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42
느리게 걷던 그가 불쑥 물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섬세한 옆선이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좋아하긴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해.”
예쁜 그림을 보면 예쁘네, 특이한 추상화를 보면 잘은 모르지만 멋지네, 딱 거기까지였다. 미술은 내게 경외의 영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권이결이 신기해 보이긴 했다. 전시회를 열 정도라면 진짜 프로 아티스트란 소리니까.
“춥진 않아?”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 왜. 네가 추워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추워하려야 추울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목도리에 코트까지 든든히 받쳐 입고 있는데.
반면 그는 니트 카디건에, 안에는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에, 훤히 드러난 목이 파르라니 창백해 보인다. 칠부 바지 아래 드러난 발목도 그랬다.
계절감이 모호한 차림인데도 무척 멋들어진 분위기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모델이란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체격도 체격이지만 그만의 독특하고도 세련된 스타일 때문이었다.
다시 침묵이 흐르자 손에서 땀이 났다. 오늘따라 대로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게다가 권이결은 걷는 속도가 꽤 느렸다. 어린애의 보폭에 맞춰 주는 것처럼 느릿느릿 걷는 품은 또다시 연우재를 연상시켰다.
“음…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나는 머릿속에 틈입한 남자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건물은 이쪽 구역 고도 제한 때문에 5층 이상 못 높이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에 혀를 깨물 뻔했다. 반면 권이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 조용히 웃었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 있어?”
“아니.”
“나도 궁금한 거 하나 물어볼게.”
마침내 좁은 골목이 끝나고 상점이 하나둘씩 보일 때 그가 불쑥 물었다.
“아르바이트는 그냥 재미로 하는 거야? 아니면….”
“돈 때문에. 독립 자금 모으는 중이야.”
나는 조금 주저하다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 이상 자세히 털어놓진 않았다. 과거, 연우재에게 복수니 뭐니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던 건 지극히 예외였다.
“알고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외삼촌 부부 집에 얹혀살고 있으니까.”
“아아.”
그는 짧게 답하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내 쪽에서는 그의 배경에 대해 아는 게 없음을 깨달았다. 서광재에 초대받는다는 것 자체가 보통 집안은 아니라는 의미겠지만, 그 외에는 백지에 가까웠다.
전에 윤진하가 뭐라고 했었지? 벽난로를 통해 엿들은 그와 추성희의 대화로는, 그동안 집안 간 교류를 피해 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했던가.
외부인에 대한 얘기였기에 녹음도 하지 않고 수첩에 따로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포르투갈 대사관저의 담벼락 넝쿨을 지나는 순간, 나머지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맞아. 무슨 부총재라던 부친이 최근 건강이 아주 안 좋고… 그리고 본거지인 일본으로 옮기거나 하나씩 멀쩡한 기업으로 전환한다고 했었어. 조폭이 기업형으로 탈바꿈하듯.
역시 조폭 집안인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창고에서도 그랬지. 약은 형이 담당한다고….
“가게 일은 어때?”
“어? 응. 조, 좋아!”
“힘들게 하는 손님은 없어? 특히 스윗 사이코 예약자들.”
“전혀! 가끔 말이 많은 분은 있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어차피 오프라인 주문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서늘해진 간담을 내색하지 않으려다 보니 불필요한 말로까지 이어져 버렸다.
“음, 뭐,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도 있는 거고. 다치지만 않으면야. 그리고 상대도 동의하면….”
“이해가 안 돼?”
그가 여상하게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그 세계 용어로는 바닐라(vanilla, 일반적인 성행위에서만으로 오르가슴과 만족감을 느끼는 비성향자) 쪽일 테니까. 아직 경험은 없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하나 더 물어볼게.”
온화한 음색에서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왠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연우재랑 무슨 사이야?”
나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권이결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손을 들어 살랑거리는 밤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드러난 귓불은 연우재의 것과 달리 말끔했다. 오히려 이어 드롭이 어울리는 건 권이결 쪽이건만 그는 손목시계 외엔 몸에 걸치는 게 없었다.
“어….”
“사귀는 건 확실히 아니고…. 사귈 뻔하다 헤어졌어?”
“그런 거 아냐. 그냥…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서 원래 알고 있었고 그날은…. 그날도 우연히 만나서 어쩌다 보니 차 마시고 얘기하다가… 군대 간다길래.”
어느새 변명처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다. 사귀는 건 확실히 아니라니,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했지만 그 부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걸 언급했다간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연우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연우재가 위험인물로 정의하고멀리 하라 경고했던 권이결과는 더더욱.
“아. 그렇구나.”
다행히 그는 더 캐묻지 않고 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발걸음을 뚝 멈췄다. 주위를 천천히 살피는 얼굴에 험악함이 스쳤다.
“왜… 왜 그래?”
“아냐. 고양이였나 봐.”
그는 날 선 시선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2초간 망설이다 앞장서서 걷는 권이결을 불러 세웠다.
“이안. 여기부터는 혼자 갈게. 저기 카페 화장실에 좀 들렀다 가야겠어.”
타이밍이 얄궂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생리 중이었고 버스에 타기 전 탐폰을 교체하는 게 좋을 듯했다.
“바래다줘서 고마웠어.”
권이결은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찬찬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가.”
돌아서는 등이 무척 넓었다. 그는 나른한 표범처럼 느릿느릿 밤공기를 뚫고 나아갔다. 나는 뒤돌아 도로에 면한 베이커리 카페로 들어섰다. 남의 영업장 시설을 그냥 쓰긴 미안해 캔디 한 팩을 사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섰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심장이 쿵, 떨어지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화장실의 불투명 유리창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거대한 거미처럼 매달린 형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헛것을 보는 건가, 눈이 휘둥그레져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사람의 얼굴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둘로 나뉜 창 윗부분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었고, 간신히 사람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올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그 창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바로 그 남자였다. 고시원에서 외무고시를 준비 중인 그 스토커!
나는 입술만 달싹일 뿐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부석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람이 길을 걷다 갑자기 맹수나 귀신을 목격하면, 꽁지 빠지게 달아날 여유도 없이 완전히 굳어 버린다는 게 이런 거였나.
“하, 우린 역시 운명이네요. 오늘따라 그쪽이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남자는 끙끙, 어떻게든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몸을 비틀며 웃었다. 안경 너머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여기저기 다 뒤져 봐도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지하에 그 성인용품 가게에서 일하더라고요? 응? 이름도 라라… 아주 잘 어울려.”
나는 재빨리 뒷걸음을 쳤다. 뒤로 손을 더듬다 문이 닿자 황급히 돌아섰다. 그때 남자가 유리창을 발로 ‘쾅!’ 찼다. 거대한 거미가 창을 가격하는 것 같았다.
“야! 어디 가!”
깜짝 놀라 문고리를 잡고 당기려는 순간 그가 뒤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너 한국대학 심리학과 1학년 맞지? 어? 이름은 송은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