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388
〈 빌어먹을 환생 389화 〉 개선
정박한 함선들을 향해 다리가 이어졌다. 수정유리를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다리들이 마법에 의해 둥둥 떠서 움직였다.
함선이 수십 척인 만큼 연결되는 다리도 수십 개였고, 마법에 의해 움직일 뿐 다리 자체는 실물이다.
‘돈지랄이로군.’
토벌 소식을 전한 것이 일주일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만큼의 준비를 해낸 것이다.
촤라락! 수정다리 위에 융단이 깔렸다. 여전히 하늘에는 빛의 갈라쇼가 진행 중이었지만, 아까처럼 요란한 축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짝짝짝…….
대신에 황제와 교황과 국왕들이 이쪽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함께 온 기사들과 뒤편에 모인 시민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순식간엔 항구 전체가 요란한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먼저 내리시오.”
토벌대의 총대장을 맡은 것은 오르투스다. 하지만 그는 먼저 내리지 않고, 오히려 유진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마왕 토벌이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그대의 몫이지 않소. 유진 공.”
“어…… 아무리 그래도, 토벌대의 총대장은 오르투스 경이신데…….”
전적으로 자기 몫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군. 오르투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총대장을 맡은 것은 사실이나, 토벌에서 총대장다운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잖소. 내가 먼저 내린다면 토벌대뿐만 아니라, 저기 와계시는 손님들도 우습게 여길 거요.”
예전이라면 명예롭고 공치사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욕심이라도 갖겠지만, 지금의 오르투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광란의 마왕과의 전투는 오르투스란 인간을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장시킨 것이다.
‘라이언하트와 현명한 세냐, 성녀 다음에 내리면 되겠군.’
물론 정신적으로 성장했을지라도 본질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애당초 오르투스의 천성은 맨 처음이 되는 것보다는 적당히 묻어갈 수 있는 두세 번째를 선호한다.
“알겠습니다…….”
유진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른 아가로트일 적의 기억도 그렇고, 하멜일 적에도 그랬다. 유진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칭송을 받으면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에이, 뭘 그렇게까지 해?’라고 투덜거린 뒤에, 가슴 속에서 몰래, 조용히, 남모르게 기뻐하는 것이 유진의 성격이다.
[거짓말.]메르가 투덜거렸다.
[그런 주제에 유진 님은 남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하면 발끈하잖아요. 자기 얼굴에 금칠도 열심히 하고, 아닌 척 자기 칭찬도 엄청 하고.]‘원래 사람은 무시를 받으면 발끈해야 하는 것이 맞아. 무시당하는 대로 듣고 있으면 그냥 호구새끼 되는 거야.’
[그런 것치고는 유진 님은 세냐 님이나 아니스 님한테 무시당해도 가만히 계시잖아요.]‘그건…… 내가…… 양심적이고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좀…… 아니, 많이 병신같이 죽어버린 탓에 걔들의 인생이 굉장히 서글퍼졌잖아.’
유진은 괜히 세냐와 아니스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쟤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갈궈도 돼. 사실 쟤들이 나를 진심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음…… 그건 그래요. 세냐 님도 그렇고 아니스 님도 그렇고, 평소 유진 님을 들들 볶다가도…… 유진 님이 진지해지거나 정색하거나 그러면 가장 먼저 유진 님 눈치를 보시잖아요. 어떠한 상황에서 선택을 앞둘 때도, 항상 유진 님의 결정을 따르시더라구요.]‘그건 걔들보다 내가 몸으로 구르기 때문이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300년 전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후방에서의 보조에 특화된 아니스와 세냐는, 전투에 있어서는 전방에서 직접 싸우는 베르무트와 하멜의 의견을 따랐다.
[왜 모론 님 의견은 무시하는 거예요.]‘그 새끼는 뭔 의견을 내도 지 혼자 달려가 버리는 등신이기 때문이지.’
‘얘 말하는 것 좀 봐. 야, 짜샤. 내가 제일 잘나갔다 할 수 있을 전생의 전생은 지금 시대에는 이름만 살짝만 남아 있지, 어? 그리고 전생은 온갖 개고생을 하다 뒈졌는데도 우둔한 하멜이라고 역사적인 병신으로 기록되었잖아!’
