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00)
307화. 최후의 실마리 (2)
우우우웅.
머리를 파고든 당평세의 심독은.
이벽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악몽’들을 끄집어 펼쳐놓기 시작했고.
이내 이벽의 눈앞에는 스승의 원수이자 무림행의 목표인 ‘두 번째 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어느덧 이벽은 스스로가 그날 그때,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에 서 있음을 발견했다.
스스스.
혈마의 붉은 뱀이.
이벽의 몸을 휘감았다.
허나 지금의 이벽이 정말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혈마의 환영 따위가 아니었다.
휘오오.
불현듯 바람이 몸을 스쳤다. 땅에서 하늘로, 주변의 대기가 위를 향해 빨려들듯 솟구치고 있었다.
이벽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비치고 있는 것은, ‘최후의 일검’을 쥐어 짜내는 스승의 그림자였다.
우우우웅.
이진천의 검이 떨었다.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 아래, 푸른빛을 띤 이진천의 검은 서서히 검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내 검뿐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을 두른 그 모든 나뭇잎들이 불에 그슬리듯 모두 시커멓게 물들었다.
후우우우.
마침내 이진천이 움직였다.
팔랑.
‘거꾸로’ 펼쳐진 창공비검은.
하늘로 솟구치는 대신 저무는 낙엽처럼 너풀거리며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사아아아.
날아오른 혈마와 충돌했다.
후욱.
그 순간 어둠이 번쩍였고,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혈마의 몸을 두른 뱀의 비늘이 뜯겨지며 빨려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소리마저 예외는 아니었기에, 마치 온 세상이 숨을 죽이는 듯한 정적이 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허나 이내.
어둠은 빨아들인 모든 것을 뱉어내었고,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이 한발 늦게 터져 나왔다.
부르르.
이벽은 전율했다.
그 기운은 청강유엽공이되 청강유엽공이 아니었으며, 또한 창공비검이되 창공비검이 아니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것은 이미 선우세가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 ‘별개의 깨달음’이자 ‘다음 단계의 검’이었다.
‘…낙검진천(落劍振天).’
그리고 어째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이벽은 그 검의 이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낙검진천신공에 ‘초식’이랄 게 있다면, 저것일 수밖에 없다.
“……!”
퍼어어어억.
허나 그때였다.
어둠이 명멸하는 짧은 순간.
혈마의 뱀을 찢어발기며 그 몸을 관통하는 이진천의 검에서 이벽은 돌연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일순 이벽은 눈을 의심했다.
허나 눈을 의심한다 해도 등천의 영역에 이른 자신의 모든 감각들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고로 그것은.
그 당시 ‘알아볼 눈’이 없었기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와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터엉.
다음 순간, 핏덩이로 짓이겨진 혈마의 육신이 땅에 떨어졌다. 허나 혈마는 그대로 뱀처럼 땅을 기어 달아났다.
후우욱.
그리고 스승이 내려앉았다.
다시,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쓴웃음을 지은 스승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말했고.
이내 몸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한 검은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평세의 심독이 이벽의 머릿속에서 찾아낸 ‘가장 두려운 악몽’이었다.
타다닷.
허나 이 모든 것은 이미 과거에 끝나버린 일이므로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기억들이 되풀이되었다.
이벽은 혁대웅을 기절시킨 뒤 그 몸을 들쳐업고 필사적으로 장내를 벗어났다.
후욱, 쿠구구구구궁.
허나 곧 충격이 산을 휩쓸었고.
어쩌면 스승이 기운을 통제하는 것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이벽은 다시금 산길을 거슬렀다.
허나 이벽이 마주하게 된 것은.
검에 심장을 꿰뚫린 스승이었다.
기실 스승의 마지막 숨을 끊었던 것은… 혈마가 아니라 줄곧 예의 현장에 널브러져 있던 의문의 복면인이었다.
서걱.
복면인이 검을 회수했고.
스승의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비틀.
그리고 피투성이의 복면인은 비틀거리며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허나 스승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말했다.
