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
5화. 낙검진천신공
탕! 탕! 탕!
“미리 말해두지만.”
탕! 탕! 탕!
“딱히 네가 예쁘거나 그래서 받아준 건 아니야.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방망이가 연신 젖은 빨래를 두드린다. 안정적인 타격감에서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느껴진다.
달그락, 달그락.
“…비무라면 내가 지지 않았나?”
개울물에 접시를 헹구며 이벽은 말했다.
“아니, 내 패배야. 애초에 목검 대 목검의 승부에 다른 무기를 쓴 순간 반칙이지. 설령 실전이었다 쳐도 칼이 몸에 닿은 순간 나는 전투불능이 되었을 거고.”
“…….”
석연치 않다.
그렇게 따진다면, 상대에게 ‘숨은 한 수’가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 역시 변명할 수 없는 패배의 원인이다.
타앙!
방망이 끝이 이벽을 향했다.
“왜, 불만 있어? 받아준다는 데 왜 군말이야? 아니면 이제 와서 떠나고 싶어졌니?”
“아니. 그건 아니다.”
“하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제갈소미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는 내 사제고 나는 네 사저야. 경어를 쓰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말조심해.”
“…알겠다.”
“흥, 좋아.”
탕! 탕! 탕!
달그락, 달그락.
그리고 한동안 개울가에는 방망이 소리와 접시를 닦는 소리가 이어졌다.
흘끗, 이벽은 제갈소미를 바라보았다. 그녀 자신이나 혹은 무공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다.
허나 함부로 말을 꺼낼 순 없다.
이벽이 과거에 대해 섣불리 밝힐 수 없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어떤 사정이 있을지는 모른다.
“저기.”
찌릿, 따가운 시선.
“…사저.”
“응, 왜 꼬맹아?”
사저라.
처음 입에 담아보는 말이다.
“문주님께 단전이 없다는 건 정말인가? 문주님께선 내가 보는 눈앞에서 분명히 공력을 사용하셨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하아. 난 또 뭐라고.”
탕! 탕! 탕!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제갈소미의 시선이 다시 빨래 더미로 향했다.
“우리 막내 사제는 대가… 머리가 좀 부족하구나. 애초에 본인에게 단전이 없으니 비슷한 녀석들을 데려다가 제자로 삼는 거겠지. 그렇지? 그게 아니면 너나 나 같은 버린 몸들을 왜 필요로 하겠어?”
“…….”
“하지만 뭐, 이해는 해. 단전이 없는데 무공을 쓴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니까. 근데 그게 되거든. 그 인간은.”
그렇게 말하는 제갈소미의 어투에선 어딘가 모르게 회한이 느껴졌다.
그것은 한창 꽃다운 열일곱의 소녀에게서 나올만한 몸짓이나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입장에선 희망고문 같은 거야. 너도 아마 천재니 기재니 하는 소리깨나 들었겠지만, 그런 동네 천재 수준으로는 그 인간을 따라가기는커녕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
역시 혼란스럽다.
갈림길에서, 생명의 은인이자 신비고수인 이진천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전이나 내공을 되찾을 거란 헛된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평생을 삼류무사로 살다 간다고 해도, 검 이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혼란한 마음속에서 이벽은 아주 작은 열망 한 가닥이 슬그머니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뭐, 좋든 싫든 너 역시 곧 직접 겪어보게 될 거야. 그렇게 헛된 희망 속에서 몇 년 썩고 나면, 식모살이에 도가 터버려서 때려 치기도 어려워지는 거야.”
툭툭, 허리를 두드리는 제갈소미. 그리고는 옆구리에 빨래 바구니를 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가자, 꼬맹아.”
“…….”
멈칫, 접시를 쥔 이벽의 손이 굳었다.
“어? 뭐야? 설거지 다 안 끝났어? 아니, 너 설마 여태껏 씻은 게 겨우 그게 다야?”
이벽의 앉은 자리 한쪽에는 아직도 씻기지 않은 설거짓거리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모두가 ‘입문식’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세가의 소가주로 살아온 이벽이 빨래나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해본 적이 있을 리 없다.
퍽!
빨래 바구니가 내팽개쳐졌다.
“아악! 미치겠네, 정말! 곰탱이는 눈치라도 빠르지 이걸 언제 사람 만들어?!”
* * *
사흘 후.
내상을 비롯해 몸의 상태가 다시 호전되었을 즈음, 이벽은 제갈소미로부터 기별을 전달받았다.
저녁을 먹은 후, 어쩐지 기대에 찬 듯한 제갈소미와 혁대웅의 배웅을 받으며 이벽은 문주의 처소로 향했다.
“문주님. 이벽입니다.”
“오, 들어와라.”
