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14)
220화. 낙검문의 밤
“…….”
침묵이 내려앉았다.
꿀꺽, 이벽은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만 한다.
허나 이러한 분위기를 대체 어떤 말로써 감당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 문주님? 나… 날을 잡다뇨? 그, 그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아하, 아하하!”
그때, 왕수련이 말을 받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두 팔을 휘저으며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애를 썼다. 허나.
“으응? 무슨 소리냐니? 당연히 너희 둘의 혼례 얘기지. 달리 날 잡을 게 뭐가 있겠느냐?”
“…에.”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침내 왕수련조차 말문이 막혀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왜 그러냐, 둘 다? 혹시 돈이 걱정이냐? 그런 건 너희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란다. 딸꾹!”
퍽 취기가 오른 듯, 얼큰한 안색의 이진천은 오늘따라 말에 거침이 없었다.
“수련아, 내가 이래 봬도 너희 아버지랑 동업자 아니냐? 사돈끼리 약초 캐고 약 팔아서 그 정도 돈은 어떻게든… 꽥.”
뻐어억.
그렇게.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던 그때였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이진천의 고개가 훽 꺾여 들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비도의 자루 부분이 이진천의 머리를 두드린 것이다.
풀썩.
이진천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이… 미친 인간이 뭐래는 거야!”
저만치에서 제갈소미가 외쳤다.
집어던진 비도를 회수하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벌써 노망이 났나! 술 처먹었으면 곱게 들어가 잠이나 퍼 잘 것이지, 왜 애들한테 주접이야 주접은!”
“…사저.”
이벽은 크게 안도했다.
뿔이 난 표정의 제갈소미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쳇.”
그때였다.
왕수련이 불현듯 혀를 찼다. 휙, 이벽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왕수련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왕수련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
“아, 아하하! 저, 저, 저는 오늘은 이만… 먼저 집에 가볼게요, 오빠! 담에 봐요!”
타다닷.
그리고 왕수련이 달려갔다.
마을 안쪽으로 황급히 멀어졌다.
“아하하… 문주님, 오늘은 약주가 좀 과하셨어요. 제가 처소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그리고.
제갈소미의 등 뒤에 붙어 함께 다가서던 혁대웅이 이내 앞으로 나섰다.
널브러진 이진천을 일으켰다.
“끄응…….”
비틀대며 일어난 이진천이 머리를 문질렀다. 달아오른 시선이 제갈소미를 돌아보았다.
“…왜요? 뭐 불만있어요?!”
“아니 저기… 소미야.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 내가 뭐 못 할 말을 했냐?”
“이 인간이 그래도—!”
“애들이라니… 막내도 수련이도 이제 마냥 ‘애’는 아니잖냐?”
흠칫.
그 순간, 드물게도 제갈소미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비단 막내한테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너희 둘도 똑같아. 어느덧 약관도 넘긴 녀석들이… 인생에 뭐가 정말로 중한지도 모르고 말야.”
“…큭!”
제갈소미가 당황한 듯했다.
험, 이진천이 몸 곳곳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퍽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래, 집으로 가자 얘들아. 말 나온 김에… 오늘은 우리 네 사람이서 낙검문의 미래에 대해 긴히 얘기를 나누자꾸나.”
* * *
저벅저벅.
이진천과 이벽, 그리고 제갈소미와 혁대웅은 마을의 입구를 지나 나란히 낙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주의 처소를 겸하고 있는 문내의 약방에 들어선 뒤, 이진천은 세 제자를 나란히 앉혔다.
뒤적뒤적.
“어디 보자…. 어디에 뒀더라?”
이진천은 근처를 뒤져 네 개의 술잔을 꺼냈으며, 또 몇 병의 술을 가져다 두었다.
쪼르륵.
“자, 받아라, 얘들아.”
“…….”
그리고.
각 제자들의 앞에 한 개씩 잔을 내려놓은 뒤, 제갈소미부터 차례대로 손수 잔을 채워 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본인의 잔을 채웠다.
“응? 뭘 하느냐. 잔 안 들고? 이 스승을 무안하게 할 셈이더냐?”
“…갑자기 이게 뭔 속셈이에요?”
이내 제갈소미가 말했다.
“핫, 속셈은 무슨… 그 무슨 섭한 소리더냐? 너희들도 이제는 한 잔씩 나누면서 이 스승과 진솔한 얘기를 나눌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그뿐이다.”
“…….”
벌컥, 그리고 이진천이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사형제들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벌컥.
이내 각자의 잔을 들이켰다.
“……!”
그 순간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상상 이상으로 싸하고 독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탓이었다.
“그래, 우선 우리 대제자.”
그때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미래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
“…뭐라구요?”