유진은 머릿속으로 열변을 토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물론 내가 병신같이…… 어…… 우둔하게 뒈진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저건 너무하잖아.’
[음…… 세냐 님과 아니스 님이 설마 유진 님이 환생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심보가 못돼 처먹었다니까. 어쨌든 나는 병신으로 기록이 됐으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금칠을 해야 돼. 하지만 모론은? 그 등신은 등신인데도 용감한 모론이라고 기록됐잖아!’
울분 가득한 감정에 메르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끌끌 혀만 찼다.
저렇게 속 좁은 인간이 먼 옛날에는 전쟁의 신이라 존경을 받았다니…… 하긴, 싸움 잘하는 것과 속이 좁은 것은 별 상관없는 일 같기는 했다.
[본녀는 은자가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니라.] [얼씨구. 속 보이는 짓 하지 마요. 네가 유진 님의 어여쁨을 받으려고 아부하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요?]망토 안에서 메르와 라이미르아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즉시 둘과의 연결을 끊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힐긋 옆을 보니 크리스티나…… 가 아니라, 아니스가 눈을 얇게 뜨고서 유진을 흘겨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한 겁니까?”
“크흠…… 아무것도 아냐.”
설명하기에는 너무 구차한 감성이었다. 유진은 제복을 괜히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다리를 건넜다. 고급스럽고 폭신한 융단은 다리를 지나 항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실 이곳은 더 이상 항구라 할 수가 없었다. 본래 정박 중이던 배들은 모조리 다른 곳에 가버렸고, 관련 시설들도 밀려 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장에 하늘을 수놓던 빛들이 쏟아져 내리며 무수한 반짝임을 만들었다.
모든 함대에 다리가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다리를 지나지 않았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수천 명의 시선. 그리고 마중하러 나온 수십만 군중의 시선이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 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 이런 상황에서 그럴싸한 웅변은 베르무트가 도맡았었다. 그렇다 보니 유진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되는대로 내뱉었다.
“와아아아아아!”
대충 말했는데도 열렬한 환호가 돌아왔다. 군주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야수왕 아만이 함성을 질렀다.
아만과 가까운 곳에 있던 이바타와 원주민들은 함성뿐만 아니라 발을 구르고 몸을 들썩거리며 리듬을 만들었다. 신앙심 가득한 눈으로 유진과 크리스티나를 보던 교황이 양손을 치켜들었다.
촤아악!
도열해 있던 혈십자기사단 성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아롯 마법사들이 수놓던 하늘이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나부끼는 빛의 입자가 서로 엉기더니 깃털이 되었고, 하늘 높은 곳에서는 천사들이 나타나 성가를 노래하고 나팔을 불었다.
“꺄아아악!”
시민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던 멜키스도 양손을 펼쳤다. 탁, 탁, 탁! 양발이 탭댄스를 추었고, 그녀와 계약한 대지의 정령왕이 멜키스의 뜻을 실현했다.
지면이 파도치듯 출렁거리더니,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오브제들이 광장 곳곳에 나타났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유진은 멜키스 쪽을 흘겨보면서 수정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황이 움직였다.
유진은 화려한 지팡이를 짚고 백색의 망토를 끌고 오는 교황을 향해 대뜸 손을 뻗었다.
“나중에.”
“……?”
빛의 신교의 최고 지도자. 에우리우스 교황은 유진이 내뱉은 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저 무례한 제지를 두고서 불쾌한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유진 라이언하트. 그는 진정으로 빛의 신인(神人)이시다.’
예전에는 유진이 용사라는 것에 여러 의심을 품었다.
성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역대 존재했던 성인들 대부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교황 본인도 마찬가지도, 역대 교황과 추기경들의 몸에 새겨졌던 성흔부터가 모두 가짜이며, 역대 성녀들은 본질부터가 인조적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성녀는 다르다. 모조화신으로 만들어졌던 성녀에게는 진정으로 성령(聖靈)이 깃들었다.