말마따나 복면인이 스승을 찌르지 않았더라도… 스승은 혈마와의 싸움에 전력을 쏟아낸 후 스스로의 기운에 잠식당해 끝을 맞이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야 이벽은 복면인이 이진천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허나 어찌되었건.
복면인은 자리를 떠났고, 당시의 이벽에게는 복면인의 행방에 대해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쓰러진 스승을 붙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몇 마디의 당부와 유언을 남기며, 스승은 숨을 거두었다.
욱신.
마음이 고통을 호소했다.
너무 많은 비밀을 품고서 눈을 감아버린 이 사내에게, 이벽은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허나 물론.
숨을 거둔 이는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으며, 설령 생전의 스승에게 물었다고 한들 끝끝내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을 터였다.
스승 이진천은.
자신과 사형제들이 이대로 화정촌에 정착한 채 계속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무림인이 아니기를 바랐다.
“…….”
허나.
이벽은 현재, 당가에 있었다.
이내 빠르게 마음을 추슬렀다.
사형제들은 스승의 원수를 쫓아 낙검문을 떠났고, 이내 이벽 또한 그 뒤를 이어 무림으로 향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따라서 해야만 하는 일은.
한시라도 빨리 심신의 독기를 몰아내고 이 덧없는 악몽의 환영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일이었다.
‘…단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벽은.
조금 전, 이진천의 일검에서 목도했던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물론 그러한 사실이.
과연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단서가 되어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만 ‘연관이 없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스쳤다.
“…….”
낙검진천(落劍振天).
그 명멸하는 어둠 속에서 이벽이 읽어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적파직검’과 ‘만월무변곡검’의 흔적이었다.
말 그대로 두 갈래의 기운이.
어둠의 일부로 섞여 있었다.
* * *
적파직검, 그리고 만월무변곡검.
두 기예는 앞서 혜공의 가르침 속에서 마음의 환영들을 하나로 엮어낸 이래 남궁천승, 맹철극과의 일전을 통해 이벽이 스스로 정립해낸 것이었다.
때문에.
이벽은 그것이 기존의 청강유엽검식을 넘어선 ‘자신만의 기예’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진천이 이미 그 두 가지 기예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익히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아니, 어떻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허나 역시 등천에 이른 감각이 착각을 일으켰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로 이벽은 자초지종을 짐작해보았다.
이진천과 두 검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애당초 두 기예의 뿌리가 되었던 적파심공와 만월무변심공을 이벽에게 전수해준 것은.
고 노야와 초연서였으며.
두 사람은 모두 하오문 수호대원이었다. 즉, 다시 말해 ‘수호대주 이진천’의 수하였던 것이다.
애당초.
각각의 무공을 전수 받았던 무렵, 이벽은 어째서 그와 같은 심오한 가르침들이 하오문에 닿아있는지에 대해 의아함을 품었었다.
허나 어쩌면.
‘…애당초 거꾸로였다면?’
만에 하나 두 종류의 무공이.
고 노야와 초연서에게 전해지기 이전, 본래부터 ‘이진천이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고 한다면.
“……!”
다시, 옛일이 머리를 스쳤다.
각각 적파심공와 만월무변심공을 이벽에게 전수해주며, 고 노야와 초연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무림인이 아니다. 고기를 써는 백정일 뿐.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네가 아닌 약장수에게 진 빚일 뿐이겠지.
―공자가 우리에게 느낄 마음의 빚은 전혀 없어요. 문주님과 대주님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공자를 하대할 수 없으니, 부디 하오문에게서 필요한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하세요.
즉, 두 사람은 모두.
‘마음의 빚’을 이야기했다.
허나 무인에게 있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독문무공을 거리낌 없이 전수해 줄 만한 빚이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것일 리 없다.
또한 애당초 두 사람이 지닌 무공이 이진천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제자인 이벽에게 빚을 느끼고 깨달음을 선뜻 나눠준 것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 된다.
더 나아가서는.
본래부터 그 두 가지 무공이.
청강유엽공의 경지가 ‘등천에 오른 이후’를 위한 밑거름에 해당하는 가르침이었다고 한다면.
과거, 두 사람이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해주었던 것조차… 모두 이진천의 ‘간접적인 가르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
소리 없는 충격이 스쳤다.
