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천향루주 지소약
저벅저벅.
이벽은 소녀의 뒤를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장내에 들어찬 탁자 위로 술상들이 펼쳐져 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술 냄새와 음식 냄새, 그리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계단을 타고 한 층을 위로 올라가자 소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문들이 죽 늘어져 있다. 개별실의 형태로 일 층보다 비싼 값을 치른 객들을 위한 장소인 듯했다.
“이쪽입니다, 공자.”
소녀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른 뒤 반대편 끝에서 이벽을 돌아보았다.
이벽은 소녀를 따라 다시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더 위로 올라갔다.
계단의 끝에서 굳게 닫힌 문이 나타났고, 그 양옆을 무사들이 지키고 서 있다.
“…….”
이벽들이 나타났음에도 선뜻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도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과는 기세가 전혀 다르다.
무사들이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흘끗, 무사들의 시선이 이벽을 훑었다.
철컥!
무사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삼 층의 내부는 아래층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기둥 곳곳에 매달린 등불들이 일렁이며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이름 모를 꽃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의 끝자리에 여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공자.”
“…….”
여인이 나른하게 웃었다.
“천향루주 지소약이라 합니다.”
“낙검문의… 이벽입니다.”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성숙한 여인이지만,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이리 와 앉으시지요. 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이벽은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옷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벽은 조금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이벽이 맞은편에 다가와서 앉자 여인이 앞에 놓인 다과상에서 주전자를 들었다.
쪼로록!
다소곳한 손이 섬세한 모양으로 두 잔의 찻잔에 물을 따른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그 사이 이벽을 안내한 소녀가 여인의 옆으로 다가섰다. 여인을 보호하듯 이벽을 마주하고 앉는다.
“패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전자를 내려놓은 여인이 말했다. 이벽은 품 안에서 패를 꺼낸 뒤 다과상 위로 올려두었다.
여인의 눈이 패를 훑었다.
“분명히 그분의 패가 맞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자.”
스윽, 찻잔이 내밀어졌다.
이벽은 패를 회수한 뒤 찻잔을 들었다. 달착지근함이 혀를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움찔.
일순 위화감이 스쳤다.
그러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생각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진다. 긴장이 사라지고 온몸이 구름처럼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지요, 공자?”
슥, 여인의 손이 뻗어졌다.
손끝이 이벽의 뺨을 어루만진다.
훅, 꽃향기가 농염하게 다가왔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이벽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던 찰나였다.
우웅.
선천의 힘이 일어났다.
이벽의 심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빠르게 몰아낸다. 다음 순간, 이벽의 의식이 또렷해졌다.
탁.
이벽이 여인의 손을 쳐내었다.
그리고 검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소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여인에 팔에 가로막혀 움직임을 제지당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군.”
“…….”
“문주님께서는 이곳에 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거라 하셨소만, 내게 장난을 칠 생각이라면 이만 돌아가겠소.”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돌아서서 문을 향했다.
스윽.
“공자,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이벽이 다시 뒤를 돌아보자 여인이 이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
“다시 소개 올리지요. 저는 모자란 몸이나마 하오문의 곡정지부를 맡고 있는 지소약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호위 겸 제자이기도 하지요.”
“…언미희입니다.”
그리고 소녀도 함께 절을 했다.
두 여인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공자께서 이대로 돌아가시겠다면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제게는 감히 그럴만한 힘도 없지요.”
“…….”
“다만 한 가지만 알아주시지요. 저희로서는 공자께서 진정으로 그분께서 보내신 분이 맞는지 신중을 기울여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의 행사에 외부인이 섞여들어선 안 될 일이니까요.”
이벽은 잠시 생각했다.
이 여자를, 이 장소를 믿어도 좋은가? 그러나 역시 이진천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그럼 푹 쉬십시오, 공자.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일하는 이들 중 아무에게나 하명하시면 됩니다.”
지소약과의 대화를 일단락한 뒤, 이벽은 언미희에 의해 처소를 안내받았다.
이 층의 복도에 자리한 문들 중 하나로 내부는 지나칠 만큼 넓고 깨끗했다.
“…알겠소.”
“그럼 전 이만.”
고개를 숙인 언미희가 뒷걸음질로 방에서 물러났다. 정중하지만 이벽에 대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벽은 몸과 짐을 정리했다.
등불을 끈 뒤 침상에 누웠다. 지소약과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해보았다.
귀주 사패련(邪覇聯).
정파무림의 정도맹(正道盟)이나 의혈맹(義血盟)과 대치를 이루는 사파무림의 연합체로, 중원 남부를 아우르는 거대 세력이다.
허나 맹(盟)이 아닌 련(聯)이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즉, 정파세력과의 알력에 대비한 연합체일 뿐, 그리 강한 단결력이나 구속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특히, 근래 무림에는 정사간 불가침조약이 생긴 뒤로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없었기에 그 역할이 점점 더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허나.
불과 얼마 전, 사패련주의 직인이 찍힌 소집령이 련내에 적을 둔 각 문파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신규 무력대의 창설.
장차 사파무림의 미래를 이끌어갈 각 세력의 후기지수들을 한데 모아, 상호 간 친분과 경험을 쌓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무파(武派)가 아닌 저희 하오문은 엄밀히는 사패련의 소속이라기보다는 동맹관계에 해당하지만… 어찌 되었건 초청이 왔으니 누군가는 이에 응해야겠지요.
지소약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렇게 곡정지부장 지소약의 제자 언미희는 하오문을 대표하는 후기지수로서 이에 응하게 되었다.
이벽의 역할은 지소약과 언미희가 귀주 사패련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그 여정을 호위하는 것이다.
