궁리만을 하기 위해 또한 제 정체를 밝힐 수 없어서 그의 고백을 떨쳐버렸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 자체를 끊어내는 일만은 도저히 쉽지 않았다.
아니, 윤설이 애쓰지 않아도 준이 저절로 그녀에게 나타나고 있었다.
‘참으로 미련하구나. 아니 될 말이다. 아니 될 일이야. 나와 그분은 속한 세상이 다르지 않은가…… 결코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 된다고 하여도….. 헤어짐의 슬픔은 어찌 감당할 것인가…. 그분께 짐을 지울 순 없다. 난….이곳의 사람이 아닌 난…. 조용히 온 대로 그저 조용히 돌아가면 그뿐인 것이다.’
윤설은 또다시 스스로를 나무랐지만 곧 준을 그리워했다.
종방연 이후로 그를 보지 못한 날이 5일이 지나고 있었다.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작정했지만 그 결단은 자꾸만 흐려지고 말았다.
“친구야, 짜잔~오늘은 호떡을 사왔지롱. 어? 왜 이리 깜깜해? 자는 거니?”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선 해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조심스레 들어선 그녀가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윤설을 발견했다.
“윤설아, 초도 안 켜고 뭐해? 에이, 너 졸고 있었구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니깐.”
친구의 어깨를 터치하던 해인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윤설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비상사태를 감지한 해인이 서둘러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대낮과 같은 빛 아래에서 윤설의 눈가가 흥건했다.
“유….윤설아…. 왜 그래? 무슨 일이니? 응? 어디 아픈 거야?”
“……해인아…..”
“그래, 어서 말해봐. 무슨 일이 있었니?”
벗을 향한 눈빛이 애절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해인이 윤설의 팔을 붙잡으며 재차 묻자 그녀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어리석은 나를 어찌 하면 좋단 말이니…… 준이 님이 자꾸만 생각나는구나. 잊으려고 해도 그만큼 더 그리워지고….. 지우려고 해도 더욱 각인되는 것만 같아. 두렵다. 해인아. 난 어쩌자고 이리 되었다니….. 이젠 조선의 식솔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지고 말았단다. 이렇게 한심한 나를 어쩌면 좋단 말이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해인의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지난번 준의 대시를 거절했던 윤설이 그를 단념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뜻밖의 고백은 해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해인이 제 친구를 꼬옥 안아주었다.
“내 친구 윤설이, 이긍…이 착한 바보…… 지금의 네 모습이 얼마나 정상인지 모르지? 우리 나이에 이성에게 호감이 생기고 끌리는 그 마음이 당연한 거라고. 네가 조선에 있었다고 해도 과연 이성에게 마음이 없었을까? 이건 예나 지금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난 네 마음 이해해. 그래서 말했었잖아. 준이 씨랑 잘 해볼 생각이 없냐고…. 윤설아, 자연스레 생겨난 마음을 억지로 밀어내진 마. 네가 이토록 간절하다면 한번 해볼 순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윤설아, 준이 씨도 널 그토록 원하는데 얼마나 좋니? 혼자 가슴앓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사귀어봐. 두 사람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면 널 이해해줄 수 있을 거야. 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줄 거라고.”
‘준이 씨라면….. 내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줄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그분은….그분이라면……’
일정을 마친 준이 제법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훤칠한 남자가 슈트 차림에 평범한 거리를 지나치자 금세 행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리둥절해 하던 이들은 곧 그가 민준임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몇 몇은 촬영인 줄 알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준은 상기된 얼굴로 그들에게 목례했지만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얌마! 같이 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민준이 아시죠? 많이들 사랑해주세요.”
준을 뒤따르던 윤 매니저가 숨찬 목소리로 깨알 홍보를 하더니 곧 울상을 한 채로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이 있었다.
차에 오르는 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들려온 갑작스런 소식 하나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상태였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묻는 것으로 매니저를 지치게 한 건 약과였다.
하루 종일 웃음이 났고 평소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실없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 그에겐 상관없었다.
‘윤설 씨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서로의 마음이 통한 걸까?’
준은 서로의 마음이 간절하면 닿을 수 있다는 운명론을 믿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윤설이 보여준 변화로도 조금은 감지할 수 있었다.
초반, 언제나 시선을 떨구고 있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을 바라보더니 미소까지 보여주곤 했었다.
거절을 당한 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윤설 만을 생각하던 준이었다.
한때 미련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야 혼자만의 미련이 아님을 깨달았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윤설의 생각이 드디어 운명임을 믿게 되는 찰나였다.
약속 장소는 윤 매니저의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도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동네는 한적했고 평일 저녁의 카페는 한산하기 마련이었다.
룸으로 들어선 준의 시선이 분주하게 한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꿈결 같은 현실을 선사해준 이를 발견해냈다.
“윤설 씨!”
다소곳한 자태로 앉아있던 윤설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먼저 도착하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과연 잘한 선택인지 내내 염려하던 그녀였다.
윤설의 얼굴엔 긴장감과 함께 옅은 설렘이 붉어진 뺨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준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벅찬 마음은 금세 그녀의 손을 잡을 뻔했지만 준은 제 본능을 참아냈다.
윤설을 놀라게 할 순 없었다.
“얘길 전해 듣고는….꿈이 아닐지…. 계속 믿기지가 않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윤설 씨….”
윤설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준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의 마음은 눈빛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를 바라는 마음이 통한 것은 그녀에게도 역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윤설의 표정엔 약간의 두려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준과 윤설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함박웃음을 짓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윤설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기뻐해주시니….저도 고맙습니다만….. 실은…..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준이 윤설을 응시했다.
서로 사귀어보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준은 윤설로부터 많은 이야길 듣고 싶어 했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말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준이 싱긋 웃자 윤설이 가만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님은…. 이곳에서 대단한 분이시라 들었습니다만, 과연 제가 그런 분과 어울릴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실은…. 도령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고…여러모로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이곳에서?…… 도령? 윤설 씨가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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