부르르, 그 순간 불현듯 이벽은 머릿속에서 진동을 느꼈다. 주변의 환영이 안개처럼 일렁거렸다.
생각이 실마리를 붙들자.
머리를 파고든 당평세의 심독이 위기를 느끼고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기세를 탄 이벽의 생각을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는.
스승의 검 안에는 아직도 ‘생각할 여지’가 더 남아있었다. 고로 이벽은 생각을 곱씹었다.
조금 전 이벽이 이진천의 검에서 목격한 것은 비단 그 두 종류의 기예뿐만이 아니었다.
예의 일검 안에는.
적파직검과 만월무변곡검을 제외하고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허나 적어도.
그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이벽은 그 ‘알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스승의 일검은.
청강유엽공이자 청강유엽공이 아니었으며, 창공비검이자 창공비검이 아니었다.
‘직, 쾌, 강, 곡, 변, 유.’
그것은.
청강유엽검식의 근간을 이루는 여섯 개의 묘리이자, 검으로 이름 높은 뭇 도가문파들의 기초검공에서 비롯된 ‘껍데기’들이었다.
때문에 청강유엽검식은.
근본적으로 ‘미완성’이었다.
허나.
창공비검으로 말미암아 등천의 경지에 오른 뒤, 그 하나하나에 적파직검, 그리고 만월무변곡검과 같은 ‘알맹이’를 채워 넣는다면.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의미로 완성된 여섯 개의 검을 창공비검으로써 다시 하나의 초식으로 엮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그때에는.
혈마조차 베어낸 스승의 최후의 일검, ‘낙검진천’의 초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우우웅.
다시 상단전이 진동했다.
몇 가지 추측들이 서로 맞아떨어졌고, 또한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속삭였다.
이내 짐작은 서서히.
확신으로 물들어갔다.
콰아아.
깨달음의 목전에서 상단전에 스며든 선천의 힘이 내달렸고, 당평세의 심독은 오히려 그 기세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청강유엽공을 창시한 것은.
선우세가의 시조, 선우명이었다.
그리고 선우명과 이진천이 어떠한 관계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나.
검치가 다다른 최후의 경지, 창공비검을 이어받은 것은 선우세가의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이진천뿐이었다.
그리고 이진천은.
다시금 낙검진천신공을 창시했다.
어쩌면… 단전을 잃은 육신을 통해 서로 다른 종류의 심공들을 동시에 익힐 수 있도록 하는 낙검진천신공의 공능은.
애당초 청강유엽검식이 지닌 여섯 개의 껍데기에 각각의 알맹이를 채워넣기 위한 ‘기능’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청강유엽검식의 끝에서.
낙검진천의 일검이 완성된다.
타아앙.
이벽은 결론을 내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싼 환영이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암기의 형태를 띤 채 이벽의 머릿속에 틀어박혔던 당평세의 심독이 두 동강이 나며 형체를 잃고 흩어져버린 것이다.
“핫.”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독왕의 암기는 이벽의 의식을 제압하고자 악몽을 일으켰으나 그 속에서 이벽은 또다시 나아갈 길을 찾고 말았다.
공교롭게 느껴질 만큼.
기연은 거듭해서 찾아왔다.
욱씬.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벽은 아직 몸의 통제권을 되찾지는 못했으며, 몸을 안쪽에서부터 갉아먹는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환영은 무너졌으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당가의 마당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다’.
심독을 파훼했다 한들.
그것을 이루고 있던 무형지독은 여전히 몸과 머리 안에 있었으며, 선천의 힘으로도 그 독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그 방법 또한.
이미 머릿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이벽이 하오문 수호대에게서 전수받은 기예는 적파심공과 만월무변심공 외에도…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휘이이이.
기억 속 어딘가에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308. 재앙의 도래 (1)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당가가 의혈맹을 배신했다―!!”
“당가는 더 이상 우리의 일원이 아니다―!! 고로 누구든 놈들을 따르는 자는 의혈맹의 적이다!”
당가의 대문 밖.
팽가의 참마일도 팽무옥은 돌연 당가주 십절군자 당명오에게 기습을 가했으나, 결국은 암기의 독에 적중당해 꽁무니를 뺐다.