“앞으로의 일 말이다. 내 좀 전에 도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낙검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이다.”
“…….”
이진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반면 제갈소미의 안색은 딱딱해졌다.
이벽과 혁대웅은 잠자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퍽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덥석.
그때였다.
불현듯 제갈소미가 손을 뻗었다.
잔이 아닌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병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사, 사저?!”
혁대웅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보통 독한 술이 아님은 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제갈소미는 멈추지 않았다.
타앙.
이내 소리 나게 술병을 내리쳤다.
“…크으!”
그리고 소매로 입을 훔쳤다. 후우, 숨을 내쉬며 날 선 눈매로 이진천을 노려보았다.
“미래 계획은 무슨 얼어 죽을. 느닷없이 뭔 소릴 하나 했더니… 지금 누구 약 올려요? 예?”
퍽 격한 목소리를 냈다.
“망할 사제놈들은 어느덧 절정을 넘어서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에서 훨훨 날아다니는데… 나 혼자 몇 년이 지나도록 내력은 없고… 죽도록 제자리걸음이고…….”
“…….”
제갈소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취기가 급격하게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히끅! 왜요…? 아무리 두고 봐도 가망 없다 싶으니 이제 슬슬 내쫓겠다 이거예요?! 앙?! 대제자 이름값도 못 하니까?!”
“아, 아니… 소미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진정해, 진정해라, 우리 대제자.”
“그, 그래. 사저. 원래 늦게 피는 꽃이 제일 예쁜 법이라고—”
타앙.
“넌 닥쳐, 곰탱아!”
제갈소미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쳤다. 그리고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그리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흥, 술맛은 좋네. …히끅!”
“사, 사저…. 그러지 마. 속 버려.”
“남이사. 이미 버린 몸, 버리건 말건 뭔 상관이야?”
“…나, 남이라니. 아하하.”
혁대웅이 진땀을 흘렸다.
찌릿, 날카로운 시선이 혁대웅과 이진천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아 됐고! 신경 건드리지 마요. 미래고 나발이고 이대로는 원통해서 어디로도 못 떠나니까… 알겠어요?!”
“그, 그래. 알았다, 소미야…….”
벌컥벌컥, 제갈소미가 술병을 들이켰다. 되레 찔끔한 세 남자들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흠, 흠!”
이내 이진천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 뭐… 소미야 그렇다 치고. 다음은 우리 둘째인데…….”
그리고 시선이 혁대웅을 향했다.
훗,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대웅이는 그래도 내심 다 미래 계획이 있지?”
흠칫.
혁대웅의 거구가 흔들렸다.
“무, 문주님, 그게 무슨……?”
“핫, 척하면 척이지. 설마 내 네 마음을 모를 줄 알았더냐?”
흘끗, 이진천의 시선이 병나발을 부는 제갈소미를 향했다가 다시 혁대웅으로 향했다.
“…….”
덜덜덜.
그 순간.
혁대웅의 거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덩달아 함께 진동했다.
“핫핫핫! 뭐, 너무 걱정은 말거라. 어찌 되었건 나는 네 편이니까 말야!”
“저, 정말인가요 문주님……?”
“암 그렇고말고.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래. 사내자식이 너무 그렇게 움츠리고 있다간 될 것도 안 되는 법이란다.”
“…크흡!”
혁대웅이 입을 틀어막았다.
“됐고, 한 잔 더 받거라. 힘내고.”
“…예, 문주님.”
이진천이 다시 새 술병의 마개를 연 뒤 혁대웅에게 내밀었다. 냉큼 잔을 내민 혁대웅이 죽 들이켰다.
“…….”
사형과 스승.
이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중인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또한.
이벽이 이진천에게 낚시를 배웠듯, 이진천과 혁대웅 사이에는 이벽이 알지 못하는 유대가 있었으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 그리고 우리 막내?”
그리고 마침내.
이진천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뭐, 달리 할 말은 없고…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너, 정말로 혼례를 치를 생각은 없느냐?”
“…….”
다시 이벽의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불쑥, 혁대웅이 끼어들었다.
“벽아, 너는 어차피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갈 건데… 결국 언젠가는 당연히 거쳐야 할 수순이 아닐까?”
“…….”
“그러니 결국은 네 마음의 문제지. 수련이가 도저히 여인으로는 안 보인다거나… 뭐 그런 거니?”
이벽은 침묵을 깨기 어려웠다. 허나 마냥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넘어가질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아직은… 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핫, 그러냐?”
이진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욱, 말없이 이벽의 술잔에 술을 다시 채워놓은 뒤 타앙, 병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음, 그래! 결정했다!”
불현듯 큰소리로 외쳤다.
