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13)
219화. 스승과 제자 (2)
‘왜 생각하지 못했지?’
이벽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목천의 영역이란, 선천의 힘으로 상단전을 활성화함으로써 접어들 수 있는 독자적인 시간의 흐름이다.
생각의 속도를 마음의 그것과 일치시킴으로써, 삼라만상이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심즉사(心卽思)의 영역에 접어드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선천의 힘을 다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무공을 쓸 것도 아닌 바에야 굳이 내력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
모래알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그것은 검이 아닌 낚싯대를 쥐고도 스스로가 여전히 검과 무공이란 틀 안에 묶여있었다는 의미였다.
부르르.
기분 좋은 떨림이 몸을 스쳤다.
그리고 이벽은 다시 이진천을 돌아보았다. 개울가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모습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스윽.
이벽은 눈을 감았다.
깨어진 단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내력의 고리를 풀자 선천의 힘이 서서히 가라앉으려 했다.
덥석.
이벽은 그 갈피를 붙들었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단전으로 통하는 길은 물론 이미 열려있었다. 과거, 이벽은 몇 번이고 그 길을 따라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허나.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여있으며, 더듬어 올라가는 과정은 더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고로 믿을 것은.
심신에 새겨진 기억. 그리고.
‘…타고 오를 ‘사다리’가 있다.’
이벽은 ‘더는 펼칠 수 없게 된’ 목천의 기예들을 하나씩 되새겨보았다.
쾌보를 생각했고.
화영검무를 생각했다.
또한 맹철극의 뇌기를 받아쳤던 팔절구궁필법 최후의 초식, 잔월을 생각했으며.
선우세가의 비전.
창공비검을 생각했다.
움찔,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땅에 떨어진 이후, 사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감각은 이벽의 몸 곳곳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웅.
이내 선천의 힘이 알았다는 듯 작게 진동했다. 그리고 가슴과 목을 타고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과 동시에 이미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어 있던 과거를 생각하면 답답할 만큼 느린 과정이었다.
허나.
‘초행길’이란 으레 그런 것이다.
이벽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는 선천의 힘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우우웅.
마침내 상단전에 똬리를 틀었다.
그 순간, 퍽 익숙한 두통과 함께 귓가에 짧은 이명이 스쳤다.
그리고 흡사 물에 젖어들 듯 시간이 축 늘어지는 감각이 일었다.
“…….”
이벽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근 사 년 만에 느껴보는 목천의 흐름은 퍽 반갑게 느껴졌다. 슥, 이벽 마침내 눈을 떴다.
움찔.
허나 그 순간.
이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며드는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하마터면 도로 눈을 감을 뻔했다.
‘…뭐지, 이건?’
이벽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물론 개울물이었다.
허나 물가 위로 부서지는 햇빛은 너무나 밝아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콰르르르.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느릿하게 흐르고 있을 뿐인 물줄기의 소리가 마치 폭포처럼 거칠게 다가왔다.
또한 물의 냄새는 비릿했으며, 피부 위로 와닿는 물방울의 감촉은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이벽은 당황했다.
그것은 마치.
오감이 몇 배나 예민해진 듯했다.
‘너무 오랜만이기 때문인가?’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허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으나… 분명히 무언가가 과거와 달라졌다.
그저 시간 감각이 느려졌을 뿐인 과거와는 달리, ‘모든 감각’이 목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빛은 더욱 선명하고.
향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래, 눈을 떴느냐 막내야?”
그때 이진천이 말했다.
“기분은 좀 어떻더냐? 마치… 처음 눈을 뜬 갓난아이 같은 기분이지 않느냐?”
“……!”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뭐, 내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땐… ‘조금 다른 게’ 보일 거라고 말이다.”
사 년 전, 이벽에게 ‘땅에 떨어질 것’을 제안했던 이진천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훅, 이벽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이진천을 향했다. 그리고.
찌이잉.
그 순간 강렬한 두통이 일었다.
그것은… 오감을 타고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진천은.
여전히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허나 이벽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흔들.
바늘이 흔들렸다.
그 순간 낚싯대에는 미세한 힘이 가해졌고, 이내 유려하게 춤을 추듯 물가를 휘저으며 물고기를 유인했다.
