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3_2
“내가 묻잖아, 뭐라고 했냐고.”
잘 관리된 뾰족한 손톱이 내 얼굴을 푹푹 찔러 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톱 끝을 아프게 세웠다.
“대답, 안 할 거야?”
그녀는 당장 대답하지 않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나는 안다. 대답을 하면 하는 대로 무언가 트집 잡아 괴롭힐 거란 걸.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야민 님.”
곧바로 표독스러운 눈빛을 거둔 카타리나가 가증스럽게도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카타리나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짧은 백발의 미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벤야민.
내가 이 지옥 같은 페르디난트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낡은 3층 방의 친구.
그리고 페르디난트의 젊은 주인.
수년 전,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얼마간 보이지 않던 그는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뭘 하고 있던 건가?”
어느덧 내 옆에 선 그가 카타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서리처럼 차가운 눈빛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카타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누구 마음대로?”
“이브 로웰린은 본래 제가 데리고 있던 종자였어요. 돌아가신 루돌프 전대 가주님께서 제게 선물해 주셨지요. 제가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갖게 된 걸 기념하여.”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네, 벤야민 님께서 이브를 제게서 억지로 뺏어 가셨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값을 치르지 못하셨고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의 처지를 설명하는 카타리나의 눈꼬리가 얄밉게 접혔다.
“그러니 이브 로웰린은 제가 빼앗긴 게 아니라 빼앗겨 드린 거지요. 저는 어서 벤야민 님께서 제게 정당한 값을 치러 주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정당한 값.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얻은 날, 루돌프는 그녀에게 원하는 선물을 고르라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견습 기사 신분의 어린 나였다.
알브레히트의 귀족들은 주종 계약 문서에 종속 마법을 거는 일이 왕왕 있었다.
시전 가능한 자가 많이 없어 아무나 하지는 못했다.
루돌프는 카타리나에게 마법이 걸린 주종 문서를 주었고, 그것은 새로 가주가 된 벤야민마저도 함부로 파기할 수 없었다.
오직 소유자가 생각하는 ‘정당한 값’을 치렀을 때에만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벤야민에게 제시한 ‘정당한 값’은 다름 아닌 황후의 자리였다.
벤야민은 그녀에게서 나를 빼내 오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비로소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은 오늘 테오도르가 페르디난트에 방문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테오도르 황제와 카타리나의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말도 안 돼. 테오도르처럼 천사 같은 애가 카타리나 같은 마녀와 결혼이라니.’
그러나 오늘 방문하기로 한 테오도르 황제가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만남이 무산되었다.
그래서 그 분풀이를 아랫사람들에게 하던 카타리나는 마침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나를 괴롭힌 거겠지.
나를 괴롭히는 건 벤야민에게 어서 빨리 ‘정당한 값’을 치르라는, 그러니까 어서 빨리 제게 황후의 자리를 달라는 경고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녀와 테오도르의 만남이 무산된 데에는 나의 탓이 컸으니, 카타리나가 나를 핍박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비록 그녀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한 번 더 같은 짓을 반복한다면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박탈할 것이다.”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벤야민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속삭였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만연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러실 수 없지요. 페르디난트에는 계집아이가 필요하고, 난 당신 아버지가 직접 골라 온 계집앤데.”
“아버지라, 고작 그따위 이유로.”
벤야민은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정말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네, 못 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힐끗 쳐다본 카타리나가 벤야민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귓속말을 속닥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순간 벤야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저 못된 카타리나가 나쁜 말을 한 것이다.
카타리나는 그대로 나와 벤야민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자 무척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카타리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그녀가 테오도르의 황후가 되는 건 싫었다.
“이브.”
이때 벤야민이 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들어 올렸다.
“손톱자국이 났네.”
내 왼뺨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의 두 눈이 느리게 찌푸려졌다.
“괜찮아. 어차피 흉도 안 질 텐데.”
“…….”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다물었다.
“정말 괜찮아.”
나는 애써 웃으며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었다.
벤야민이 지금도 나를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주고 있는지 안다.
주종 계약을 깨뜨리는 방법은 정당한 값을 치르거나 혹은 소유자를 죽이는 것뿐인데, 그렇다 하여 카타리나를 죽일 순 없지 않은가.
“난 지금으로도 충분히 네게 고마워. 그러니까…….”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그때까지도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벤야민의 손을 밀어내고자 할 때였다.
홰액-!
돌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아 당기더니, 그 위로 코끝을 묻었다.
“이브.”
“벤야민?”
“기분 나쁜…… 불쾌한 냄새가 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내 손목을 덥석 깨물었다.
“아얏.”
카타리나가 내 뺨을 찔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하얀 손목 위로 선연하게 남은 이빨 자국을 보며, 나는 그를 째릿 노려보았다.
“아프잖아, 벤야민! 미쳤어?”
그러나 벤야민은 대꾸하지 않고 의뭉스럽게 생긋 웃을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리려는 때였다.
“그런데, 이브.”
그가 내 옆으로 와 바짝 붙으며 물었다.