“내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두마! 너희 셋 중 누구라도 제일 먼저 배필을 찾아오는 녀석에게… 이 낙검문과 문주 자리를 통째로 물려주마!”
쿠웅.
무거운 충격이 내려앉았다.
* * *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혁대웅이 말했다.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문주님, 농담이시죠? 아하하…….”
“무슨 소리냐? 난 진지하단다.”
“…….”
이진천이 팔짱을 낀 채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차피 언젠가는 확실히 해둬야 할 문제이니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늙어 죽고 나서 너희들끼리 서로 네 거니, 내 거니 아귀다툼을—”
타앗.
“크아악!”
허나 그때였다.
잠자코 홀로 술병을 들이켜던 제갈소미가 벌떡 일어섰다. 괴성과 함께 그대로 이진천에게 달려들었다.
덥석, 이진천의 멱살을 붙들었다.
“사, 사저?!”
혁대웅이 외쳤다.
“그, 그만해! 왜 그러는 거야?!”
허나 제갈소미에게는 귓등으로도 스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탈탈탈, 그대로 이진천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 이 자식! 뭐라고?!”
독주 한 병을 홀로 비운 얼굴은.
어느덧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탈탈탈.
“누, 누구 맘대로 문주 자릴 물려줘…?! 말도 안 되는 소리! 히끅! 내가 대제자니까… 당연히 다 내 거지!”
탈탈탈탈.
“아하핫하핫! 어지럽다 소미야!”
“내가… 히끅!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밥하고 빨래했는데! 재, 재능 좀 없다고… 이렇게 찬밥 취급해도 되는 거야?! 응?!”
“아하핫하핫! 아하하핫!”
“…….”
‘낙검문의 미래’를 얘기하던 스승과 제자들의 술자리는.
어느덧 어엿한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덥석.
그때 혁대웅의 손이 뻗어졌다. 이진천을 마구 뒤흔드는 제갈소미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그만해, 사저. 너무 취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문주님께 무슨 짓이야?”
휙.
“흥, 뭐야?! 곰탱이, 불만 있어?!”
제갈소미의 성난 눈빛이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허나 혁대웅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 있어.”
“……!”
흠칫.
혁대웅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제갈소미가 그제서야 이진천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낙검문주의 자리라면 나도 순순히는 양보 못 해. 우리들 중 누구에게 뭘 물려주실지는 순전히 문주님의 뜻이지, 사저가 멋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어쭈? 곰탱이 세게 나온다?”
제갈소미의 입꼬리가 흔들렸다.
몸을 돌려 혁대웅을 마주했다.
“나도 문주님의 제자고, 누구보다 이 문파를 아끼고 사랑해. 그러니까… 모든 걸 사저 맘대로 할 순 없는 거야.”
허나.
여느 때와는 달리 혁대웅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술기운이 올라 콰해진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했다.
“……!”
불현듯 이벽은 긴장했다.
사형과 사저, 양쪽 모두 적잖이 취한 상태였다. 어쩌면… 이쯤에서 말리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그만—”
“하지만.”
허나 이벽이 나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혁대웅이 불현듯 목소리를 달리했다.
“겨,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가진 권한을 모두 포기하고 사저한테 모조리 내어줄 수도 있어.”
“…뭐어?”
제갈소미의 콧등이 찡그려졌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그, 그게… 사실은 매우 간단한 얘긴데… 우리가 서로 싸울 필요 없이… 지분이 ‘하나로 합쳐지면’ 되는 거잖아?”
“…….”
혁대웅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무, 문주님 말처럼 어렵게 다른 데서 짝을 찾을 필요도 없고… 지금이라면 우리가 벽이도 제쳐버릴 수 있고, 그게, 그러니까…….”
그리고.
구 척의 거한이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박힌 검지손가락 두 개가 서로 맞부딪혔다.
“…뭐래, 이 곰탱이가? 답답하게 굴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 그게… 크아아악!!”
덥석.
그때였다.
이번에는 혁대웅이 악을 내지르며 술병 하나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들이켰다.
챙그랑!
그리고 이마로 깨뜨렸다.
쾅! 쾅! 쾅!
그러고도 모자라 바닥에 연신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제기랄! 역시 안 되겠어요, 문주님! 난 등신, 똘추, 머저리, 쓰레기야! 으아아아악!”
쿵, 쿵, 쿵.
“그, 그만해! 바닥 꺼진다고! 이 미친 곰탱이 자식! 내가 물려받을 소중한 부동산에 무슨 짓이야!”
“아핫하핫핫! 개판이구나!”
이진천이 배를 잡고 웃었다.
취기 속에서 낙검문의 밤이 깊어갔다.
허나 그것이.
문주 이진천과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가 될 거라고는.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