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6)
6화. 일대제자 이벽 (1)
다음 날 아침.
이벽과 제갈소미, 혁대웅 세 사람은 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함께 식사하는 것도 서서히 익숙해지던 찰나였으나 오늘의 밥상 위에서는 유독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탁!
“아 진짜! 밥맛 안 나게!”
제갈소미의 젓가락이 상을 두드렸다.
“야, 꼬맹이. 밥 먹어.”
“…….”
“막막하냐? 우린 2년째야.”
2년째.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밤, 이진천의 추궁과혈을 통해 이벽은 찰나의 순간 내공을 되찾았다.
일순 거대한 해방감을 맛보았고, 다시는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비전검식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빌린 힘은 썰물처럼 다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릇이 깨어진 몸에는 무엇도 남지 않는다.
허탈함과 상실감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험을, 제갈소미와 혁대웅은 이미 2년 전에 먼저 치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야. 그 인간, 딱히 더 해주는 것도 없고, 싸돌아다니느라 잘 보이지도 않지.”
“…….”
“붙잡고 캐물어도 길을 뚫어놨으니 이제는 네 마음에 달렸다는 둥. 무공의 본의를 생각해보라는 둥.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 거야.”
하아, 한숨을 내쉬는 제갈소미.
“그딴 말은 누가 못하냐고. 그건 그냥 사서오경 위주로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다는 얘기랑 뭐가 달라?”
소녀의 얼굴에 회한이 스쳤다.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하핫, 하고 혁대웅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그래도 문주님께서 없는 말을 하시는 건 아닐 거야. 원래 심오한 깨달음이란 말로써 전수되기엔 어려운 거니까…….”
“그래, 그래서 더 열받아.”
아드득, 이를 가는 제갈소미.
“그 인간은 진심으로 그딴 걸 조언이랍시고 하는 거야. 천재는 둔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 인간 입장에선 아마 우리의 재능이 맹꽁이 수준으로 보이겠지.”
“…….”
탁, 마침내 혁대웅의 젓가락마저도 밥상 위에 놓이고 말았다. 그리고 세 개의 입에서 제각기 다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침묵 속에서 이벽은 생각했다.
이진천, 생명의 은인. 가늠조차 되지 않는 절대고수. 그리고 이제는 그가 속한 일문의 문주이자… 약장수.
생각할수록 알 수 없다.
상식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주님은 대체 누구시지?”
이벽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꽤 늦은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 순간, 제갈소미와 혁대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마주했다. 피식, 웃으며 나란히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우리도 잘 몰라.”
“애초에 그냥 주워졌을 뿐이고.”
“…….”
“2년을 이곳에서 지냈지만, 여전히 그 인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어. 왜 이 마을에 있는지, 왜 약장수인지, 심지어는 이름이 본명인지 어떤지도 몰라.”
“초식을 보여주신 적도 없고.”
“무슨 일이 있건 죄다 무식한 내력으로 해결해버리니까. 그래서 출신 문파를 짐작할 수도 없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수.
무림에 기인은 많다고 들었지만.
“하아, 그래도 어쩌겠어. 아~ 내 인생 나락으로 떨어졌구나 싶었던 순간, 단전 없이도 절대고수가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눈으로 직접 봐버렸는데. 그리고 제자로 받아주기까지 했는데.”
제갈소미가 다시 젓가락을 잡았다. 시큰둥한 얼굴로 나물 한 가닥을 집어 올렸다.
“그게 썩은 동아줄이건 사이비 약장수건 붙잡지 않을 수가 없잖아.”
“사, 사이비라니. 사저, 문주님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이제 그만 좀…….”
“아, 시끄러, 곰탱아. 너는 배알도 없냐? 설거지에 밥하고 밭 갈고 빨래나 하면서 사는 게 그렇게 즐겁니?”
“…아하하.”
각자의 생각을 품은 채, 식사가 이어졌다. 그다지 입맛은 없었지만, 이벽은 꾹꾹 씹어 삼켰다.
그리고 밥상 위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즈음, 혁대웅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기. 벽아.”
“…….”
퍽 낯설고 친근한 호칭.