드륵, 이벽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일순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는 온갖 약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벽에는 약재의 이름이 적힌 목함들이 빼곡하다.
그것은 무림문파의 주인이 머무는 처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영락없는 약방의 풍경이었다.
“오자마자 한바탕 했다며?”
이진천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화로에 주전자를 올리며 씩 웃는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거기 앉아라. 차라도 한 잔 끓여줄 테니까.”
꾸벅.
목례한 뒤, 이벽은 마주 앉았다.
“그래, 며칠 지내보니 어떻든?”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사흘간 이벽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이 낙검문은 결코 제대로 된 무림문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마을 아이들에게 삼재검이나 육합권 따위를 가르치고, 심지어는 무공이 아닌 글이나 잡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차라리 마을학당에 가깝다.
그나마도 문주가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가르치는 것을 비롯한 모든 일이 제갈소미와 혁대웅의 몫이다.
“끌끌, 말해 뭣하겠냐? 어처구니가 없겠지. 기연 운운하며 따라오라고 해놓고선 정작 본인은 코빼기도 안 비치니깐.”
“…….”
기실 이벽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 이진천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지금이 처음이었다.
평상시의 이진천은 마을의 유일한 의원 역할을 하며, 처소 안에만 틀어박혀 있거나 혹은 왕진을 나가기 일쑤였다.
“뭐, 네가 직접 겪은 대로 여긴 그런 곳이다. 그냥 평범한 산골 마을이고, 나는 그런 마을의 유일한 의원 겸 약장수 겸 한량이지. 내게는 그것 또한 중요한 삶이라서 말야.”
보글보글, 물이 끓자 이진천은 종이에 쌓인 찻잎을 한 움큼 집어 주전자 안으로 털어 넣었다.
“하지만 걱정은 마라. 어차피 낙검문주로서 내가 너에게 전수해줄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네 혼자서 해내야 할 일이니까.”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이벽은 진중히 시선을 마주했다.
“낙검진천신공(樂劍振天神功)이라고 하지.”
“낙검, 진천……?”
“이름이 많이 낯익지? 왜냐하면 내가 지은 이름이거든. 내가 만든 무공이기도 하고.”
“…….”
‘무공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정말로 무공의 경지가 하늘에 이른 일대종사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이벽의 상식은 자꾸 부정된다. 어느 정도 선에서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딱히 구결 따위는 없다. 초식도 없지. 말 그대로 가르침일 뿐이야. 그래서 무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긁적긁적, 수염을 만지작대며 이진천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는 문득 헛기침과 함께 어투를 달리했다.
“이벽, 내공이란 뭐지?”
“…천하만물의 기운을 갈무리하고 정제하여 자신의 몸 안에 거둬들인 것입니다.”
“그래, 맞다. 자연의 기운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 기운이 어떻게 해서 단전에 쌓이는 걸까?”
“…그게 무슨?”
“기운이란 본래 그 성질이 끊임없이 흐르는 데에 있지 한 자리에 고여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체내 365개의 혈도 중 단 하나일 뿐인 명문혈에선 유독 기운이 길들여진 것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것을 우리는 단전이라 부르지.”
“…….”
이벽은 침묵에 빠졌다.
그것은 여직 검을 익혀오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호흡을 통해 기운을 받아들이고, 심법공부를 통해 그것을 정제하여 단전에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어떤 의문도 없었다.
“답은 순환이다.”
쪼르륵, 이진천이 주전자를 기울였다. 찻잔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뜨거운 것은 위로, 차가운 것은 아래로. 모든 기운에는 제각기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그리고 단전은 정확히 신체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
“…….”
“그렇기에 기운은 단전 안에서 하나의 작은 순환을 이룬다. 대개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기실 단전 속에서 기운은 보이지 않는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이벽을 본 이진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얕은 웃음을 흘렸다.
“뭐, 어렵게 생각할 건 없다.”
그렇게 말하며 이진천은 찻잔을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들려던 이벽은 일순 눈을 의심했다.
이진천의 손에 들린 찻잔 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소리 없이 회전하는 찻물.
고요하다. 하지만.
“마치 작은 태풍 같지 않느냐?”
“…….”
파삭!
다음 순간, 찻잔에 금이 갔다.
“이런. 깨져버렸군.”
가볍게 손을 털어내는 이진천.
손에 쥔 채로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당연하다는 듯 가벼운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지? 찻잔이 깨졌으니 영영 차를 못 마시나? 물을 끓인 모든 시간들은 말짱 도로아미타불인가?”
질문이지만,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다. 이벽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럴 리가 있나.”
이진천이 한켠의 놋쇠 그릇을 가볍게 두드렸다. 탱! 맑은소리가 났다.
