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usband Hates Me, But He Lost His Memories RAW novel - Chapter 84
84
이 편지 속의 ‘나’는 오웬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그야말로, 오웬이 바라던 이상적인 ‘릴리 에버렛’ 그 자체였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에버렛 가문과 오웬에게 충성을 다하는.
에버렛의 개나 다름없는 내가 그 편지 속에 있었다.
“하…….”
기가 막힌 나머지,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가짜 편지가 바로 시모어 부인이 테오도르에게 놓은 덫이었고.
그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든 테오도르는 나를 오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 1년 6개월 동안 나를 괴롭게 하고, 내 마음을 짓밟은 오해가…… 고작 이 편지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이해할 수 없다.
더더욱 테오도르를 이해할 수 없게 됐다.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냐고, 나에게 한 번쯤 물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이런 종이 쪼가리 따위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있지?
나는, 그의 관심 한 조각 얻으려 너무도 절박했는데.
그런 내가 당신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내가, 당신을 꾀어내려 수작을 부리는 걸로 보였을까.
그래서 내 선물도 불태워 버렸던 걸까.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편지를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려 했다.
너무도 모욕적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의 악의적인 협잡질로 나의 이미지가 비틀려 있었다는 게.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고 올라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마주 보았다. 그가 자못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편지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
테오도르의 얼굴을 툭 치고 떨어진 편지가 그의 손에 쥐여졌다. 방금 내가 발렌티노 공작에게 심한 무례를 범했다는 것도, 귀부인답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뒷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화를 내고 싶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에게 모조리 쏟아붓고 싶었다.
“어떻게…….”
가까스로 쥐어 짜낸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어떻게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
“그런 말도 안 되는 편지를 그대로 믿을 수가 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래? 나에게 한 번쯤은 물어볼 수 있었잖아. 이게 사실이냐고…… 당신이 정말 이런 사람이냐고…… 물어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잖아…….”
“…….”
테오도르가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는 마치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점이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이제 와 뉘우치기라도 하는 건가?
……차라리 나를 미워할 거면 계속 미워하지. 그럼 일관성이라도 있을 텐데. 그럼 당신이 ‘아, 정말로 나를 미워해서 그랬구나.’ 하고 납득하기라도 하지. 이건…… 이건 너무나 황당하잖아.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던 게…… 전부 오해로 인한 거였다고?
그래서,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내게서 그 말을 듣고 싶은 건가?
“내가…….”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에 흘리는 눈물조차 아까웠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 바라지 말아요.”
“…….”
“나는…… 정말로 멍청이였어. 그래도 최근엔 당신이 나에게 미안해하는 듯이 보여서…….”
그래서 마음이 조금은 약해졌었다.
앞으로 실행할 나의 계획에 그의 힘이 꼭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우리는 분명 공통점이 있으니까…… 예전처럼 그를 마음 깊이 애틋하게 여길 수는 없을지언정, 그와 좋은 아군은 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당신은 정말로 최악이야.”
“…….”
“그렇게나 올곧고 공명정대하다는 사람이, 왜 나에게만―”
“마님!”
그 순간,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시야가 점멸되어서 나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놀란 샬롯이 재빨리 다가와 나를 부축해 주었다.
샬롯의 품에 안긴 뒤에야, 나는 내 몸이 벌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모욕적이어서. 그리고 또, 너무나도.
상처를 받아서.
또다시, 이렇게.
“…….”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결국, 그는 나를 아프게만 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내 결정이 옳았다.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나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겠지. 불현듯 튀어나오는 과거에 손가락을 찔리듯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찻잔을 깨트렸던 게 아니었던가.
수습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당신이…… 정말 미워요.”
“…….”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졌다.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안쓰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냥, 더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겠지만, 최소 며칠간은,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
나는 샬롯이 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잠시 공황이 찾아왔었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들끓던 감정을 추스르고, 내 불행을 만든 원흉을 바라보았다.
‘시모어 부인…….’
치가 떨렸다.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게.
시모어 부인이 나를 악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저지른 만행이 비단 이 편지뿐일까?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그리고 발렌티노 성의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속삭였으리라.
릴리 에버렛이 어떤 악마인지, 무슨 목적으로 테오도르와 결혼해 이 성에 왔는지를.
……그러니, 다들 나를 멸시하고 미워했겠지.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내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나’라는 사람의 인상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세상에 이렇게나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역시 나는 시모어 부인을 용서할 수 없다. 비참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그녀가 더 비참해졌으면 했다.
‘솜니아.’
내 호명에 꿈의 정령이 깨어났다. 솜니아를 처음 보는 시종들은 놀라고 겁먹은 기색으로 주춤거렸다.
나는 주변의 반응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며 시모어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실성한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미친 꼴도 제법 봐줄 만하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차디찬 분노가 서린 음성은 섬뜩하리만치 스산했다. 나는 솜니아에게 내 의지를 전하며 말을 이었다.
“제정신으로 고통을 받는 편이 아무래도 더 낫겠죠.”
이미 망가진 정신을 돌려놓는 것쯤이야 솜니아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처럼 일렁이는 보라색 안개가 시모어 부인을 휘감았다.
