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52)
156화. 입장 정리 (2)
이후.
한동안 월향과 철면개의 설명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강호 전체에 창궐한 녹림, 그리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 혈교의 세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 방의 장로들을 위시한 제자들이 벌써 몇 년 전부터 정파무림 각지의 산을 이 잡듯 뒤지며 놈들을 쫓았지만… 기실 꼬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소.”
“저희 쪽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네요. 자세한 부분을 전부 말씀드리기는 조금 어렵지만… 중과부적이라고 할까요?”
“…….”
놈들은 꼬리 자르기에 능했다.
또한 제아무리 개방과 하오문이라고 한들 현 무림의 정세 하에서 마냥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이었지. 호남무림에서 정사 간 충돌이 발생한 것이 말이오.”
“……!”
양호명, 그리고 호남 사파 세 고수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기실 놈들의 배후를 쫓기에도 바쁜 터라 섣불리 개입하기에는 어려웠소만… 마냥 ‘관계가 없는 일’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오.”
철면개는 부랴부랴 호남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세력의 중재과정에서 ‘비룡대주 이벽’이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을 발견했다.
채 약관조차 되지 못한 후기지수.
허나 하오문 수호대의 지원과 동시에 사패련의 신설 무력대주란 직함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비무 과정에서 철면개는 그 후기지수가 무려 절정 이상의 실력을 감추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이에 철면개는 발 빠르게 윗선에 보고를 올렸고, 소림에 머무르던 개방주 취풍신개가 큰 흥미를 보였다.
사패련주와 하오문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 강호초출의 후기지수라는 신분은 그 자체로 움직일 명분이 된다.
이내 개방은 그 이름을 빌려 음지에서 이뤄지던 추적을 양지의 영역으로 끌어내고자 하였고, 하오문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개방과 하오문.
부분적으로나마 정사 간 녹림의 뒤를 쫓는 두 세력 간 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허나.
“그 또한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지만요. 아하하…….”
비룡대가 정파에 상륙함과 동시에 의혈맹이 달라붙었다.
의혈맹주 권왕 황보혁은 기다렸다는 듯 이벽에게 추포령을 내렸고, 이내 온갖 세가의 무인들이 늑대 무리처럼 이벽을 물고 늘어졌다.
급기야는 오대세가마저 나타났다.
가는 족족 달라붙는 이들을 상대하고 물리치느라 정작 혈교의 추적은 제대로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 비룡대주와 무슨 원한을 진 것도 아닐진대, 마치 ‘일부러’ 추적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듯했소.”
철면개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렇군.”
공손욱이 답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암영각 측은 이미 전후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있었던 듯했다.
물론, 공손수가 비룡대의 일원인 이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어.”
반면 호남 사파 세 문주의 얼굴에는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혈교라니. 백 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오니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소만.”
그때, 양호명이 말했다. 그 역시 호남 사파의 문주들과 표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허나 사실이오.”
이벽이 답했다.
“놈들을 추적하지는 못했소만, 오히려 놈들에게 덜미를 잡힌 적은 있소. 일전에는 ‘살아있는 시체’들과 싸움을 벌였지.”
“……!”
양호명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 역시 그러한 사술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섣불리 받아들이기에는 과하게 허무맹랑했다.
허나 이벽의 표정은 진지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정도맹에서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
그때 송영영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야.”
휙, 양호명이 시선을 돌렸다.
송영영과 파진성, 공손수, 그리고 호남 사파의 대제자들은 저만치 한켠의 탁자에 따로 둘러앉아 있었다.
“알아버리면 나서야 하니까. 그 대신 눈 감아버리면 일이 간단해지지. 우리 장문인, 좀 음흉한 구석이 있거든.”
“…커험! 그게 무슨 삿된 말씀이오? 아무리 소저라고 한들 함부로 맹주님의 뜻을 곡해하는 건—”
“무당뿐만이 아냐. 점창이고 화산이고 수염 긴 영감들은 다들 알고 있을걸?”
“…….”
양호명은 다시 말을 이으려 했으나, 곧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마음 한켠에서 자초지종이 이해돼버렸기 때문이었다.
의혈맹이 나서지 않는다면 정도맹 역시 나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림마저도 나서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 적보다 위험하다.
