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73
72회
밴에 오른 윤 매니저가 싱글벙글했다.
“우하하. 역시 예민정 작가라니깐. 완전 의리 있는 양반 아니냐? 아놔, 너 사극 두 편 할 동안 예 작가 작품 물 건너간 줄 알고 핵 절망했었는데… 푸핫.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 아까 말씀하시는 거, 들었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그러셨잖냐. 저는 오승혁 역에 민준 씨만 생각했습니다. 오홍홍.”
낯간지러운 여자 흉내에 준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준아. 웃어라. 웃어. 이제부턴 정말 웃을 날만 있을 테니까. 아우, 어쩜 대본도 이렇게 깔끔혀? 자자, 눈도장 찍어두시고요. 나도 깔끔하게 스케줄 정리 좀 들어가 볼까?”
윤 매니저가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패드를 꺼냈다.
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웃던 준이 제 옆에 놓인 대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흰색의 바탕엔 한글과 영문이 깔끔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예민정 작가는 3년 만에 컴백 작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내민 대본은 로맨스의 새 지평을 연 장본인으로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만 했다.
준은 그녀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예 작가의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을 언감생심으로 여기고 있었다.
을 하기 전, 매니저에게 얼핏 듣긴 했지만 사실 기대감은 거의 없었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본인에겐 과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정도 급의 작가에겐 적극적으로 출연 가능성을 타진하는 물밑 작업이 많은 법이었다.
일정 수치 이상을 웃도는 시청률은 기본이고 출연한 배우들의 인지도와 몸값은 동반 상승하곤 했다.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던 민준에게 뜻밖에도 기회가 날아들었다.
예민정 작가가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그를 지목한 것이었다.
막연한 희망이 현실이 되자 윤 매니저가 가장 먼저 쾌재를 불렀고 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그렇게 연락이 닿아 예 작가를 직접 대면해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는 의료 로맨스 물이었고 준에게 의사의 배역은 처음이었다.
연이은 사극 두 편…..
나쁘지 않았지만 이번에야말로 고정된 이미지를 단번에 바꿔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속사와 윤 매니저의 설득이 이어지는 가운데 준은 결국 제 마음을 결정했다.
하지만 예 작가의 드라마를 선택한 것은 단지 인기를 의식한 행보가 아니었다.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만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윤설 때문이었다.
준은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고 더욱 열심히 일해 기회를 얻고 싶었다.
대중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명분…..
그에겐 그녀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윤설 씨….. 이제 또다시 바빠질 테죠. 언제라도 당신 곁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최선의 선택이 우리의 사랑을 지켜 주리라 믿어요. 내가 더욱 노력할게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준이 윤 매니저를 응시했다.
“형, 저….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썰… 말씀하십쇼. 의사 선생님. 캬, 부르기만 해도 멋있구먼.”
“형도 참…. 그러지 마세요.”
윤 매니저가 키득키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사람이 참 바르다니깐. 뭔데? 과감히 말해봐. 형이 이 와중에 못 해줄 게 뭐가 있겠냐?”
준이 조심스런 눈길로 운전석을 살폈다.
김 대리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껏 낮은 음성이 윤 매니저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알아들은 그가 대뜸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엥? 네 거 있잖아. 고장 났냐?”
“아, 아니요. 그게…. 선물을 좀 하고 싶어서요.”
히죽거리던 윤 매니저가 정색하더니 준을 흘겨보았다.
“선물? 누구한테? 오…. 이거이거 촉이 오는데? 설마….”
저도 모르게 흥분한 윤 매니저가 순간적으로 운전하는 김 대리를 의식했다.
그는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가 아이패드에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 매니저가 피식 웃었다.
사랑에 빠진 이를 놀리는 듯한 눈짓이 이어지는 동안, 준이 그의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적어갔다.
그것을 확인한 윤 매니저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깊은 당황으로 물들고 말았다.
“야! 뭐?”
기어이 앞좌석의 김 대리가 룸미러를 통해 뒤를 살폈다.
“실장님, 저 부르셨어요?”
“아, 아니야. 흠흠….내가 뭘 좀 보느라고….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하면 돼. 우리 김 대리는 운전이 항상 퍼펙트하단 말이지.”
“앗,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윤 매니저가 준을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말려야 하는 처지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준의 제안에 자신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자그마한 밥솥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윤설은 쪼그려 앉은 채로 핸드폰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고개를 흔들더니 곧 일어섰다.