잠시 후에 안개가 걷히고, 시모어 부인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초점이 없던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이채를 되찾았다. 이윽고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내게 고정된 두 눈이 악독한 빛을 띠었다.
새삼스럽지만, 시모어 부인이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가 실감이 났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작게 실소하며 물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떠세요?”
“너……! 네가 감히!”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인지나 돌아보시죠.”
“……!”
멈칫한 시모어 부인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가난한 평민도 입지 않을 듯한 매우 낡은 옷, 앙상하게 마른 몸과 더러운 손발.
그 모든 것을 차례로 내려다보는 시모어 부인의 얼굴에 충격이 번져나갔다.
그래, 충격적일 만도 하지.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는 부족해.
나는 시종에게 고갯짓하며 명령했다.
“시모어 부인께 거울을 가져다드리렴.”
“예? 아, 예……!”
시종은 못내 당황한 기색으로 꾸벅거리더니, 재빨리 홀 한편으로 달려가 커다란 전신 거울을 들고 왔다.
그 거울이 앞에 놓이자, 시모어 부인은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가 양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며 핏발이 섰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너……! 너, 네가 감히……!”
“아직도 당신이 발렌티노의 웃어른이라고 착각하시나 보군요, 아나벨라 시모어.”
“뭐, 뭐라고?”
“당신은 범죄자예요. 나를 독살하려 했잖아요.”
아나벨라 시모어는 살인미수죄가 붙은 사람이었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지하 독방에 가둔 것은 이 일이 외부에 새어나가게 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으리라. 하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그뿐만이 아니었죠. 당신, 실제로도 사람을 죽였더군요.”
나는 스윽 몸을 비켜, 리타 노먼을 아나벨라 시모어에게 보여 주었다.
즉시 리타를 알아본 듯, 아나벨라 시모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너는…….”
“…….”
아나벨라 시모어를 노려보는 리타의 두 눈이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리타를 향해 물었다.
“말해 보렴. 너는 이 여자가 어떤 처벌을 받기를 원하지?”
“……저는…….”
내가 저에게 질문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이던 리타가 이내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저희 가족들을 협박한 저 사람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면 좋겠어요.”
합당한 대가라, 그거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게 있다.
아나벨라 시모어 같은 사람에게는, 죽는 것보다도 훨씬 괴로운 일.
나는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왕국의 법대로 처리하세요, 발렌티노 공작 각하.”
“…….”
“설마 범죄자를 감쌀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길 바라요. 당신이 발렌티노의 가주로서 이 일에 진정으로 책임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당신은 절대로, 아나벨라 시모어를 어중간하게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 * *
이틀 뒤, 아나벨라 시모어의 처분이 내려졌다.
그녀는 중죄인으로서 고향의 노역장에 죽을 때까지 갇히게 됐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려고 왔어요. 이제 영영 못 볼 사이이니.”
“…….”
입에 재갈이 물린 아나벨라 시모어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눈빛을 보아하니, 나에게 미안한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는 모양이다.
이 지경이 되고서도 말이지.
나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비웃듯 던졌다.
“당신, 공작 부인이 되고 싶었죠?”
“……!”
바로 반응이 왔다. 아나벨라가 노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당신 언니를 질투한 나머지 선대 공작 부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고, 어린 테오도르를 꾀어내어 세뇌하려 했죠.”
“…….”
“선대 공작 부인이 아니라, 당신을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따르게 만들려고 말이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아나벨라가 마구 발버둥 쳤다. 그러나 두 손과 발이 묶인 채로는 더러운 흙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그런 당신의 치부와 잘못을 다 알고도 르네 발렌티노는 당신을 용서했어요. 심지어 자기 아들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죠.”
“…….”
“그런데 지금 당신 꼴을 봐요.”
나는 더욱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렸다.
“르네가 당신을 용서한 보람이 어디에 있죠? 계속 사람 사이를 이간질해온 데다,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
“당신은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뒤로 물러나며 하인들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곧바로 달려온 하인들이 아나벨라 시모어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우읍! 웁! 우으읍!”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진 여자가 추하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귀족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평민만도 못한 신세였다.
왕국의 법에 따라, 모든 권리와 신분을 박탈당했고 삭발된 머리에는 중죄인의 낙인이 찍혔다.
그녀에게서 더는 예전과 같은 영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발렌티노 성의 웃어른으로 군림했던 시모어 부인은 사라졌다.
마땅한 인과응보였다.
* * *
“발렌티노 가문이 미쳐 돌아가는 모양이네.”
첩자의 보고를 받은 오웬이 엷게 웃으며 읊조렸다.
막 그의 방에 도착해 있던 헤센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오웬이 재미있어하는 꼴만 봐도 빈정이 상했다.
“역시 릴리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발렌티노를 제대로 헤집어 놨네.”
과연, 파란을 몰고 다니는 릴리 에버렛답다며 오웬이 즐거워했다. 헤센은 그를 무시하며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 헤센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오웬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
“내가 왜?”
바로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오웬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야 넌…….”
은근히 조롱하는 기색으로 오웬이 말을 이었다.
“릴리를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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