양호명의 표정이 서서히 복잡해지자 그 내심을 짐작한 듯 철면개가 씩 웃었다.
“뭐, 상황이 그러하니 소리 없이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했었지.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 개방의 입장이고, 하오문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더군.”
“…….”
복잡한 침묵이 감돌았다.
“양 문주, 묻고 싶은 게 있소.”
철면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것은 퍽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소만… 일전에 정검문은 무적파를 비롯한 호남 회화의 사파를 선제공격하지 않았소?”
그것은 갑작스런 이야기였다.
일순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것은 사실과 다르오.”
양호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정검문을 비롯한 정파 측에서는 사마외도로 추측되는 무리의 습격을 받았고, 이에 정당한 반격에 나섰을 뿐이오.”
타앙!
채무근이 발을 굴렀다.
“양가 네 이놈! 이 마당에 와서 아직도 그딴 소릴 하느냐! 습격은 얼어 죽을, 죄 다 네놈들이 멋대로 꾸민 일이 아니더냐!”
“…….”
양호명이 채무근을 일견했다. 허나 곧 다시 철면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래, 이제 와 뭘 숨기겠소? 우리가 호남 땅으로의 진출을 노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허나 그렇다 한들 제자들을 상처입히면서까지 억지 명분을 만들 만큼 치졸하지는 않소.”
“…….”
“어차피 본문의 가르침을 베풀면 재능있는 이들은 자연스레 정도에 이끌리게 되어있거늘, 왜 구태여 그런 짓을 하겠소?”
“이노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자, 자, 우선은 침착하시오, 채 문주. 모처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이 아니오? 내 생각에는 말이오.”
채무근이 언성을 높이며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려던 찰나 철면개가 황급히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때, 정검문을 비롯해 호남의 정파 세력을 습격한 ‘사마외도’ 말인데… 아마 우리 개방이 쫓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싶소.”
“……!”
철면개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솔직히 그때는 확신이 없었소만… 말했잖소? 꼭 관계가 없는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 * *
호남에 자리한 군소정파들은 일제히 습격을 받았다. 적들은 마치 광인과 같았으나 동시에 일사불란했다.
목적은 불분명했다.
흉수들은 그저 바람처럼 나타나 허를 찔러 일정 수준의 피해를 입힌 뒤, 빠르게 사라졌다.
사로잡힌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정보를 캐내지는 못했다.
“사용한 무공이나 상태로 미루어 사파의 소행이라 짐작했겠지. 그야 양 문주나 여타 정도무파의 입장에선 합당한 판단이었을 거요.”
“…쯧.”
양호명이 혀를 찼다.
곧장 떠오르는 의문을 짚었다.
“이야기가 너무 급작스러워 따라가기가 좀 버겁소만… 우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왜 이제서야 말을 하는 거요?”
“말했잖소? 그때는 확신이 없었다고. 섣불리 혈교 같은 소릴 지껄여봤자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었겠지. 사실 심증뿐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요.”
“…….”
“허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 정도는 싹 튼 상황이 아니오?”
흘끗, 철면개가 이벽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들께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듯, 나 역시 비룡대주를 위해 목숨 걸고 모여주신 여러분들을 믿소. 설마 이 중에 혈교의 끄나풀이 숨어있지는 않을 테고 말이오.”
“……!”
둘러앉은 일행은 무심코 서로를 돌아보았다. 양호명과 채무근의 시선이 부딪힌 순간, 서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요.”
잠시 후, 우진희가 말을 꺼냈다.
“우선은 걸개께서 하신 말들이 모두 맞다고 해도… 혈교 씩이나 되는 것들이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다는 거죠?”
습격의 이유.
그것은 퍽 타당한 지적이었다.
철면개의 표정이 작게 흔들렸다.
“…아마도 정사 간 이간질을—”
“그러니까 대체 그런 짓을 해서 혈교 놈들이 얻는 게 뭐냐구요?”
“…….”
철면개의 말문이 막혔다.
우진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정파뿐 아니라 흑천방의 소행을 의심했답니다.”
“…흑천방? 어째서요?”
이번에는 철면개가 되물었다.
생각지 못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야 뻔한 노릇이죠. 그때, 사패련을 대표한답시고 나타났던 흑천방의 그 개자식. 우릴 돕기는커녕 대놓고 호남을 정파 측에 넘겨주려 했잖아요?”
