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69
68회
네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윤 매니저와 해인은 앞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기에 여념이 없었고 뒷자리에 탄 윤설과 준은 서로를 바라보며 잔잔히 웃었다.
“윤설 씨, 오늘 식사 어땠어요? 잘 못 드시는 것 같던데…..”
“아, 아닙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수줍은 얼굴이 금세 고개를 떨구자 준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깜짝 놀란 윤설이 그를 응시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온기에 가슴이 떨리는 건 당연했다.
“얼굴 보고 싶어서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보여주실까 봐…..”
윤설이 옅게 미소 짓자 준이 말을 이어갔다.
“매일매일 윤설 씨를 생각하고 있어요.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되는 일이죠. 참 신기해요. 당신을 만난 것이 운명 같으니 말이에요.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또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막막하기까지 하군요. 미안해요.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추억도 만들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네요.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윤설의 시선이 조용히 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 속엔 함께 하고 싶은 절실함이 가득했다.
속으로만 간직한 소망이었지만 사실 그녀 역시 날마다 그와 만나 함께 있고 싶었다.
윤설은 준이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그 눈빛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윤설은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보물을 얻은 것 같아 행복했다.
“그리 여기지는 마십시오. 누구나 피치 못할 일들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준이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더니 이내 꼬옥 감쌌다.
“참, 윤설 씨,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소원이라 하심은…..”
“핸드폰 번호…. 물어봐도 실례가 안 될까요?”
평온했던 얼굴에 곧 당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윤설은 제 번호를 몰랐다.
그녀에게 핸드폰은 해인과의 연락만을 위해서 존재했고 제 벗이 누르라는 것을 꾸욱 누르는 방법밖엔 몰랐다.
그가 원하는 답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윤설이 일단 입을 열었다.
“하나입니다.”
“네에?”
준이 잘못들은 것으로 알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쩌지? 이 답이 아닌가봐….’
당황한 윤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준이 싱긋 웃었다.
“그럼요. 윤설 씨의 번호는 당연히 1번으로 저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번호를 알려주세요. 매일 당신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요.”
다정한 한 마디가 그녀를 위로했지만 진땀이 나는 상황을 피해갈 순 없었다.
윤설이 급기야 떨리는 목소리로 벗을 불렀다.
준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고 윤 매니저와 달달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해인이 부름에 뒤돌아보았다.
“해…해인아…. 내….핸드…폰…번호 좀… 알려주련?”
“그래.”
해인은 민준의 스마트폰을 건네받아 윤설의 번호를 입력해주었다.
그것을 되돌려 받는 준의 얼굴이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현실을 깨달은 그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드디어 제 폰에 그토록 소망했던 윤설의 번호가 담기는 순간이었다.
“윤설 씨, 고마워요. 자주 전화해도….될까요?”
간신히 안도한 이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의 얼굴에서 행복의 웃음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연인들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단계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준에게 윤설은 그런 존재였다.
소중한 이를 대함에 있어 서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준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하고 싶었다.
편의점 앞에 승용차가 멈추어 섰다.
윤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아, 윤설 씨랑 잠시만 있어봐. 울 해인이 매상 좀 올려줘야겠다.”
“아잉, 오빠도 참….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해인의 애교에 애간장이 녹는 듯 그가 껄껄 웃더니 그녀의 볼을 살며시 꼬집었다.
“혹시 알아? 매상이 좋아야 사장님이 우리 해인이 시급 올려주실지? 어차피 살 것도 있었어.”
차에서 내린 이들이 다정히 팔짱을 끼고는 편의점 안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을 보며 싱긋 웃던 준이 윤설을 응시했다.
시끌벅적했던 내부가 곧 고요해지자 조금 어색하기도 한 찰나였다.
“윤설 씨랑 사귀게 되면 해보고 싶은 것이 참 많았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네요. 얘기도 많이 나누고 싶은데 오히려 촬영 때보다 더 못하게 된 것 같지 않나요?”
윤설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헌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와의 대화는 얼마든지 환영이었고 질문 역시 반기는 것 중 하나였다.
“말씀해보세요.”
“저….실례하지만…. 왜…. 얼굴을 가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뜻밖의 질문 하나가 준에게 당황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장난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윤설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고 지금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난생 처음 보는 순수함을 마주하자 준이 무엇에 홀린 듯 스르륵 입을 열었다.
“제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밖에서 사적인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명확히 알려주는 일은 쑥스러울 만도 했다.
본인이 연루된 일이면 더욱 그랬다.
준은 윤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대답했지만 스스로를 높이는 건 아닌지 부끄러웠다.
사실 그런 마음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용기를 낸 대답에도 불구하고 윤설의 표정은 여전히 의아함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준이 더욱 당황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보통은 이쯤 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아니, 애써 답하지 않아도 그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대중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윤설은 어려운 대상이었고 이 순간만큼은 준의 진땀을 유발하는 존재였다.
“…..배우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윤설 씨, 저를 이해해주시는 건가요?”
준이 드디어 밝은 미소를 회복했다.
윤설은 스스로 내뱉은 말이 그를 웃게 만들어 기뻤지만 사실 그의 직업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었다.
배우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녀의 기준에서 준의 말은 임금님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아비를 통해 늘 듣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경거망동해선 아니 된단다. 그것은 나를 신임하시는 전하께 더없는 불충이 될 것이며 백성들에게도 들 낯이 없게 만드는 것이란다.’
궁궐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았던 아비가 윤설의 마음속에 피어났다.
‘아버지……’
후대에서의 삶이 다채로워서……
그리고 최근엔 도령과의 사귐이 달콤해서…..
잠시 잊었던 조선이었다.