이에 물론 당명오는 곧장 그 뒤를 쫓아 마무리를 지으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당가를 둘러싼 무인들 사이로 소란이 터져 나왔다.
채애앵, 콰아아앙!
“커… 커어어억―!!”
“이, 이 비겁한 놈―!!”
그리고 삽시간에 고성과 혈향이 번져나갔다. 찰나의 순간, 당가의 문 바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타다닷.
“가,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때, 바깥의 소란을 눈치챈 당가주의 직속 정예 무인들이 대문 바깥으로 몰려나왔다.
“…나는 괜찮다. 허나 사태가 꽤 어지럽게 되었구나. 너희들이 상황을 진정시켜줘야겠다.”
“존명!”
타아앙.
당명오는 명령을 내렸고, 당가의 무인들이 땅을 박찼다. 아수라장이 된 무인들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콰아앙!
허나 당가 무인들의 참전에도.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물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단 팽가뿐 아니라 이 자리에 모여있는 모든 이들은 오랜 시간 당가를 따르던 남서 지역 무가의 무인들이었다.
상호 간의 교류는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허나.
팽무옥이 위기에 몰린 순간, 몇몇이 그와 유사한 살기를 내뿜으며 막무가내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때문에.
난전 중임에도 피아 구분이 쉽지 않았다. 이내 상황을 지켜보는 당명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순간, 믿고 있던 이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당명오를 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작금의 ‘시의적절함’이었다.
비룡대주 이벽이 당가에 찾아왔고, 이에 아버지인 독왕 당평세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절대자가 서로를 상대하느라 ‘힘이 빠지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난전이 시작되었다.
명확한 뜻을 지닌 ‘누군가’가 뒤에 있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일 리 없는 것이다.
‘황보세가가 설마……?’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의혈맹주 황보혁이 힘을 끌어모으기 위해 알게 모르게 ‘선을 넘나들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당명오는 모른 척했다.
명령에는 따르되, 당가의 핏줄들이 깊이 관여하지는 않도록 선을 두는 것이 당명오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여타 세가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로 섞이지 않는’ 당가의 입장에 대해, 권왕은 그간 이렇다 할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가에는 독왕이 있다. 고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허나 오늘.
이와 같은 결과가 벌어졌다.
또한 저들의 배신이 하루 이틀 만에 갑작스레 이뤄졌을 리 없다. 아마도 퍽 오랫동안 물밑작업이 있었을 터였다.
말인즉슨.
어쩌면… 마침내 ‘충분한 힘’을 손에 넣은 황보세가에 있어 당가는 ‘버리는 패’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타닷.
“가주님!”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당명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촌형제인 일수멸혼 당청이 대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아, 아버님은?”
“여, 여전히 그대로이십니다!”
“…….”
독왕과 이벽은.
더는 요란하게 검과 암기를 부딪치지는 않고 있었다. 허나 절대자들 간의 싸움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독왕은 ‘절기’를 펼쳤고.
이벽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주저앉아 눈을 감은 이벽과 그런 이벽을 마주한 독왕 사이에서는 기실 조금 전보다 더욱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누구도 방해하게 두어선 안 된다.
타아아앙.
“크허허허엉―!!”
그때였다.
좌측에서 범과 같은 포효와 함께 누군가 달려들었다. 조금 전 꽁무니를 뺐던 팽무옥이었다.
“……!”
일순 당명오는 당황했다.
분명, 자신의 암기가 팽무옥의 뺨을 스쳤고 독이 스며들었다. 고로 지금쯤 피를 토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크아아아아―!!”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팽무옥의 뺨은 시퍼렇게 부풀어 올라 있었을 뿐, 기세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흉포했다.
타아아앙.
“주… 죽어!! 모, 모조리 산채로 씹어먹어 주마―!! 당명오 네놈도, 비룡대주도……!”
훅, 핏빛 기운이 맡아졌다.
그 순간 당명오는 직감했다.
어쩌면… 이 핏빛 기세의 근원에 해당하는 무공은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후욱.
