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92)
298화. 사천당가
덜커덩, 덜컹.
차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날이 밝았고, 이벽은 곧장 숭산을 내려간 뒤 불영촌에서 수배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다소 거칠기는 해도, 솜씨 좋은 마부에 의해 이끌어지는 마차의 속도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못지않았다.
허나 물론.
‘발’보다 빠를 수는 없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이벽이 경신공을 펼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차를 택한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남궁천승, 그리고 맹철극과의 사투를 벌인 뒤 고작해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벽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고로 사천에 도착하기에 앞서, 내기를 다스리고 몸을 회복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덜컹, 덜컹.
물론, 내달리는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런 것에 운기를 구애받을 경지는 아니었다.
우우웅.
내기를 다스리는 한편.
이벽은 간밤의 대화를 생각했다.
―시주의 스승을 해했다던 그 또 한 명의 혈마야말로… 작금의 의혈맹 뒤에 숨어있는 ‘혈마임과 동시에 천마’인 존재일 지도 모르는 일이오.
―…….
―물론, 이 모든 게 제대로 된 근거라곤 없는 늙은이의 억측에 불과하지만 말이오.
허헛, 혜공은 웃으며 말했고.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억측.’
허나 이벽은 생각했다.
무려 백 년 전의 일이었다. 심증과 억측 외에 당시의 일을 짐작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는 것도 퍽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벽은.
이내 ‘혈마들’을 떠올렸다.
그날,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에서 스승 이진천과 천외천의 승부를 벌였던 ‘두 번째 혈마’는.
과거, 사패련의 지하에서 스승에 의해 손쉽게 목이 떨어졌던 ‘첫 번째 혈마’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최소한.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가… 마교의 힘에 굴복한 혈교의 ‘일개 잔당’일 리는 없었다.
그리고 만일.
그의 정체가 정말로 ‘천마임과 동시에 혈마’였다고 한다면… 오히려 차라리 그쪽이 납득이 가는 듯했다.
“…….”
허나.
그 억측이 사실이라면.
말인즉슨 스승의 원수는.
오십여 년 전, 중원을 피로 물들이고 괴멸 직전까지 이르게 했던… ‘바로 그 천마’라는 뜻이 된다.
물론, 천마는 그 당시 정사연합 절대고수들의 동귀어진에 가까운 합공 끝에 목이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이미 천마와 혈마가 ‘한 몸’이었다면… ‘혈마의 사술’을 통해 몸을 갈아탐으로써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였다.
으스스.
불현듯 오한이 일었다.
“…하아.”
허나 그때였다.
일행의 한숨이 귓가를 스쳤다.
“…….”
이벽은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억측 위로 억측을 계속해서 쌓아 올린들 결론은 나지 않는다.
또한 무엇보다도.
당금의 목적지는 천하의 사천당가였다. 당장 눈앞의 큰일을 놔두고서 먼일에 골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흘끗,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옆자리 창가에 기대어 앉은 일행은 물론 잠영난봉 당려옥이었다.
기실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은.
이벽과 당려옥 뿐만이 아니었으며, 맞은편에 앉은 아미의 정연화와 금령사태까지 일행은 총 네 명이었다.
허나 머릿수가 무색하게도.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일행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들었고, 그저 마차가 흔들리는 소음과 더불어 이따금씩 당려옥의 한숨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덜커덩, 덜컹.
“…하아.”
당려옥은 사천을 떠나 소림으로 향할 때만 해도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인질’이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줄곧 이벽과 정연화에게 친근한 말들을 건네곤 했다. 허나.
더는 그럴 여유가 없는 듯했다.
물론 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소림을 친 남궁세가의 세력은 사실상 ‘괴멸’되었으며, 수많은 목숨들이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당가와 남궁세가는.
의혈맹의 명령을 따른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입장이 다르지 않으며, 현재 이벽은 당가로 향하고 있다.
어쩌면.
‘재앙’일지도 모르는 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전 어쩌면 좋을까요?
소림에 당도했던 그 날 밤.
당려옥은 이벽에게 물었다.
허나 그때 이벽은 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벽은 ‘대화’를 원했다.