“낮에 어디 있었어?”
“응……?”
“찾아도 안 보이던데.”
“음, 뭐…….”
나는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해 주지 않자 그가 커다란 몸으로 내게 매달렸다.
“무거워. 저리 가.”
“싫어.”
그러나 그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 내 어깨 위로 제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귀찮게 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거리는 게 꼭 커다란 새끼 짐승 같았다.
‘이렇게 순해서야. 어떻게 페르디난트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나는 괜히 그가 걱정되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대 가주인 루돌프와 비교하면, 벤야민은 너무 착하고 순진했다.
“조금만 참아. 곧 널 빼낼 테니까.”
그 말에 문득 내 걸음이 멈추었다.
정당한 값.
그것을 떠올리자, 비록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로 웃던 낮의 테오도르가 뭉실 생각이 났다.
그는 오래전 기억처럼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나의 의문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풀렸다.
“안녕.”
전날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소리 없이 나타난 그가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널 데리러 왔어.”
테오도르.
그가 나를 데리러 왔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스라이 번져 나갔다.
* * *
평소와 다름없이 나무 위에서 무료하게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퍼뜩 놀라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삐끗거리는 내 몸을, 그가 부드럽게 붙잡았다.
한 팔로 내 허리를 낚아챈 테오도르는 나를 안고서 아래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잠시간 테오도르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퍼뜩 놀라 그를 밀어내고는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를, 왜요……?”
테오도르가, 나를?
왜?
설마 나를 알아본 건가?
쿵,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묻자, 그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이브 로웰린.”
그러나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나의 거짓 이름이었다.
“아직 서임식은 치르지 않은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 그대를 황제 직속 기사단에 영입하려고.”
뒤늦게 그가 나를 알아본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안도인지 혹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 안에서 솟구쳤다.
“그러니까, 왜 저를…….”
“그대의 기사로서의 솜씨를 보았어. 아주 훌륭하던데.”
“네? 제가요?”
순간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아니고……?
체르니시아의 성을 잃은 이후로,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제대로 검을 잡은 적이 없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응. 내게는 아주 뛰어난 안목이 있거든. 그대가 나를 지키는 검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들어.”
“하지만 저는 페르디난트의…….”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문제없지 않나?”
“…….”
물론 문제가 있었다.
나는 페르디난트의 소속이면서 동시에 카타리나와 주종 관계로 엮여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나는 망설임이 가득한 눈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그를 쳐다보았다.
반달 모양으로 휜 황금빛 눈동자는 차마 거역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어떡하지.
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비척비척 다가가려 할 때였다.
“이브.”
문득 나타난 벤야민이 나와 그 사이에 끼어들며 가로막았다.
화사하게 웃고 있던 테오도르의 두 눈이 내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얹은 벤야민의 손을 힐긋 쳐다보았다.
언제나 따사롭던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식어 갔다.
“페르디난트의 새 주인 아닌가.”
테오도르가 처음 듣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벤야민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벤야민이 뒤늦게 반응하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 황제 폐하.”
벤야민은 나를 뒤로 숨기며 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벤야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테오도르에게 인사했다.
졸지에 벤야민의 뒤에 숨게 된 나는 주위를 둘러싼 묘한 기류에 얼떨떨하여 두 눈만 끔뻑였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
“애석하게도, 그대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테오도르의 시선이 벤야민을 지나쳐 내게 닿았다.
딱딱한 금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둥글게 휘었다.
“이브 로웰린 경.”
테오도르는 물 흐르듯 유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홰액-
굵은 손이 예고 없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이쪽으로 와.”
“폐하……?”
그리고 내 몸이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 가는 동시에.
“안 돼, 이브.”
덥석-
반대쪽 팔이 벤야민에게 붙잡혔다.
“…….”
“…….”
“…….”
기이한 정적이 우리 세 사람을 감돌았다.
벤야민을 향한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무슨 짓이지?”
“폐하께서야말로.”
벤야민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일국의 황제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불손한 눈빛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이브 로웰린은 페르디난트의 기사. 아무리 알브레히트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이유 없이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브 로웰린은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으니, 정확히는 틀린 말이지.”
테오도르는 비식 웃으며 덧붙였다.
“황제 직속 기사단에 영입할 것이다. 이미 이브 로웰린 경에게 허락도 구했지.”
“네……?”
제가……요? 언제요?
당혹스러워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의 제안에 승낙한 기억은 없었다.
“정말이야, 이브?”
벤야민이 내게 물었으나 대답은 테오도르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브 경의 눈동자가 내게 그리 말하는 것을 보았다. 황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 뻔뻔한 대답에 나와 벤야민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이브의 허락을 구한 게 아니군요.”
“그렇다면 황명을 내리지. 나를 따라와라, 이브 경.”
테오도르가 왜 이렇게 갑자기 내게 집착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의사와는 별개로 나는 페르디난트를 함부로 뜰 수 없었다.
“불가합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로서 허락지 못합니다.”
벤야민은 내가 페르디난트의 소속이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카타리나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주종 계약서가 있는 한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땅히 값을 치르겠다.”