다음 순간, 당명오의 왼손이 뻗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암기가 소리 없이 분출되었다.
퍼어어억.
팽무옥에게 적중했다.
“…커억!”
퍼억, 퍼억, 퍼어억.
허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같은 일이 연이어 반복되었고 몇 자루의 암기가 팽무옥의 관절 곳곳에 박혀 들었다.
“한심하군, 팽무옥. 모처럼 내가 방심하고 있었거늘 그렇게 요란을 떨면서 달려들면 무슨 의미가 있나?”
“크으윽, 크아아아악―!!”
팽무옥이 악을 내질렀다.
허나 그 의지와는 달리, 관절 사이사이를 파고든 암기는 독을 내뿜었고, 움직임은 점점 부자연스러워졌다.
내성이야 있건 없건.
제 놈이 비룡대주와 같이 만독불침에 근접한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쓰러질 때까지 때려 박으면 그만인 것이다.
퍼어어억, 퍼어억.
“끄으으으……!”
이내 팽무옥이 무너졌다.
버둥버둥.
“으으으, 죽여, 네노옴……!”
허나 땅을 뒹굴면서도 팽무옥은 당명오를 향해 마구잡이로 손을 뻗었다.
“…….”
당명오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세는 조금 전보다 높아졌으나, 그 대신 마치 이지를 상실한 듯한 모습이 되었다.
차라리 물러서는 척하며 허를 찌르고 거리를 좁혔던 조금 전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허나 어찌 되었건 기습에 당하지 않는 이상, 당명오가 팽무옥 따위에 애를 먹을 이유는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커어억―!!”
그때, 다시 인파 속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당가의 무인들이 나섰음에도 소란은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갔다.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고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
이대로 혼란이 증폭되면… 자칫 당가를 배신하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으득, 당명오는 이를 악물었다.
자초지종이야 어찌 되었건 우선은 당가의 코앞에서 벌어진 이 싸움을 무마해야 한다.
허나 적들이 팽무옥과 마찬가지로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니고 있다면… 휘하 무인들만으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청아. 문의 사수를 네게 맡기마.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 당가의 문을 넘어서지 못하게 해다오.”
당명오가 뒤를 향해 말했다.
흠칫, 당청의 표정이 흔들렸다.
허나 이내 굳은 얼굴을 보였다.
“예 형님! 아, 아니… 가주님! 걱정 마십시오! 이 한목숨 걸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내겠습니다!”
“…믿고 있으마.”
훗, 당명오가 가볍게 웃었다.
어쨌거나 믿음직한 아우였다.
타아앙.
다음 순간, 당명오의 신형이 제비처럼 뛰어올랐다. 한달음에 난전의 한복판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우우웅.
“갈―!! 더러운 배신자들은 들어라!! 겁도 없이 당가의 앞마당에 피를 뿌린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는가―!!”
당명오가 일갈했다.
일순 웅혼한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일대로 퍼져나갔고 한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허나 당명오의 시선 또한 그들을 향했다. 날카로워진 눈이 면면을 훑었고, 기세를 읽어내었다.
피 냄새가 나는 이들을.
삽시간에 식별해내었다.
훅.
“하앗―!!”
다음 순간, 당명오가 양팔을 뻗었다. 소매 안쪽에서 열 자루의 암기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휙, 휘이익.
“커억―!”
“커어어억!”
암기가 장내를 파고들었다.
무인들의 사이사이를 배회하며, 정확히 당명오가 노린 이들만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파파팟.
“…크, 크윽!”
그제서야 변고를 눈치챈 적들이 황급히 인파 속에 몸을 숨기려 했으나, 의미 없는 시도였다.
열 자루의 암기는.
하나하나가 모두 당명오의 손가락과 연결되어있었으며, 모두가 작은 이기어술이기 때문이었다.
푸욱.
“…커억!”
또한.
반드시 상대의 급소를 노릴 필요조차 없다. 어떻게든 스치기만 한다면 몸 안으로 독이 파고든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콰아아아아앙!
“죽어라 더러운 배신자야!”
“…커억!”
독에 의해 기세가 흐트러진 적들의 마무리는 여타 무인들과 당가의 부하들에게 맡겨도 충분한 것이다.