‘구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의혈맹과 맞선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고, 약속대로 그러한 사실을 당평세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허나 물론 그 이후에는.
‘대화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덜커덩, 덜컹.
각자의 침묵 속에서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내 사천에 접어들었고, 어느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럼 살펴 가시오.”
“은공……!”
그리고 다음 날, 이벽과 당려옥은 정연화, 금령사태와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물론, 두 여인은 처음부터 아미가 목적지였을 뿐, 함께 당가로 가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혹여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고맙소. 허나 지금은 마음만으로 충분한 것 같군.”
“…큭.”
정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말을 이으려 해도 결국은 어떤 말을 한들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은을 입었으나 자신에게는 힘이 없었고, 천하의 당가를 상대로 무언가 도움이 될 리도 만무했다.
휙.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벽의 옆에 선 당려옥은 소림을 떠난 이래 여전히 수심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연화는 불쑥 부아가 치밀었다.
뻐억.
“크앗―!!”
다음 순간, 다짜고짜 정연화의 일권이 뻗어졌다. 당려옥의 몸을 두들겼다.
“…헉!”
비틀.
물론, 아무런 대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당려옥은 그대로 배를 두들겨 맞고 주저앉았다.
“여, 연화야……?!”
금령사태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허나 그것은.
내력이 실리지 않은 공격이었다. 고로 이벽 또한 굳이 정연화를 제지하지는 않은 것이다.
“흥, 속 시원하다!”
정연화가 콧김을 내뿜었다.
“…저, 정 소저?”
“어때요, 한 대 맞고 나니까 정신이 좀 들어요?!”
정연화는 당려옥의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불현듯 독단을 깨물고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던 얼굴이 겹쳐졌다.
“당 소저, 잘 들어요! 당신은 꽤 나쁜 짓을 했을진 몰라도… 죽어야 할 만큼 나쁘진 않아요!”
“……!”
“죽어 마땅한 이라면… 애초에 머리 싸매고 고민 같은 걸 하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고작해야 며칠에 불과했던 시간 동안 정연화 나름대로 당려옥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니까… 알겠죠?! 은공이나 똑바로 잘 모셔요! 그리고… 나중에 아미에 와서 제대로 용서를 빌어요!”
“…….”
“물론, 그때 우리 아미는 당가 따위가 감히 다시는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을 테지만요!”
“…그러네요.”
훗, 이내 당려옥이 웃었다.
“정 소저, 다시 만날 땐 적…이 아니라 이웃이었으면 좋겠네요. 물론, 제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요.”
“…흥!”
* * *
“소저, 괜찮소?”
“…속이 좀 안 좋네요. 호홋!”
다시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이벽과 당려옥은 마침내 당가가 자리한 사천성 미산의 시내에 접어들었다.
저벅저벅.
이내 마차에서 내린 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허나 당가가 가까워질수록, 당려옥의 안색은 유달리 창백해졌다.
“집에 가는 게… 이렇게 두려웠던 건 난생처음인 것 같네요.”
“…….”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죠. 도망친다고 해도… ‘진실’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훗, 당려옥이 웃음을 흘렸다. 허나 이벽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의혈맹은.
‘악의 소굴’일 공산이 크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벽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당가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어떤 입장인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내.
저만치에 당가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시선들이 쏠리기 시작했다.
“…….”
당가를 둘러싼 담장의 주변으로는 얼추 보아도 거뜬히 백을 넘기는 무인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당가의 무인들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의혈맹 소속 남서지역 무가의 무인들이 모여든 모양이었다.
웅성.
그리고 이벽이 나타난 순간.
소란이 물결처럼 일고 지나갔다.
“크으윽, 비룡대주……!”
어딘가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이벽의 시선이 움직였고,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이내 상대의 정체가 과거 은원을 쌓았던 팽가의 팽무옥임을 확인했다.
허나 눈이 마주친 순간.
팽무옥은 시선을 피해버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극히 조심스러웠으며, 어느 누구도 이벽의 길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소식은.
이미 전해진 모양이었다.
저벅.
고로 이벽은 개의치 않고 나아갔다. 이내 사천당가의 대문 앞에 섰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정작 대문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일찍이.