덥석.
마침내 실이 팽팽해졌다.
훅, 그 순간 낚싯대가 구부려졌고 이진천의 몸 곳곳에서 모여든 힘이 낚싯대를 일거에 끌어 올렸다.
촤아앗.
또 한 마리의 물고기가 낚였다.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시간 속에서는 현기증이 일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무공이 아니었다.
허나 동시에.
‘청강유엽검식.’
묘리는…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내력도 없이, 심지어는 검조차 없이, 이진천은 그저 육체의 힘만으로 여섯 묘리의 정수를 오롯이 활용하고 있었으며.
물은 그 흐름에 화답했고.
물고기는 번번이 낚여 들었다.
“어때?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부르르.
이벽의 손이 떨었다.
과거, 이진천은 무림 바깥으로 심부름을 보내기 전 이벽에게 창공비검을 보여주었고.
마침내 이벽은 그 힘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내력도 없이 육체의 힘만으로 펼쳐지고 있는 청강유엽검식의 묘리는… 또다시 이벽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듯했다.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사 년 전, 자신의 창공비검이 이진천의 창공비검에 맥없이 패배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부르르.
무공에 소홀해 왔던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이벽은 전율했다. 그리고 이진천의 모습을 눈에 새기고, 또 새겼다.
찌이잉.
뇌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휙.
이벽의 낚싯바늘이 던져졌다.
개울물의 한가운데에 가라앉았다.
‘물고기의 마음을 읽는다.’
그리고.
낚싯대가 묘리를 품기 시작했다.
허나 곧 이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자신이 지켜본 이진천의 동작에 비하면 너무도 어설펐기 때문이었다.
내력의 도움을 빌릴 수 없으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청강유엽검식의 묘리는… 갓난아이의 첫걸음처럼 난해하게 느껴졌다.
주륵, 이마에 땀이 흘렀다.
팔다리가 흔들렸고, 목천의 영역이 오래 지속되자 고양된 의식이 서서히 멀어질 것 같았다.
꿀꺽, 이벽은 침을 삼켰다.
흐트러진 시간 감각 속에서 움켜쥔 낚싯대와 함께 몸과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덥석.
그리고 문득.
손끝에 감각이 와닿았다.
무언가가 낚싯바늘을 잡아당겼다.
‘놓쳐선 안 된다!’
이벽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와의 대치를 시작했다.
찰랑.
흔들리는 낚싯바늘이 물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과거 무림의 수많은 강자들과 부딪혔던 모든 기억들이 이벽의 머릿속을 일거에 스쳐갔다.
물러설 수는 없다.
이벽은 낚싯줄을 풀어주고, 당겼다. 물고기와 씨름하며, 서로의 힘을 견주었다.
땀이 흐르고 손이 저려 왔다.
허나 밤하늘 저 멀리에 떠 있다고 생각했던 별이 어느덧 눈앞의 개울에 내려와 있었으므로, 포기하지 않았다.
촤앗.
그리고.
직감이 번뜩인 순간.
이벽은 힘껏 낚아 올렸다.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잡았습니다!”
번쩍, 이벽은 낚싯줄을 들어 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허나.
“…어?”
다음 순간, 당황했다.
바늘의 끝에는… 고작해야 손가락만 한 피라미가 걸려있었다. 풀썩, 힘이 빠진 이벽이 무심코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상단전에 자리한 선천의 힘이 사그라들었다. 이벽의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핫. 장하구나.”
그때 이진천이 웃었다. 그리고.
슥슥.
“잘했다, 내 제자.”
손이 뻗어졌다.
이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이벽은 머쓱해졌다.
고작해야 피라미 한 마리를 낚는 데에 그렇게나 많은 진력을 쏟아내었다.
허나.
이진천의 웃음은 따뜻했고, 거짓이 아님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내 이벽의 입가에도 웃음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움찔.
머리를 쓸던 손이 동요했다.
“…됐다, 이놈아. 다 큰 사내자식이 스승은 무슨… 손발이 오그라든다.”
“…….”
