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22
모친은 여동생을 낳은 후 병으로 돌아가셨고 부친은… 차 사고였다고 했었나.
“고모님 얘기는 알겠어요. 그럼 연우재 씨는요? 그런 부탁을 하면서까지 날 도와주고 싶었던 이유가 뭔지 이제 말을….”
“당연히 옳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선뿐 아니라 그 집구석 인간들이 너한테 하는 모든 짓거리들이 다.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금만 유심히 봐도 모를 수가 없잖아.”
“연우재 씨가 그런 면에서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게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에게 빚진… 아니, 아냐. 그게 아니라 네가 잘 살았으면 해서.”
그는 서리가 내린 얼음물 잔을 쥐었다가 손을 떼어 냈다.
“씹. 이런 말… 낯간지러워서 못 하는데.”
해. 하라고.
나는 눈도 깜짝 않고 무언의 독촉을 가했다. 그 와중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너무도 궁금해 머리끝이 쭈삣 서는 것 같았다.
혹시 날 좋아한다는 말이면 어떡하지, 멋대로 넘겨짚으면서도 금세 미련을 떨쳤다. 저 나이의 남자가 플라토닉 러브를 할 것도 아니고, 섹스가 동하지도 않는 여자를 좋아할 린 없겠지.
“널 볼 때마다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 그 좆같은 집에서도 당장 나와 인간답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학대받는 고양이나 개를 보는 심정인 걸까. 연우재는 일단 입을 여니 거칠 것이 없어진 사람처럼 술술 말을 이었다.
“그게 정말 다야.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말도 다 진심이니까 네가 지금이라도 재고해 봤으면 좋겠고…. 네가 돌아가신 네 어머니 상속분을 되찾고 독립하고 싶다, 그렇게 말만 하면 돼.”
“복수는요?”
“…….”
“내가 당한 만큼 처절하게 짓밟고 갚아 줄 수 있나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연우재 씨가 짐작하는 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텐데요.”
그는 대답을 고심하듯 미간을 찡그렸다. 입술을 느리게 핥다가 지그시 깨물다가, 또다시 감쳐무는 행동이 초조해 보였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 압박을 가할 수는 있지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윤성일보는 수십 년에 걸쳐 온갖 탈세와 비리를 저질러 왔으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나팔수이자 박쥐 꼭두각시인 어용신문이란 비판을 암암리에 받고 있었다.
여러 메이저 언론사가 대두하면서, 현재는 2군으로 밀려났고 방송사 수익도 영업 적자를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라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사주 윤택근 대에서부터 쌓아 올린 인맥과 힘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동안 켜켜이 누적된 비리의 증거를 내보이지 않는 한, 윤성일보와 YS 방송사를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곧 그렇게 해 주겠다, 말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거야. 일가족 몰살, 그런 걸 원하면 절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연우재의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 순간만은 스물셋이 아니라 서른셋처럼, 세파에 찌들어 닳고 닳은 눈빛으로 보였다.
“그렇게 쉽게 보내 주는 건 억울하잖아. 강도에게 당한 불쌍한 희생자로 각인되게 하는 건 진정한 복수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먼저 그 집을 나와서….”
“때 되면 알아서 나올 거예요. 지금은… 준비가 부족해서 나갈 수가 없어요.”
“…….”
“이제 이 얘긴 없었던 걸로 해요.”
그의 호언장담에 가슴이 다시 욱신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송은효.”
“감사합니다. 맞선을 안 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나는 그가 뭐라 더 내뱉기 전에 재빨리 말을 막았다.
“그 집의 진짜 치부는 외부인이 알아내기 힘들 거예요. 일단은 졸업 전까지는 버텨 볼 작정이고요.”
반지하 벽난로를 통해 엿듣게 될 것들이 아직은 많지 않을까. 이를테면 금고를 둔 서재의 안쪽 방 비밀번호라든가. 비밀번호는 얼추 얻었지만 아직 장애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 참.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가정용 금고에 대해 잘 아세요?”