권왕 황보혁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이벽은 독왕에 의해 구해졌고, 당가의 객당에서 눈을 떴다.
독왕의 손님으로서.
정중한 대접을 받았었다.
허나 지금의 이벽은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다지 환영받을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찰나의 씁쓸함이 스쳤다.
끼이익.
이내 이벽은 문을 밀었다.
닫혀있을 뿐, 잠겨있지 않았던 문은 쉬이 열렸고 이내 거대한 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그 안쪽으로는 다시 당가의 정예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차 있었다.
허나 동시에 이벽이 들어선 대문에서 시작되는 중앙의 길을 중심으로 하여 양옆으로 비켜서 있었으며.
또한 그 길의 끝에는.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반백의 머리칼을 지닌 중년 사내의 인상은 퍽 부드러웠으나 표정은 암석처럼 굳어있었다.
“…아버지.”
당려옥이 말했다.
물론, 당가의 중앙을 지키고 선 사내의 정체는 당대의 당가주, 십절군자(十絶君子) 당명오였다.
저벅저벅.
이벽과 당려옥은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일 보의 거리를 두고서 당가주 당명오를 마주했다.
슥.
이벽은 정중히 포권했다.
“당가주께 인사 올리겠소. 이벽이라 하오. 소속은… 일단은 무림맹이라 해두겠소.”
흠칫, 당가주의 표정이 흔들렸다.
“…비룡대주, 혹은 낙검신룡.”
이내 당명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뭐라 불러드리면 좋겠소?”
“무엇이든 편히 불러주셔도 좋소. 당 소저와는 벗과 같은 사이이니 말이오.”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소?”
훗, 당명오가 코웃음을 쳤다.
“내 아버님께서… 그대를 퍽 귀히 여기시는 것 같으니. 함부로 하대했다간 큰 호통을 들을 테지.”
“…….”
일순 당명오의 표정에서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흘끗, 그리고 시선이 당려옥을 스쳤다.
“그래,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소? 그대가 도둑질해간 내 딸을 돌려줄 생각이라면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소?”
“…독왕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오. 혹 안에 계시오?”
“아버님과 약조를 하였소?”
“딱히 그런 것은 아니오.”
앞서 이벽은.
서천무존 정룡을 물러서게 한 후, 독왕에게 조만간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는 말을 했었다.
허나 딱히 시일을 두고서 직접 당가를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군.”
당명오가 답했다.
이내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소. 아버님께서는 이틀 전 세가를 출타하셨고 언제쯤 돌아오실지는 기약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소?”
“…송구하오만.”
이벽은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든 반드시 뵈어야만 하는 시급한 용건이라서 말이오. 가능하다면 근처에 머무르며 기다려도 되겠소?”
“…….”
당명오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내 이벽은 눈앞에 선 사내에게서 기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아버지……!”
“그 입 닥치거라―!!”
당려옥이 나서려 했다.
허나 그 순간, 당명오가 일갈했다. 내력이 담긴 음성이 당가의 내부를 쩌렁하게 울렸다.
“당려옥, 입도 뻥끗하지 말거라. 이 자리에서 다시 함부로 끼어든다면… 그 순간부터 너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
당려옥의 안색이 창백하게 흔들렸다. 허나 당명오의 시선은 오로지 이벽을 향해 있었다.
“소협, 나를 조롱하는 것이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소.”
“사과라.”
핫,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대는 지금, 당가의 주인 앞에서 그 딸을 붙들고서 그 아비를 내놓으라 생떼를 부리고 있소.”
“…….”
“사과로 용납될 무례가 아니오. 내 인내심이 모두 바닥나기 전에 어서 돌아서시오.”
파스스스.
이윽고.
당명오가 밟고 선 발 아래로 돋아난 몇 가닥의 잡초들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예를 차리는 것은 여기까지오. 돌아서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당가의 침략자로 간주하겠소.”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당 소저. 물러서시오. 이만 소저의 가족들 사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소, 소협! 잠깐……!”
“걱정은 마시오. 소저가 생각하는 ‘안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벽은 웃음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