문득 이벽은 옛일을 생각했다. 과거, 이벽은 구배지례를 허락받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진천은 스스로 ‘문주님’과 ‘스승님’의 애매한 경계 사이에 머무르고자 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퍽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이진천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이벽에게 있어 이진천은 생명의 은인이며, 낙검문의 문주임과 동시에 이미 검과 삶, 그리고 낚시의 스승이었다.
“뭘 그렇게 보냐 이놈아.”
꽁, 이진천의 주먹이 이벽의 정수리를 찧었다. 험, 그리고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객쩍은 소리는 됐고…. 앞으로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땐 네 사형제들과 우리 속가제자들의 고기반찬은 네가 책임져라. 알겠지?”
“네, 스승님.”
꽁.
주먹이 다시 정수리를 찧었다.
* * *
이후, 보름가량이 흘렀다.
이벽은 내내 낚시에 열중했다.
물론, 수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물고기는 번번이 바늘을 피해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한나절을 온전히 쏟아부어야 한두 마리 건지는 게 고작이었다.
허나.
이벽은 그마저도 즐거웠다.
하룻밤처럼 흘러가 버린 지난 사 년의 시간은 분명 나쁘지 않았다. 허나 무언가를 배우고 열중한다는 것, 그리고 나날이 조금씩 나아져 가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쁨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낚싯대와 바구니를 맨 채 이벽은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빠.”
“……!”
허나.
저무는 햇빛 아래, 마을 어귀에서는 낯익은 인영이 이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왕수련이었다.
“어딜 갔다 와요?”
“…낚시를 좀 했다.”
왕수련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눈매는 부드러웠으나 새초롬했다. 이벽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요새 왜 나 피해요?”
“…피한 적 없다.”
“거짓말, 지금도 눈 피하잖아요.”
“…….”
그것은 조금 달랐다.
단지… 근래 들어 부쩍 자라나 버린 왕수련을 대하는 것이 조금 어색해진 탓이었다.
“얼마 전에 오빠의 입관 기념이라고 화전 부쳐 먹은 이후부터… 계속 그러잖아요.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요?”
저벅저벅.
왕수련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말해봐요. 또 무슨 고민이에요?”
“딱히… 그런 건 없다.”
“…….”
왕수련의 눈매가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문득 이벽은 제갈소미의 그림자를 느꼈다.
“…이걸 주마.”
이벽은 얼른 바구니를 내밀었다. 안에는 그리 크지 않은 물고기가 두 마리 담겨있었다.
“뭔데요, 이게?”
“…힘들게 낚았다.”
“…….”
잠깐의 침묵이 스쳤다.
푸훗, 왕수련이 작게 웃었다.
“어쩜, 예나 지금이나 오빠는 한결같네요. 사람 애타게 하고 선물로 해결 보려 하고…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여요?”
“…….”
애로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고마워요. 주는 거니까 잘 받을게요.”
왕수련이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이벽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덥석.
당연하다는 듯, 왕수련이 팔짱을 꼈다.
“낚시건 뭐건, 다음에는 나도 같이 가요. 알았죠?”
“…….”
이벽은 난처했다.
물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남녀의 일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이벽에게 있어 그 어떤 신공절학보다도 난해한 공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행여나 잘못 손을 대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낼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훗. 좋구나 좋아~”
허나 그때였다.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문주님?!”
왕수련이 당황하여 외쳤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역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기대고 누운 이진천이 있었다.
“후훗~ 젊음이 좋지, 암!”
탓.
이진천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뭐예요?”
“아니 뭐, 별 대단한 건 아니고 말이다~ 딸꾹!”
이진천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있었으며, 얼굴은 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근래에 들어 술을 마시는 이진천이 마을 곳곳에서 목격되었으며, 딱히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었다. 허나.
“…….”
이벽은 더욱 난처해졌다. 그리고 이진천의 입을 막아야만 할 것 같다는 직감이 스쳤다. 허나.
“막내야, 그리고 수련아.”
한발 늦고 말았다.
이진천이 태연하게 말했다.
“슬슬 날 잡아도 되지 않겠냐?”
“네, 네? 그게 무슨……?”
“아니… 딸꾹! 너희들 붙어 다니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도 이상할 건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