이상이 대화의 내용이었다.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다만.
‘…이상하군.’
몇 가지 의아한 점이 스쳤다.
우선, 대표자의 호위를 하오문도도 아닌 자신에게 맡길 만큼 하오문 내의 인력이 모자라는가에 대해서였다.
그야 본래는 ‘수호대’의 이진천에게 맡겨진 임무였을 테지만, 검증되지도 않은 애송이가 그 대리로서 이를 맡아도 괜찮은 것인가?
뿐만이 아니다.
애시당초 하오문을 대표하는 자리가 운남성 시골 자락에 있는 일개 지부장과 그 제자에게 하달되는가?
역시 알 수 없었다.
“…….”
이벽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기실 하오문에서 무슨 의도를 지니고 있건, 일개 호위에 불과한 자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사패련. 사파 무림의 총본산.’
다른 모든 걸 떠나 이벽으로서는 사패련이란 이름에 담긴 무게감이 퍽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강호무림의 논리들이 이벽에게로 와락 밀려든다.
‘제법 먼 길이 되겠지.’
이벽은 화정촌을 생각했다.
반각이면 돌아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어쩐지 벌써부터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이벽은 잠을 청했다. 하지만 편안한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결국 새벽녘에 눈이 뜨였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수면 위로 떠 올라버린 의식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색이 없다.
스윽, 철컥.
갑갑함을 느낀 이벽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채비를 마친 뒤, 검을 들고 처소의 문밖으로 나섰다.
전각의 내부는 고요했다.
지난밤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벽은 마당으로 나섰다.
가볍게 몸이라도 풀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마당의 한가운데에는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마부석에 작은 체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없다.
그러나 이벽이 기척을 낸 순간 번뜩, 눈이 뜨였다. 주름진 눈가 사이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든다.
“네가 그 녀석이냐?”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패를 보여라.”
“…지긋지긋하군.”
이벽이 답했다.
상대는 초로의 노인이지만, 무도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쪽에서 먼저 공손하게 나설 이유는 없다.
“어젯밤 이곳에 도착한 후로 대체 내가 나인지를 몇 번씩이나 증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소.”
“…….”
“뿐만이 아니지. 어차피 패를 보인들 증명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소?”
“맞는 말이군.”
사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툭,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이벽보다도 작은 왜소한 체구, 그러나 그 순간 이벽은 직감했다.
위험하다.
“그렇다면 한 수 받아보아라.”
채앵, 휘리릭.
이벽이 내력을 끌어올린 바로 그 순간, 사내가 등 뒤에서 기형적인 모양의 도를 꺼내 들었다.
공간을 점하며 날아든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챙, 채앵!
위기의 순간 이벽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마음의 준비를 통해 펼쳐진 비전검식이 사내의 도와 부딪혔다.
“……!”
묵직한 내력이 밀려들었다.
차돌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힘.
단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도 어째서인지 두 번의 충격이 연달아 밀려왔다.
두 번째에 이르러 이벽의 직검과 사내의 초식은 완전히 상쇄되었다.
저벅.
‘…아니, 밀렸다.’
아주 근소한 차이였으나 이벽은 한 발자국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벽은 놀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꿀꺽, 이벽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직감했다. 상대해야 한다면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맞군.”
그러나 그때였다.
스윽, 사내가 도를 갈무리했다.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이벽에게서 돌아섰다. 마부석에 올라탄 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 * *
달그락달그락.
마차가 가볍게 흔들렸다.
천향루를 나선 이벽과 일행은 마차에 몸을 실은 채 여정을 시작했다.
마차는 넓고 쾌적했다. 그러나 이벽은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꼈다.
구석에 홀로 앉은 이벽의 맞은편에는 지소약과 언미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공자, 필요하신 거라도?”
“…아닙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지소약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기품이 흐르는 미소였으나 어쩐지 마주하기 어렵다.
일행은 총 네 명이었다.
마차 내의 셋과 더불어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고 있는 사내는 오전 중에 이벽과 검을 부딪쳤던 바로 그 사내였다.
지소약은 사내를 가리켜 ‘고 노야’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벽은 적어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갔다.
저 정도의 고수가 함께 한다면, 굳이 이진천이 아니더라도 호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란 계산이 가능했을 것이다.
“흠흠, 공자님?”
지소약이 다시 말문을 텄다.
“…네, 말씀하시죠.”
“실례가 아니라면 공자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을는지요?”
“올해로 열여섯이 됩니다.”
“어머나, 우리 미희와 동갑이군요. 좋은 벗이 될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지요.”
움찔, 언미희의 어깨가 흔들렸다.
본의 아니게 이벽과 눈이 마주쳤고 다음 순간 황급히 서로 시선을 피했다.
우후후, 지소약이 웃음을 흘렸다.
“아무쪼록 여정은 길답니다. 얘기를 나누고 가까워질 시간은 충분하겠죠.”
“…….”
이러한 공기 속에서 앞으로 며칠 가량을 꼼짝없이 머물러야 한다. 이벽은 문득 암담해졌다.
“저는 공자에게 흥미가 아주 많답니다. 그분께서 선뜻 패를 내어주실 정도로 신뢰를 받는 제자가 대체 어떤 분이신지요.”
지소약이 말을 이었다.
황망함 속에서도 이벽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그분’이라는 호칭은 물론 이진천을 가리키는 말일 테다.
“루주님.”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답니다.”
“…루주님께서는 저희 문주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어머나.”
지소약이 사뭇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군요. 어떤 관계라… 같은 문파에 적을 두었다곤 해도 저 같은 일개 문도가 그분과 감히 비교될 수는 없고,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군요.”
지소약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흠모하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