그래서 테오도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얽매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당한 값’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카타리나에게 황후 자리를 주는 것.
그것 외에는 카타리나의 주종 계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역시 불가합니다.”
이때, 벤야민의 단호한 거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그가 카타리나와의 계약을 발설할까 봐, 나는 못내 노심초사해야 했다.
비록 테오도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나의 비루한 신세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이어 꺼낸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이브 로웰린을 대신할 값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두 사람의 황당한 대치에 난처한 와중에도 조금 감동스러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감동을 받은 것은 나뿐인 듯, 테오도르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디난트의 젊은 주인은 욕심이 많군. 꼭 그대의 부친처럼.”
“폐하께서도 알아보셨듯이 이브 경은 뛰어난 실력자니까요.”
잠깐. 지금 그가 말하는 ‘이브 경’이 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부터 뛰어난 실력자였다고?
페르디난트의 이브 로웰린은 서임식도 치르지 못하고 나이만 차 버린 한심한 한량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이때, 내내 내 손목을 붙들고 있던 테오도르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대의 말마따나 이렇게 실력도 뛰어난 시해범을 그대로 둘 순 없으니…….”
일순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표정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섬찟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온화한 낯이었기에, 표정이 사라진 테오도르는 이제껏 내가 알던 이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었다.
그가 시린 눈동자로 나를, 그리고 벤야민을 쳐다보았다.
“이브 로웰린을 황제 시해범으로 구속할 것이다.”
황제 시해……?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테오도르가 허공 위로 손짓했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며 검을 겨누었다.
“시해범……?”
고개를 갸웃하는 벤야민을 향해, 테오도르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이브, 폐하를 죽이려 했어?”
벤야민이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 아니! 절대 아니야!”
나는 억울해 항변했다.
“억울합니다, 폐하. 저는 결코 그런 적이…….”
“나의 신하들이 모두 보았다. 그대가 내 머리를 겨냥하며 둔기를 투척한 것을.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해질 뻔했지.”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설마 사과 떨어뜨린 그거?
“그건 실수……!”
그때 분명 용서해 준다고 했으면서!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려던 찰나.
“그래, 그 작은 실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었지.”
테오도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황금안 속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나는 변덕이 심한 황제라서. 알브레히트의 젊은 폭군과 관련된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지?”
사르륵-
생긋 눈꼬리를 접어 내린 테오도르가 예쁘게 웃으며, 살벌하게 위협했다.
움찔, 떨리는 몸을 벤야민이 꼬옥 붙잡아 주었다.
가느다랗게 휜 눈매는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번득이는 안광은 진실로 상대를 집어삼킬 듯 섬뜩했다.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알브레히트의 젊은 황제를 향한 그 흉흉한 소문이 모두 사실인지도 모른다고.
어른이 된 테오도르는 내 기억 속 어린 그와 달리, 잔학하고 냉정한 폭군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이브 로웰린 경. 나는 한편으로 아주 자애로운 황제라서,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줄 수 있어. 그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협박……하시는 겁니까?”
“황제 시해범이 되어 목이 잘리는 건 싫잖아?”
“…….”
그는 내게 그를 해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협박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목이 잘리고 싶은 거야?”
“…….”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독특한 취향이 있네, 이브 로웰린 경.”
“아, 아니요!”
자칫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로 내 목을 벨 것만 같아서,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세상에 누가 목이 잘리는 취향 같은 걸 갖고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는 악랄한 카타리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나를 약해지게 만드는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다만 나는 내 거취를 결정할 권리가 없을 뿐이다.
벤야민을 힐긋 보았으나, 그는 나보다도 더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래도 이브 로웰린을 내게 보내지 않을 텐가?”
“그런 억지를 부리셔도 불가합니다. 이브는…….”
그가 나를 놓지 못하고 창백한 낯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타닥, 탁, 탁-
뛰어오는 구두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카타리나였다.
“폐하……!”
몇 발짝 거리에서 멈춰 선 그녀가 기묘한 대치 속 중앙에 자리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녀가 귀엣말로 무언가 속닥여 주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러나 이내 화를 꾹 눌러 참는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페르디난트의 카타리나가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그녀는 나와 벤야민은 보이지 않는 듯 테오도르를 향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예고도 없이 납셨다기에 달려왔습니다. 또 지난번처럼 엇갈려 뵙지 못하고 보내는 무례를 드릴까 봐요.”
그녀가 말끝을 늘이며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브 로웰린을 데려가러 오셨다고요.”
카타리나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테오도르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우아하게 웃으며 내게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죄송하지만 폐하, 이브 로웰린은 제 소유랍니다. 데려가는 것은 불가해요.”
테오도르는 자신을 막아서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못 들으셨나요? 이 애와 제가 주종 계약으로 묶여 있다고.”
“…….”
뚫어질 듯 물끄러미 응시하는 첨예한 눈빛에 카타리나의 두 뺨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그녀의 성질머리를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감탄하였을 만큼 수줍고 어여쁜 자태였다.
한참 뒤, 이내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