“그, 사실은 어젯밤에 네 검무를 봤거든. 미안해. 예의가 아닌 건 아는데…. 뭐랄까, 솔직히 대단하더라.”
이벽은 혁대웅을 돌아보았다.
어젯밤 그 순간의 기억은 마치 꿈결처럼 흐릿했다.
희열에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왜, 사저도 어제 그랬잖아. 난생처음 보는, 정말 흥미로운 검술이라고.”
순간 제갈소미의 얼굴에 윽, 하는 표정이 스쳤다. 잠시 혁대웅을 흘겨보다가는 이벽을 향한다.
“하아, 그래. 열 받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 대단하더라. 아마 너와 나 양쪽 다 단전이 멀쩡했더라도 나는 널 못 이길 거야.”
“…….”
그것은 과연 그럴까?
이벽은 확신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삼재검이 아닌 비도술을 제대로 겪어보고 싶다.
“저기,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혁대웅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사형제지간이고, 한배를 탔으니까. 앞으로 셋이서 같이 무공을 나누면서 정진하면 좋지 않을까? 응?”
“…….”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이 낫겠지. 혹시 모르잖아? 언젠가 우리가 내력을 되찾아서 낙검문의 이름이 강호무림에 우뚝 서게 될지.”
퍽 능청스러운 얼굴.
제갈소미는 그런 혁대웅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그래. 헛소리는 그만. 됐으니 얼른 밥상 치워라, 사제놈들아. 슬슬 고객님들 오실 생각이다.”
탁,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객’이란 게 누굴 가리키는 말인지는 이제 이벽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화정촌에 살아가고 있는 8세에서 15세 미만의 마을 아이들이다.
낙검문은 그 아이들을 ‘속가제자’로 삼아 기초적인 무공이나 천자문, 혹은 그도 아니면 놀이 등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이 내는 입관비나 나누어주는 물건 따위를 통해 이 문파의 살림이 꾸려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각오는 되었냐, 꼬맹아?”
“…….”
그리고 이진천의 말마따나, 이제는 이벽도 제자를 가르치는 역할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벽은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역시 그가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검뿐이다.
“명심해. 여기선 너를 먹여주고 씻겨주고 입혀주는 하인은 없어. 네가 먹은 밥값은 네 손으로 해야 하는 거야.”
“벽아, 그래도 문주님께서 우리에게 의미 없는 일을 시키지는 않아. 이것조차 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주기 위한 수업의 일환일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으이구, 속 편해서 좋겠다.”
* * *
짝!
“얘들아! 자, 주목!”
손뼉과 함께 혁대웅이 외쳤다.
“자, 정식으로 인사하자! 지난 며칠간 봐왔겠지만, 이쪽은 너희들의 새로운 사형이자 검술 사범인 이벽 사형이다!”
그리고 이벽을 향해 손짓했다. 꾸벅, 이벽은 연무장에 모인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벽이오. 잘 부탁하오.”
“아니, 잠깐. 왜 하오체인 건데?”
제갈소미가 지적하고 나섰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보다 어린 나이라 해서 처음 만난 이들에게 대뜸 하대를 할 순 없다.”
“…너, 나한텐 반말했었잖아.”
“그거야 사저가 먼저 했으니까.”
“…우와. 대강 느끼곤 있었지만, 이거 완전 벽창호네.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려서 환장하겠네.”
제갈소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기 있잖아? 네가 사형인데다 이제부터 가르치는 입장이니까, 편하게 말하는 게 서로에게 낫지 않을까?”
“그런가.”
그렇게 되는군. 이벽은 납득했다.
다시 고개를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정정하겠다. 이벽이다.”
“…….”
“…….”
연무장에 깊은 정적이 맴돌았다.
“아, 아하하, 그러니까 얘들아? 이벽 사형은 이래 봬도 엄청난 검의 고수란다. 그러니 검을 한 층 더 연마하고 싶으면 여기 이벽 사형에게서 배우도록 해라. 알았지?”
혁대웅이 수습하듯 말을 이었다.
말마따나 이벽은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본격적인 선우세가의 검을 가르칠 순 없다.
가르치는 것은 청강수련검식(淸江修鍊劍式)에 그칠 것이다.