죄스러움으로 괴로운 윤설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지고 말았다.
“유…윤설 씨……”
준이 멈칫했다.
“갑자기 왜….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이런 삶은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아…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니……..”
윤설이 제 소매로 눈가를 훔치자 준의 가슴이 애잔함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고운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그가 가만히 윤설을 안았다.
흠칫 놀란 마음이 곧 몸짓으로도 드러났지만 준은 물러서는 대신,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윤설 씨, 당신을 만난 이후로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 걸 느껴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어떤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느낌입니다. 당신의 그 순수한 눈빛이 좋고 그 마음이 너무 예뻐요. 윤설 씨와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고마워요. 내게 와줘서…..”
놀란 가슴이 사내의 품에서 서서히 진정되고 있었다.
그와 닿을 때마다 설렘을 느끼는 건 당연했지만 그럴수록 윤설에겐 말 못할 고민이 생겨나고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이분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가까이 닿은 것만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윤설의 가치관에 의해 이쯤 되면 혼인을 결정할 단계였다.
그와 혼인을 하게 된다면 함께 돌아가지 않은 한, 조선 행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후대의 사람인 그가 조선으로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리움에 사무친 식솔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이곳에 남을 수도 없었다.
두 세계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 있음은 윤설을 아득한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윤 매니저와 해인이 편의점 밖으로 나오며 배시시 웃었다..
그의 양 손에 든 비닐봉지가 제법 묵직했다.
얼핏 보아도 매상을 꽤나 올려준 듯했다.
곧 승용차 트렁크가 열리더니 윤 매니저가 쇼핑해온 것들을 차에 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마자 서둘러 몸을 떼었던 윤설과 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허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윤설이 차에서 내리자 준이 안타까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만나기 힘든 연인은 대화의 시간조차 길지 못했다.
남들의 이목 때문에 배웅도 쉽지 않았다.
언제나 손꼽아 기다렸던 순간은 바람처럼 휙 지나가버리기 일쑤였고 그 안타까움이란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윤 매니저는 해인과 가볍게 포옹하더니 곧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어 차를 돌린 그가 유리창을 내리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해인아, 잘 있어. 너무 무리하진 말고. 오빠 생각 많이 해라. 알지? 하핫. 전화할게. 윤설 씨도 안녕!”
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편의점 앞, 해인의 곁에 선 윤설은 승용차를 향해 목례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달은 준이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했다.
차가 스르륵 움직여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준은 몸을 돌려 뒷 차창을 응시했다.
고개를 든 윤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당신을 만나지만…. 헤어지는 순간, 더욱 더 깊은 그리움에 빠져드는군요. 윤설 씨…..또 보고 싶어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서 신혼의 달콤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 이들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밴에 앉아 거울을 보던 이지가 가방 안에서 들려오는 알림 음에 하던 것을 멈추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얼굴이 담담했다.
하지만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그녀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민준의 스캔들 기사, 그것을 보낸 사람은 영은이었다.
분노한 손길이 곧 친구를 불러냈다.
“이, 이거 뭐야?”
[ 훗, 꽤나 급했나보네? 거기 나와 있잖아. 읽어줘? 대세로 떠오른 민준, 이태원 골목에서 여자와 함께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사실이야?”
[ 글쎄. 나야 뭐 네 정보원 노릇에 충실할 뿐이잖아? 자세한 건 아는 기자들한테 물어보던가. ]영은의 말투는 삐딱했다.
이지와 태주가 함께 에 출연하게 된 이후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지는 영은을 이해했고 충분히 설명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닫힌 상태였다.
“아직도 나한테 화난거니?”
이지의 물음에 영은이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 어멋, 누굴 뭐로 보고? 난 그렇게 인정사정없는 사람이 아닌 걸? ]수화기를 든 이지가 미간을 찡그렸다.
쿨한 척 하는 영은의 말에선 가시가 여전했다.
“미안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해하리라 생각했어. 출연은 내 뜻대로 된 게 아니야. 소속사와….”
[ 소속사와 감독님의 끈질긴 간청이 있으셨다고요? 그래, 누가 뭐래? 호홋. 나도 같은 바닥에 있는데 그쯤 이해 못 할까 봐? 그런데 말이지, 좀 서운하더라. 태주 오빠랑 달달하게 나오는 것도 샘나고…. 내가 마치고 나니까 바로 연락이 끊던데…. 이건 실화잖아? 내가 네게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슬펐어. 그래서 이번에 좀 만회하려고 기사 보낸 거야. 오해는 말아줘. ]“여보세요? 영은아? 영은…..”
이미 끊긴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지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끝내 손에 쥔 폰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조수석에 있던 매니저가 걱정스런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제 구찌 백 선물로 들어왔다고 했지?”
“그건 왜?”
“영은이한테 보내.”
장 실장이 당황스런 얼굴로 이지를 응시하는 동안,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던 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지의 검지가 스마트폰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곧 현실을 직시한 이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민준이 한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마스크 뒤로 숨겨진 표정은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언제나 준만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쯤은 수월한 일이었다.
‘준이 씨…… 그런 거, 아니죠?’
그의 미소는 이지가 언제나 원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앞에서의 일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시선이 재빨리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흐릿한 사진 속, 준의 곁에 선 여자의 얼굴은 또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서 하나가 질투심으로 얼룩진 마음에 포착되었다.
‘길게 땋은 머리? 서, 설마….. 그 여자?’
너무 촌스러워서 결코 제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여자…..
존재감이 없어 금세 잊고 말았던 여자……
분명 그녀였다.
이지의 얼굴 위로 푸른빛과 붉은 빛이 번갈아 감돌기 시작했다.
극도의 당황과 질투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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