허나 물론.
나서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싸움에 나선 이상 당명오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타앙.
마침내 당명오가 전투의 한 복판에 내려앉았다. 날카롭게 선 두 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뒤에 황보가가 있건 혹은 무엇이 있건, 감히 제까짓 놈들만의 힘으로 당가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에 본때를 보여줘야―,
서걱, 투욱.
허나 그때였다.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당명오의 귀를 스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소리였다.
허나 그럼에도.
당명오는 그 소리를 확연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 또한 저절로 떠올랐다.
그것은.
그 작은 소리가… 사람의 목이 베여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풀썩.
곧이어.
다시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목을 잃은 육신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휙.
당명오는 그 즉시 고개를 돌렸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소리의 진원지는 조금 전,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청아?”
그리고 이내.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당명오가 발견한 것은… 당가의 정문 앞을 나뒹굴고 있는 당청의 모습이었다.
생사여부를 확인할 것도 없이.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
“……!”
당명오의 눈이 흔들렸다.
당청이… 죽었다. 또한 그는 당명오의 사촌 형제이기 이전에 당가를 대표하는 절정고수 중 한 명이었으나 심지어 ‘싸우는 소리’ 따윈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자리를 떠난 그 순간.
마치 들가의 잡초를 뽑듯, 당청의 목이 너무 쉽게 땅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죽립을 눌러쓴 작은 인영이었다.
“크… 으으으―!”
이내 당명오는 상황을 인지했다.
응당한 분노가 차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독왕을 닮아 온화한 인상을 지닌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타아앙.
“이노오오오옴―!!”
당명오가 날아올랐다. 그 즉시 흉수임에 분명한 예의 인영을 향해 쇄도했다.
후우욱.
그리고 쏘아지는 당명오의 두 팔로 열 자루의 암기가 스스로 주인을 찾듯 도로 회수되었다.
후우우욱.
그리고 다시 정면으로 쏘아졌다.
타아아앙, 타아아아앙!
“……!”
허나 당명오의 미간이 흔들렸다.
이기어술로 쏘아낸 열 자루의 암기가 인영의 몸에 닿기도 전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부딪혀 막혀버린 것이다.
휙.
다음 순간.
인영의 시선이 당명오를 향했다. 죽립에 의해 얼굴의 생김새는 가려져있었다. 허나.
“…크흐.”
인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툭, 발치로 당청의 시체를 건드렸다.
“이, 이노오오옴―!!”
슥.
당명오의 손에 비수가 쥐어졌다.
“네놈… 네놈이 누군지 알 것 없다! 감히 당가의 문 앞에서 당가의 피를 흘린 죄, 천참만륙을 내어 갚아주겠다―!!”
쐐애애액.
이내 인영에게로 도달한 당명오의 손이 뻗어졌다. 뱀처럼 휘어지며 인영의 몸을 향해 파고들었다.
덥썩.
“……!”
허나 다음 순간.
당명오의 손이 멈추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게 뻗어진 인영의 손이 그대로 당명오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뱀이 뱀을 무는 듯’했다.
우득, 탱그랑.
그리고 당명오의 손에서 비수가 떨어지며 땅에 부딪혔다.
지금 이 순간, 당가주이자 초절정고수인 당명오의 손목이 너무 쉽게 부러져버린 것이다.
“크… 으으……!”
허나.
당명오는 자신의 손목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지조차 못했다.
마침내 죽립에 가려진 인영의 두 눈을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 당명오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눈빛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사아아아.
뱀이 다시 웃음을 드러냈다.
턱 주변의 피부에는 붉게 달아오른 무수한 혈관들이 마치 실뱀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그 순간.
당명오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분노에 눈이 멀어 앞뒤를 재지 않고 달려들어도 좋은 이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주친 순간, ‘전력으로 달아나야만 하는’ 상대였다. 허나 때는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스스스스.
다음 순간, 당명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뱀에 온몸이 꽁꽁 휘감기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다.
그 까마득한 존재 앞에서.
자신은 그저 ‘먹잇감’이었다.
‘…잡아먹힌다.’
당명오는 죽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