솥의 뚜껑을 열자 곧 뽀얗고 윤기가 흐르는 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설은 주걱을 찾아 밥이 뭉치지 않게 살살 휘저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근자의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구나. 조선으로 돌아갈 날을 그토록 고대했던 난 어디로 간 걸까….?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만 흐릿해져 가니 참으로 슬프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분을 떠올리는 내 모습이 더욱 슬프구나. 그분과는 장래조차 약조할 수도 없는 처지인 것을…. 난 이제 어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막막하면서도….그분이…보고 싶다.’
윤설은 제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건 아닌지 때론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이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었고 하루 종일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붓도….바늘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린 자리엔 오직 낡은 2G폰이 들려있기 일쑤였다.
윤설은 스스로를 나무랐지만 준과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끈을 놓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고 다정한 음성은 그녀를 웃게 만들곤 했다.
윤설의 일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텅 빈 공간에서 설렘으로 기다리는 건, 바로 은애하는 이의 음성이었다.
-띠리리리로 띠리리리로-
방바닥에 두었던 폰이 풍악을 울리자 윤설의 동그래진 눈이 설렘과 반가움으로 촉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윤설 씨? 저 민준입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쪽은 언제나 준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다정해서 외로움으로 싸늘해진 마음을 따뜻이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예에, 김윤설입니다. 잘…. 계셨습니까?”
수줍지만 용기를 낸 한 마디에 준이 싱긋 웃었다.
[ 네, 윤설 씨. 3시간 전에도 통화했지만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 뭐하고 있었어요? ]“아… 해인이가 올 시간이라…. 밥을 좀 해두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윤설이 수줍게 웃었다.
“그리 여겨주시어 고맙습니다만, 이곳의 솥은 참으로 훌륭하여 가마솥 못지않은 것만 같습니다. 혹여 원하신다면… 밥을 해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 네에? 하하… 정말요? 와… 영광인데요? 정말 그런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합니다. 음….그런데…. 밥은 제가 윤설 씨에게 먼저 해드릴 것 같은데요? ]윤설이 알 수 없는 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에? 그, 어인 말씀이신지……”
[ 윤설 씨, 요즘 통 시간을 내지 못해 미안해요. 많이 보고 싶은 제 마음……아시죠? ]윤설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도령의 한 마디가 어찌 이토록 달콤할 수 있을까?’
속내 감추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세상에서 온 윤설이었다.
다정한 준의 언행은 더없이 달콤해서 귀는 물론, 마음까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보고 싶다는 고백은 설레면서도 고마운 것이었다.
[ 저…. 곧 새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동안 자주 못 본 게 미안하기도 했고 더욱 바빠지기 전에 윤설 씨 만나고 싶어서요. 밖에서 보는 게 좀…. 조심스럽더군요. 그래서 저희 집으로 초대할까 합니다. 어때요? 와주실 수 있나요? ]“예에? 지….집이라면…..”
윤설이 흠칫 놀란 얼굴로 제 입을 막는 순간, 수화기 너머의 준은 밝게 웃었다.
[ 아…. 너무 갑작스럽죠?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을 텐데…… 제가 미처 윤설 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제 상황만 생각한 것 같군요. ]대꾸할 생각도 못한 윤설이 손을 떨고 있었다.
도령 집으로의 초대는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고 그녀로선 이쯤 되면 선을 넘은 셈이었다.
물론 자신을 정인으로 여겨주어 고마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장래를 논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앞서가는 것은 불안을 유발할 뿐이었다.
“저……”
[ 아무래도 부담이 크셨군요. 하지만…. 저는 윤설 씨가 꼭 오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부족한 저를 그토록 아껴주시어 고맙습니다만……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혹여…양친께 저에 관해 말씀드린 것입니까?”
[ 네? ]윤설이 멈칫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만 같아 식은땀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토록 조심한다고 했지만 몇 백 년의 간극을 맞추어 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꽁꽁 동여매 숨겨둔 제 정체가 탄로 날 것만 같아 가슴을 졸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시원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뭘 고민하시는지 알겠어요. 우리 집에 가족들이 있을까 봐 부담으로 여기셨군요? 염려 마세요. 저, 혼자 살고 있습니다. ]윤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씩씩하게 대꾸한 준이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삐딱하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한 마디였다.
그가 해명을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 아, 오해는 마세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참, 깜빡 했네요. 해인 씨랑 형도 같이 초대하려고 해요. ]준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름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지는 중이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심려를 거두십시오. 그간 많이 힘드셨을 듯합니다. 제가 혹여 도와드릴 일은 없겠습니까?”
뜻밖의 대꾸였다.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손사래 쳤다.
[ 아닙니다. 도와주시다뇨… 하핫. 제가 초대한 입장인 걸요? 그럼, 윤설 씨…. 꼭 오시는 걸로 알고 있어도 될까요? ]“…예에….”
수줍은 대답 너머로 준의 밝은 웃음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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