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47)
47화. 무적파 (1)
호남성 회화.
성도의 관문을 지나 네 명의 인영이 마침내 도시 외곽에 모습을 드러냈다.
추레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오랜 노숙의 흔적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한 그 모습은 이벽을 비롯한 비룡대 일행이었다.
번쩍!
“케헤헥! 도시다! 밥! 고기! 술! 이 동네 술 다 내 거야! 케헤헤, 에헤헤헤!”
파진성이 머리 위로 두 팔을 쭉 뻗으며 소란을 피웠다.
굳이 말리지는 않는다.
실상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다.
여정 내내 비무에 비무를 거듭하다 보니 호남성 끄트머리까지 도착하는 데에만 근 한 달을 넘게 소모하고 말았다.
“…노숙에는 이골이 나는군.”
“아하하, 새삼 무모한 짓이었네요.”
이벽이 말하자 언미희가 답했다.
공손수의 뜻에 따라 일행은 여정 중간 암영각의 지부에 들렀다.
그곳에서 공손수는 산적과의 충돌 건에 대한 보고를 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일행은 단 한 번도 도시를 거쳐오지 않았다.
도시는커녕 경로 위에 있는 마을조차 일부러 피해 가기 일쑤였다.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선 마음껏 비무를 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노숙을 선호하게 되었던 것.
“그래도 보람은 있었어요. …물론 전부 다 공자 덕분이지만요.”
“…그렇지는 않소만.”
“아뇨, 그런 게 맞아요.”
언미희가 웃었다.
이벽을 향한 따뜻한 눈빛에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호의가 가득 담겨있다.
세 사람은 경쟁적으로 이벽에게 매달려 비무를 요청해왔고, 이벽은 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 사람은 약간의 성취를 얻었다.
일류의 초입에 머무르고 있는 파진성과 공손수는 본인들의 약점을 명확히 인지한 눈치였다.
개개인으로서도 진보했지만, 특히 두 사람의 합격은 간혹 이벽을 조금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미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애초에 둘보다 한 수 정도 위에 있던 언미희는 일류의 숙련 단계를 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실마리를 얻은 듯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가로막은 벽은 더욱 높고 두터워짐을 고려했을 때, 그녀의 재능은 남다르다.
언미희와 손속을 나눌수록, 이벽은 낙검문의 사형제들이 떠오르곤 했다.
“…….”
비록 성취와는 관계없지만, 일단 비무는 이벽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지겹도록 검을 휘둘렀다.
그 덕분에 앞서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생각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덥석.
“오라버니. 근 한 달 만에 제대로 된 식사인데 혹시 먹고 싶은 거 있나요~?”
“…….”
공손수가 이벽의 팔을 붙들었다.
방심하면 붙들린다. 그녀의 기습은 은밀함에 치중한 그 무공과 함께 더욱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말만 하세요! 사모하는 오라버니를 위해 소녀가 뭐든지 사드릴게요!”
“…공손 소저, 그만 해요, 매번. 공자가 곤란해하잖아요?”
“언니, 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네?”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요.”
공손수가 조금 뚱해진 얼굴로 이벽과 언미희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래서 대체 둘이 무슨 사이예요?”
“그, 그게 무슨……?”
“대체 ‘공자’라는 애매한 호칭은 어디서 온 거죠? 애초에 오라버니는 언니랑 같은 하오문 소속도 아니라면서요?”
“…….”
언미희가 입을 다물었다.
이벽도 시선을 피했다.
마땅히 설명할 방법은 없다. 이진천이나 수호대에 대한 얘기를 함부로 꺼낼 수도 없다.
“뭐, 됐어요. 문파 내부의 예민한 문제라면야 굳이 더 캐묻진 않을게요.”
“…고마워요.”
“대신에 딱 말해요, 언니. 언니는요, 동료 이전에 여인으로서 오라버니를 노릴 생각이 있나요?”
“뭐, 뭐—?!”
“아, 물론 저는 노리고 있어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후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공손수가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언니도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 어느 동네를 가던 여인들이 지겹게 달라붙을걸요?”
“…왜죠?”
“그야 당연하잖아요. 약관도 되기 전에 이미 절정, 심지어 출신 문파도 거대세력이 아닌 개천의 용이고… 무가의 여식 입장에선 그야말로 천하제일 데릴사윗감이거든요.”
“…….”