“…….”
이벽은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그러고 보면… 정사 간 협상의 자리에서 사파 측 상석에는 흑천방의 무인인 맹상태가 앉아 있었다.
허나 그는 호남 무림의 갈등은 사적인 문제로, 사패련은 일절 관여하지 않겠노라 멋대로 선을 그었다.
오히려.
련의 방침 운운하며 사파 측을 두둔하던 이벽의 입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사전 협의를 통해 흑천방이 정파를 치는 시늉을 하면, 그걸 빌미로 삼아 정파가 우리를 쳐서 호남을 빼앗는다… 어때요. 꽤 그럴싸한 이야기 아닌가요?”
“…쯧, 얼토당토않군.”
양호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우진희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뭐, 사태가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물어뜯는 이가 있다면… 의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
그것은 일견 타당한 이야기였다.
이벽은 문득 공손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공손수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호남 무림은 과거 패왕가의 영역이므로 흑천방은 아예 호남 무림을 통째로 정파에 넘겨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과거 공손수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것은 지금 우진희가 하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허나.
“…이거 꽤 기분이 더럽군.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더러운 음모 따윈 꾸민 적 없소. 뭐가 아쉬워서 우리가 흑도들 따위와 음모를 꾸민단 말이오?”
“…….”
양호명이 힘주어 말했다.
이벽은 그를 바라보았다.
내심 그 말을 믿어주고 싶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표정이나 분위기만으로 섣불리 두둔할 수는 없다.
허나 그때였다.
“뭐, 안 했다면 안 한 거겠지. 나는 정검문주의 말을 믿소.”
양호명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잠자코 있던 적사파의 문주 전사욱이었다.
“저, 전 문주? 어째서……?”
채무근이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전사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시오. 어찌 되었건 우리 셋 모두, 이번 남궁세가에서 정검문주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소?”
채무근의 표정이 흔들렸다.
말마따나 세 사람은 남궁세가의 장로들을 상대로 퍽 고전 중이었다.
허나 그때, 양호명이 가세했고 어찌어찌 큰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돕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한둘은 꽤 크게 다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검문주는 그 틈을 타 호남을 다시 노려볼 수도 있었겠지.”
“…….”
“허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소. 그러니 이 자리에서 하는 말 정도는 믿어줘도 괜찮을 거요.”
“…핫.”
양호명이 코웃음을 쳤다.
“거 고맙군, 그래. 금강회의 사파들 중에도 생각할 줄 아는 머리가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오.”
“또한.”
전사욱이 말을 이었다.
“설령 암중 모략이 있었다고 해도, 당시 정파 측을 대표하던 당사자가 정검문주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 그렇지 않소?”
“……!”
“…숭무관주 남궁천수.”
우진희가 침음했다.
허나 그때 철면개가 끼어들었다.
“자, 잠깐. 한창 말씀 중에 죄송하오만… 그들이 흑천방의 무인일 리는 없다는 게 우리 개방의 판단이오.”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한 논의를 끊어내듯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야 결정적인 증거는 없소만… 마치 광인과 같다던 그자들의 특성이나 동선 모두, 우리가 쫓고 있던 이들과 일치하오.”
“…하지만 놈들에겐 얻는 것이 없잖아요? 보아하니 그리 큰 피해를 주지도 못한 모양이던데.”
우진희가 다시 반박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겉돌기 시작했다.
“…….”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이벽은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호남 정사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던 정파 측 습격자의 정체는 이제 와서 갑자기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허나.
“잠시.”
이벽이 말을 꺼냈다.
“딱히 근거는 없소만… 걸개와 여러분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묘한 생각이 드오.”
“비룡대주, 무슨 말씀이시죠?”
우진희가 되물었다.
양측의 시선이 모두 이벽에게 집중되었다. 이벽은 장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간단한 얘기요. 즉, 우 문주님과 걸개의 말이 양쪽 모두 틀리지 않았다면… 흑천방과 혈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지 않소?”
“……!”
“뭐, 뭣이라?!”
일순 장내에 충격이 번졌다.
철면개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 그런 건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정황에 불가하니까 말이오.”
“…핫.”
양호명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사파 나으리들, 갈수록 점입가경이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