교황청에서 성녀가 펼쳤던 8장의 날개야말로 빛이 보살피신다는 증거. 그리고 유진 라이언하트……. 그가 진정한 용사이자 빛의 신인이라는 것은, 마왕 토벌에 의해 증명되었다.
“알겠습니다.”
교황은 반문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빛의 신교의 최고지도자가, 고개를 숙이며 경어로 대답하고 뒷걸음질을 치는 것은 모든 군중을 경악시켰다.
‘저 여우 같은 늙은이가 왜 저러는 거야?’
황제는 교황을 힐긋거렸다.
‘설마…… 저 늙은이도 유진 라이언하트가 우둔한 하멜의 환생인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아무리 상대가 용사라 해도, 교황이 저렇게 깍듯하게 행동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도 황제는, 예전에 유진과 크리스티나가 교황청에 쳐들어가서 교황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귀싸대기를 갈겼던 적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유진에게 다가가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제국민이 세운 공을 치하하며, 군중들 보는 앞에서 친한 척 악수라도 나눌 생각이었는데…… 교황이 먼저 행동해준 덕에 황제는 망신을 피할 수 있었다.
아롯의 다인돌프 국왕과 호네인도 눈치껏 얌전히 있었다. 당연하게도 멜키스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끼아악! 멜키스는 양팔을 치켜들고서 유진과 세냐에게 날아가려 했고, 옆에 있던 로베리안과 히리두스가 기겁하며 멜키스를 붙잡았다.
유진은 그쪽의 소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곳에 모여 있는 라이언하트를 보았다. 어느새 옆에는 카르멘과 시엘, 디자이라가 와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라이언하트 쪽으로 다가갔다.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유진이 시무인에 온 것. 그리고 토벌대에 참가한 것. 그 모든 것은 본가에도 비밀로 했다. 본가 입장에서는, 평소 그랬듯이 저택을 떠났던 유진이…… 갑자기 남해에 나타나더니, 마왕을 죽였다고 알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본가를 놀라게 했었지만, 유진도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했다는 자각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라. 흑사자 성의 원로들에 얼굴도 잘 모르겠는 방계의 친척들. 본가에서 항상 봐왔던 백사자 기사단 전원에 수습 기사들까지 와 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길레이드가 엄한 표정을 하고서 유진의 말을 끊었다.
“유진. 너는 ‘죄송하다’고 말할 일을 하지 않았다.”
길레이드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소식을 들어 당황하기는 했다만…… 라이언하트의 가주인 나는,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구나.”
라이언하트는 위대한 베르무트의 후손이다.
“라이언하트의 피를 잇는 자라면, 용사가 아닐지라도 용사다운 일을 해야 한다.”
남해에서 각성한 마왕이 대화가 성립되지 않은 존재라면. 공존과 평화가 불가능한 존재라면. 토벌하는 것 이외에 답은 없다.
그 전투에는 반드시 라이언하트가 선봉에 서야 한다. 길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했고, 만약 먼저 소식을 듣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길레이드는 유진이 자랑스러웠다. 제멋대로 무모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이 한 행동은 용사로서, 그리고 라이언하트로서 옳았다.
“네가 가문의 눈치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길레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유진. 네가…… 유폐의 마왕에게 이름이 불려진 순간부터, 너 한 명이 라이언하트를 대표하게 되었다. 마왕이 널 용사라 인정한 순간부터, 라이언하트는 너를 위해 존재하는 가문이 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더더욱. 만약 유진이 바란다면 길레이드는 즉시 가주에서 물러날 것이다.
유진은 바라는 순간에 언제고 라이언하트의 가주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유진이 바란다면 라이언하트 전원이 무장할 것이고, 유진의 뜻을 이행할 것이다. 유진이 필요하다 판단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면, 라이언하트는 전장에 나설 것이다.
그 말은 가주만의 뜻이 아니다. 원로원주인 클라인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백사자와 흑사자 전원이 유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아득한 경의. 그리고 신뢰. 유진은 라이언하트 기사들에게서는 경의와 신뢰를 느꼈고, 유라스의 교황과 성기사들에게서는 신앙과 숭배를 느꼈다. 다른 나라의 기사들에게도 조금씩 감정이 번져가고, 경계선 바깥에 선 군중들에게서는 선망과 동경이 피어났다.