“덤으로 얼굴까지 모난 곳 없고. 뭐, 가끔 지나치게 목석같은 게 좀 단점이긴 하지만 무인으로선 나쁠 게 없죠.”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당하면 오히려 할 말이 없다.
“…본인 면전에다 대고 잘도 그런 얘길 하는군.”
“솔직한 게 제 장점이거든요. 귀엽지 않나요?”
“…….”
이벽이 힘겹게 짜낸 한 마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길을 걷는 일행들 사이에선 다시 얼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헹!”
그때 앞서가던 파진성이 콧방귀를 뀌었다.
퉷, 침을 뱉는다. 꾸깃하게 꾸겨진 미간으로 보아 금세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다.
“파 소협, 부러워요?”
“케헹! 부럽기는 개뿔! 나도 해남 저잣거리에 가면 말야! 나 좋다는 여자들이 아주 그냥 줄을 선다고!”
“혹시 밤의 저잣거리요?”
“…어.”
“그야 돈 많고 머리 나쁜 봉이 나타나면 기루의 여인들이 앞다투어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
파진성이 픽 고개를 돌렸다.
“파 소협, 삐졌어요? 농담~”
깔깔 웃으며 공손수가 파진성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아, 하지 마! 씨바, 더러워서 진짜!”
“괜찮아요~ 파 소협도 비록 못생겼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절정고수 되면 인기 많아질 수 있어요~”
“…진짜?”
두 사람의 사이는 퍽 허물이 없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실전과 비무를 겪고 손발을 맞추면서 거리감은 상당히 좁혀진 모양이었다.
파진성은 해남검파의 제자이다.
그러나 일행들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그 껄끄러운 사실은 조금씩 잊혀지고 있었다.
첫인상을 넘어서는 관계.
공손수와 파진성, 두 사람은 이벽에게 있어서도 단순히 일행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다.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휙.
그러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언미희가 소리 나게 이벽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다소 창백해진 언미희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괜찮소?”
“…네, 네?! 뭐가요?!”
“…….”
이벽이 꺼낼 말을 생각하던 찰나였다.
“케헤, 뭐야, 이 동네? 살짝 기분 더러워지는데?”
“저기… 오라버니? 언니? 여기 뭔가 이상한데요?”
앞서가던 파진성과 공손수가 사뭇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우리, 사람들한테 대놓고 꺼려지고 있는데요?”
“…….”
이벽과 언미희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인파들이 좀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정오를 한참 지났다곤 해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삐 사라지고 있다.
어쩌다 일행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잰걸음으로 멀어진다.
철컥, 쿵.
뿐만이 아니다.
일행이 거리를 지나가면 그 주변 여기저기에서 어김없이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쾅!
“에이 씨, 이보쇼!”
그때, 대로변의 어느 객잔 앞에 선 파진성이 대뜸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응답은 없었다.
콰앙—!
“에이 씨! 장사 안 하냐고!”
발로 걷어차자 문이 열렸다.
파진성을 필두로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에 있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화들짝 놀란다.
“이보쇼! 여기 객잔 아냐?!”
“예? 그, 그게, 맞긴 맞는데…….”
“아, 배고프다고! 왜 사람이 지나가는데 문을 잠그고 지랄이야! 현기증 나니까 빨리 주문받으쇼!”
“아… 예이예이!”
파진성이 눈을 부라리자 주인의 시선이 파진성의 허리춤에 가 닿았다.
그곳에 걸려 있는 검을 확인한 순간 안색이 창백해지며 주인이 허리를 숙였다.
일행들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뒤, 황급히 주방으로 사라지는 주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꺼리는 건 ‘우리’가 아닌 ‘무인’인 것 같네요.”
공손수가 말했다.
“그야 양민의 입장에서 무림인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건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요. 이 동네는 좀 유별난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헹, 알 게 뭐야? 우리가 무슨 파락호도 아니고 돈 주고 밥 사 먹겠다는데 대접이 왜 이러냐고? 앙?!”
“지당한 말이네요. 근데 파 소협? 귀양에서 만났을 땐 대체 왜 그러고 계셨을까요?”
“…케헤, 그 얘기 그만 좀…….”
일행들 사이로 몇 마디가 오고 가는 사이, 주인에 의해 식사가 준비되었다.
달리 점소이는 없는 듯했다.
일행은 대화를 시도했으나 주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한 채 고개를 휘저으며 멀어졌다.
묘한 찜찜함을 제쳐둔 채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분위기와는 별개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근 한 달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이니만큼 나쁘기도 어렵다.