“금고? 어떤 게 궁금한데.”
나는 금고가 도착한 날 눈대중으로 봐 뒀다가 검색, 저장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비슷하네’ 그가 중얼거리며 사진을 살폈다.
“S사 프리미엄 제품 맞지? 외부 사이즈는 1120(H) X 625(W) X 600(D), 내부는 844(H) X 448(W) X 390(D)쯤 되겠는데.”
“그것까진 모르겠고….”
금고 제작 기술자처럼 숫자를 줄줄이 읊는 그의 콧대가 무척 가지런해 보였다. 시선을 조금만 내리깔아도 금세 분위기가 달라지는 얼굴이 새삼 신기했다.
“만약 비밀번호를 알면 그대로 숫자를 누르기만 하면 되죠? 혹시 실수로 잘못 누르면 바로 경찰과 연결된 보안 벨 같은 게 작동할까요? 보통 은행은 비밀번호 오류, 3번인가 5번까지는 괜찮잖아요.”
“이 정도 프리미엄 금고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그 방에 CCTV는 기본으로 달아 놨을 거고, 외부 내부 다 CAM이 있는 제품이라 접근하거나 문을 열기만 해도 영상이 자동으로 찍혀서 전송될걸?”
“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난도가 높구나. 하긴 시큐리티 기술이 발달한 만큼 금고도 그렇겠지.
“어디 있는데?”
“네?”
“그거.”
그는 내가 도로 가져간 휴대폰 화면을 턱짓해 보였다.
“윤 회장 서재?”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고의 존재를 이미 발설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 숨길 것도 없다. 내가 그 금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금고 안에 쓸모없는 것들을 꽁꽁 숨겨 놓을 린 없으니까요. 외부로 유출되면 치명적일 자료도 분명 있겠죠.”
그가 말했던, 유류분 반환 청구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돌아가신 엄마 유산도 그렇게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어요. 큰외삼촌… 아니, 윤부경과 추성희가 그렇게 만만한 인간들은 아니니까.”
또. 또 혀가 제멋대로 풀어지고 있었다. 말조심해야 하는데. 아무리 연우재가 그럴 리 없다 해도 그건 지금 생각일 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거였다. 사람 마음은 늘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긴 하겠지.”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아마 널 결혼으로 팔아넘길 집안에 혼수금으로 적당히 떼어 주지 않을까. 최대한 손해 보지 않게 그 대가로 돌아올 것들을 셈하면서. 대대로 속 시커먼 쓰레기들이니.”
그의 입에서 다시 씹,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 쓰레기 유전자가 흐르는 집안이니까.”
“…….”
“아, 넌 거기 포함 안 돼. 오해는 하지 마. 너 하나만은 서광재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인 거 나도 알아.”
“아무튼… 그 마음은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왜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직감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지금 연우재가 내미는 손을 잡을걸, 그냥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 의지했어야 했는데, 미래에 사무치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 돼. 아직은 아니야.
형용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의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쉬운 길을 두고 바보같이 먼 길을 돌아가는 오류가, 무모한 모험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는 차악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용기가 부족한 겁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를 미지의 문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고, 열고, 그리고 나아가는 게 두려웠다.
“널 정말 모르겠어.”
연우재가 불쑥 말했다.
“어떨 때는 대담한 것 같다가도 어떨 땐….”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에게 그만한 신뢰를 가질 명분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도 같았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미지의 문(門)이자 의문(疑問)의 대상이니까.
연우재가 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내 가엾은 배경과 부당한 처우 환경, 그리고 내가 복수니 뭐니 지껄이면서 드러낸 본심 몇 조각, 그게 다일 것이다.
그와 내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 속한 세계가 달랐고, 지금 연우재가 내게 보이는 호기심과 동정, 연민도 한시적인 감정일 따름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