‘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백염식. 무수히 많은 별이 떠도는 우주. 그 깊은 곳에서 ‘빛’을 느꼈다. 자그마한 빛이 점점 커져가는 것만 같았다. 더디게 회복되던 신력(神力)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런 거였지.’
유진은 가슴에 얹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아버지, 제하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제하드의 호위를 맡은 라만이 감격한 눈으로 유진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은 길레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제하드에게 다가갔다.
아가로트였다는 자각이 생겼다. 하멜일 적의 기억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유진은 제하드를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응애’하고 울었을 때. 제하드가 어떤 눈으로 보았고, 어떤 떨림을 가진 손으로 갓난아기인 자신을 끌어안았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뜻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아기 시절에, 제하드의 품에 안겨 웃음소리를 듣던 기억이 선명했다. 병약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진은 괴로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당신들이 고대하던 자식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하던 생각마저 했다. 그런 주제에 ‘어머니’란 말을 불러주지도 못했다는 것이 괴롭고 죄스러웠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제하드는, 아직 요람을 벗어나지도 못한 유진의 작은 손을 잡고서 엉엉 울었다. 제하드는 새로이 부인을 들이지도 않고 갓난아기를 키워냈다. 어려서부터 자식이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고, 유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왜 그리 눈물이 많으십니까?”
그래서 유진은 제하드를 아버지라 생각하고, 아버지라고 불렀다.
“거참. 왜 맨날 우시나 몰라. 아들이 어디서 맞고 온 것도 아니고, 가주님이 말씀하시길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데.”
“그래서 우는 거다.”
제하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내게 걸맞지 않은, 잘난 아들놈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워서.”
“허.”
유진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제하드를 끌어안았다.
“아들이 잘났으면 아버지도 잘난 거지 뭘.”
진즉부터 유지는 제하드보다 키가 컸다. 유진은 아버지의 등을 몇 번 두드리다가, 앞을 보고서 흠칫 놀랐다.
애니실라와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똑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서 시엘을 보고 있었다. 양 눈동자의 색이 다르단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
길레이드도 입을 살짝 벌리고서 시엘을 쳐다보았다. 가족들의 시선을 느낀 시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떼었다.
“제 탓입니다.”
유진은 아버지를 놓아주고서 말했다.
“저를 지키다가…….”
“아,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움직인 거예요.”
시엘이 허둥거리며 말했다. 가장 먼저 놀람을 추스른 것은 길레이드였다. 그는 유진과 시엘을 번갈아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엘…….”
작은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걸음이 순간 휘청거렸고, 시안이 놀라서 애니실라를 부축했다. 하지만 애니실라는 고개를 저으며 시안의 부축을 거절했다.
애니실라 카이네스. 그녀는 라이언하트의 안주인이다. 라이언하트가 지금 시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애니실라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유진과 시엘에게 다가갔다.
“……따로 다친 곳은 없는 거니?”
“네, 어머니…….”
시엘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서로 다른 눈동자가 더욱 노골적으로 보였다. 애니실라는 손을 뻗어 시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시엘.”
애니실라 또한 무가 출생이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이어 온 군벌이며, 멀쩡하던 친척이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모습은 흔하게 봐왔다.
익숙한 것을 맞닥트릴 각오는 라이언하트에 시집을 온 순간에 이미 해놓았다. 무가에 시집을 온 이상, 언젠가는 그럴 만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였다.
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맞닥트린 현실은 애니실라의 가슴을 괴롭게 만들었다.
유진은, 시엘이 자신을 지키려다 저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럴지라도 애니실라는 유진에 대해서 한 점의 원망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시엘의 행동은 옳았다.
애니실라 본인이라도, 그 상황에서는 시엘처럼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움직여야 한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정말로 시엘처럼 움직일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내 몸을 희생할 수 있었을까?
“정말…… 자랑스러워.”
애니실라는 한쪽 팔을 펼쳐 시엘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유진, 너도.”
반대쪽 팔이 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은 화들짝 놀랐지만, 애니실라의 품에서 버둥거리지는 않았다.
유진은 시엘과 함께 얌전히 애니실라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