콰득콰득.
파진성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웠다. 언미희와 공손수 역시 그 틈새 속에서 슥슥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이벽도 식사를 즐겼다.
“끄윽.”
한 식경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식사는 일각 정도 만에 끝나버렸다. 파진성이 거하게 트림을 했다.
배가 차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통통 두드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 어쩔 건데? 이 지랄맞은 동네에서 뭘 하면 되는 거야?”
“그야… 이 동네 사파에 찾아가 봐야겠죠. 귀파의 귀한 제자를 우리 비룡대에 맡겨주십사 하고.”
애시당초 호남성까지 찾아온 이유는 비룡대의 세력을 키우고자 함이었다.
호남은 본래 패왕가의 영역에 해당했으나 패왕가가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활동을 접으면서 영역의 구분이 다소 무색해진 곳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흑천방이나 해남검파의 개입을 피해 세력을 늘릴 최적의 장소이기도 한 것.
“동네 사파라는 건……?”
“네, 언니. 그러니까… 이 근방에는 무적파(無敵派)라고 하는 세력이 가장 세가 강하다고 하더라구요.”
피식, 파진성이 웃었다.
“케헤! 무적파라니. 이름 한번 거창한데 그래? 근데 왜 난 처음 들어보지?”
“그래 봬도 호남성 서쪽에선 가장 알아주는 문파예요. 뭐, 솔직히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요.”
하아, 말을 잇던 공손수가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탁자에 팔을 세우고서 턱을 괴었다.
“하기는 도움은커녕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일 녀석들을 비룡대에 받아들이는 게 과연 맞는지도 이제 와선 잘 모르겠네요.”
“…….”
규모 혹은 실력.
힘을 키운다는 건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패왕가를 부활시켜 사패련 내부의 세력다툼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면, 그저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비룡대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을 떠나, 해당 문파를 패왕가의 영향력 아래 엮어두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흑천방 측에서도 ‘빼앗기다시피 한’ 비룡대가 성장하는 것을 눈뜨고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실상 사패련으로부터 방치되어왔던 호남의 세력들이 이제 와 순순히 협력해 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공손수는 자신이 있었다.
사패련주이자 패왕가주인 혁군악의 지지를 받은 이벽을 전면에 내세운다.
패왕가가 활동을 접은 지 삼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징성은 충분하다.
패왕가의 계승과 부활.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여타 세력들에게 있어 그렇게 인식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암영각 내부의 암투를 잠재우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손수는 이벽에게 걸었고, 위험을 무릅쓰며 비룡대에 남았다.
그러나.
덜컥, 아무것도 아닌 마을에서 느닷없이 검강을 쓰는 절정의 산적을 만나 죽을 뻔했다.
충격적이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그 사건 자체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그 뒤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세력의 존재였다.
“…….”
공손수는 이마를 짚었다.
정사연합이 마교를 물리친 이래 근 오십여 년간 무림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알 수 없는 거대세력이 산적의 탈을 쓰고서 일어나고 있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면.
명분 같은 건 절정고수를 수족으로 다룰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과한 생각이면 좋겠지만…….
이제까지의 평화로운 무림과 그렇지 못한 무림.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고서 움직여야 한다.
공손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어깨가 무겁지 않을 리 없다.
“…왜 그러지? 어디 안 좋은가?”
그때, 이벽이 말을 꺼냈다.
공손수는 이벽을 돌아보았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이 사내를 택한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일 테다.
고작 열여섯에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같은 절정고수를 제압해버린 불세출의 기재.
무림사를 모두 통틀어본들 이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애초에 그 재능이 아니었다면 이미 비룡대라는 이름은 이름 없는 산중에 시신으로 묻혀버렸겠지.
“…아니에요, 오라버니.”
공손수는 웃었다.
용이다. 붙잡아야 한다.
두두두두!
그때였다.
문 바깥에서 거친 소란이 일며 공손수의 복잡한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것은 인파의 발소리였다.
언뜻 짐작하기에도 수십 이상.
심지어는 하나의 집단이 아닌 듯 했다. 대로의 양측 방향에서부터 울리는 발소리가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뭐라뭐라 시끄럽게 외치는 목소리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목소리에는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가득하다. 그리고.
콰앙—!!
이내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집단과 집단이 맞부딪힌다.
그리고 한동안 부수고 부서지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이어졌다.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일행들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이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한 원인이 지금 저 바깥에 있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