“순환을 담아낼 수 있다면, 밥그릇이건 요강이건 그릇의 종류 따위 무슨 상관이겠느냐?”
쪼르륵, 이진천이 다시 주전자를 들어 놋쇠 그릇에 차를 가득 따랐다.
“쭉 들이켜라. 몸이 맑아질 게다.”
“…감사합니다.”
이벽은 그릇을 받아들었다.
두 손으로 받고 들이켜자 그 즉시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내려갔다.
보통의 차가 아니다. 기혈을 감싸며 몸 안의 경로를 깨끗이 씻어내리는—.
퍼억.
그때였다.
무언가가 이벽의 배를 두드렸고, 시선을 떨구자 그곳에는 이진천의 일장이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탱그랑!
이벽의 손에서 그릇이 떨어졌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더없이 진중한 이진천의 얼굴. 그리고 불가해의 공력이 뱃속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야생마와 같은 기운이 이벽의 기혈을 타고 흐른다. 망가진 단전과 혈로를 마구잡이로 짓밟고 사정없이 내달린다.
상처를 후벼파는 아찔한 고통. 이벽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 이벽은 직감했다.
추궁과혈(推宮過穴).
자신의 내공을 타인의 혈도 안에 불어넣어 기의 흐름을 북돋아 주는 행위.
심지어 단순한 추궁과혈이 아니다. 쇠를 담금질하듯, 이진천의 기운은 이벽의 망가진 기혈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막혀버린 길을, 다시 뚫어냈다.
“…….”
입을 열어선 안 된다.
의식을 잃어서도 안 된다.
이벽은 눈을 감았다. 망가진 기혈을 억지로 잡아 뜯어내는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 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진천에 의해 유도되고 있는 기운이, 정확히 청강유엽공의 구결을 따르고 있다.
대체 어떻게? 세가의 무공을?
그러나 의문은 길어지지 않았다. 좌우간 스스로 이 흐름을 제압하지 못하면, 이벽은 이번에야말로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시험이라면.
평생을 갈고닦은 구결이다.
통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벽은 숨을 죽였다.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신중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기운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기운이 다시금 깨어진 단전을 스치는 순간, 이벽은 달려들었다. 미쳐 날뛰는 말에 고삐를 덮어씌웠다.
“큭.”
닫힌 입 사이로 답답한 신음이 새어나갔다. 그러나 이벽은 의식을 놓지 않았다.
매달려서, 버티고, 제압한다.
길들임으로써 통제하에 둔다.
휘오오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침내 흐름이 제어되기 시작했다. 마차의 바퀴가 이벽의 뜻대로 구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진천의 손은 이벽의 단전에서 거두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벽은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몸안을 가득 채운 충만함.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번쩍, 이벽의 눈이 뜨여졌다.
정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벽의 몸이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맨발로 달려 나간 몸이 연무장 거치대의 목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검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청강검식(淸江劍式).
발검식(發劍式).
직(直), 쾌(快), 강(强).
올곧고, 빠르며, 강하게.
청강검식(淸江劍式).
회검식(回劍式).
곡(曲), 변(變), 유(柔).
휘어지고, 현란하며, 부드럽게.
뻗어지고, 회수되며, 검끝의 잔상이 허공을 수놓는다. 청강검식의 정수가 비단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희열 속에서 꿈결 같은 검무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펼쳐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검결을.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검의 경로가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청강검식이 아니다.
가주직계, 선우세가의 비전.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그러나.
파스스스.
문득, 모래가 흩어지는 듯한 소리가 이벽의 귀를 울렸다. 그리고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며 멈춰섰다.
단전은 없다.
고로 티끌 하나 남지 않는다.
도도하게 흐르던 기운이 호흡으로, 피부로, 이벽의 전신에서 일제히 빠져나간다.
툭, 털썩.
“아아, 아…….”
목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벽의 몸도 함께 쓰러졌다. 땅 위에 엎드린 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때, 재미 좀 봤냐?”
눈앞에, 이진천의 발끝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막혔던 길을 다시 뚫어놓는 것뿐이다. 그 위에 순환을 얹는 건 네가 하기 나름이지.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는 말거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벽은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잃어버렸던 것이 잡힐 듯했다.
그러나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렸다.
“이벽, 과제를 주마.”
“…….”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른다.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고, 혹은 그냥 이대로 이 마을에서 평생 눌러앉아도 괜찮다.”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이진천을 올려다보았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무인의 길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너는 지금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할 거다. 알겠냐?”
“…네, 문주님.”
“음, 좋다. 낙검문 비전 전수 끝! 이제부턴 모든 게 네 마음에 달려있다. 아, 그리고 이제는 너도 우리 낙검문의 어엿한 일대제자이니 속가제자들을 지도하도록 해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