이 역시 엄밀히는 선우세가의 무공이지만, 기초검식이란 대개 어느 검문을 가나 대동소이하므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물며 내공심법조차 없이 초식의 형만을 가르친다면 설령 세가의 무인이라 한들 알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
세가를 등진 지금, 이제 와서는 자기 자신조차 선우세가의 검을 계속 익혀야 할지 어떨지 분명하지 않다.
심신에 달라붙은 검로를 억지로 떼어내려 한들 쉬이 떼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뭐야, 별로 안 세 보이는데?”
“쟤가 우리 사형이라고? 왜?”
그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산골의 아이들은 덩치가 크다.
이벽 역시 십오 세 치고 키가 큰 편이지만, 아이들 중에선 이벽보다 나이가 어려도 덩치가 큰 녀석이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다.
“흥! 됐어요! 저런 비실비실한 녀석한테 배우긴 뭘 배워?! 대웅이 형! 그냥 늘 하던 삼재검이나 하고 얼른 공이나 차요!”
제일 앞에 선 아이가 외쳤다.
혁대웅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몸집이 크다. 그러자 아이들이 하나둘 맞장구를 친다.
“…….”
누구 한 명 이벽에게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이벽은 혁대웅과 제갈소미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
이벽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기초부터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려는데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나, 나는 배울래요.”
그때, 조막만 한 목소리 하나가 아이들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작은 체구가 슬그머니 이벽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여린 인상의 소녀.
“검술 가르쳐주세…요.”
“…….”
낯익은 얼굴이다.
이벽은 잠시 상념에 빠졌다. 엊그제 이벽에게 화전을 가져다주었던 그 아이인가.
“호, 혹시 여자애는 안되나요?”
“…아니, 괜찮아 그런 건.”
이벽은 잠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검술이나 무공에 달리 조예가 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이벽의 시선이 쏠리자 소녀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름이?”
“와, 왕수련이요.”
“익힌 무공은?”
“삼재검을 아주 조금…….”
소녀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소녀는… 지금 자신을 동정하고 있는 건가.
“…좋다. 기초부터 시작하자.”
계기야 어떻든 배우고자 하는 데 문제는 없다. 이벽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저, 저기요! 근데요!”
“왜? 궁금한 게 있나?”
“…벽이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
“…안 돼요?”
“네가 편한 대로 해라.”
불끈, 주먹을 쥐는 소녀.
이벽은 연무장 한쪽에서 목검을 집어 들었다. 가르칠 이가 한 명뿐이라 한들 적당히 할 생각은 없—
휘이익, 탁!
그때, 주먹만 한 돌멩이가 이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위험을 인지한 순간 이벽의 검이 돌멩이를 쳐냈다.
“…….”
“야! 장석두! 너 무슨 짓이야!”
“헹! 너야말로! 그런 수상한 녀석한테 검을 왜 배워! 헛짓거리하지 말고 얼른 이리 와!”
“시, 싫어! 네가 뭔 참견이야!”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돌을 던진 건 저 녀석인가.
제일 앞에서 떵떵거리며 소리를 치던 덩치 큰 녀석. 이벽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피하기는커녕 마주 노려본다.
“나에게 뭐가 불만이지?”
“뭐? 불만? 야 이 새끼야! 까불지 마! 보자 보자 하니까 형이랑 누나들 믿고 뻗대냐? 응?!”
“석두야!! 너 사형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니, 대웅이 형! 소미 누나! 이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정식 제자라도 그렇지 엊그제 들어온 녀석을 왜 우리가 사형 대접해줘야 해요? 예?!”
“…어, 그건.”
“그리고! 네까짓 놈이 가르치긴 누굴 가르쳐? 앙?! 나보다 약한 주제에 뭘 배우라는 건데?!”
장석두라 불린 아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흘끗, 이벽 뒤에 선 왕수련을 곁눈질하다 더욱 길길이 날뛴다.
퉤, 이벽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왜? 열 받냐? 그럼 한판 뜰래? 나한테서 사형 취급받고 싶으면 덤벼 봐 이 새꺄!”
이벽은 제갈소미와 혁대웅을 번갈아서 돌아보았다. 혁대웅은 쓴웃음을 지었고 제갈소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틀린 말은 아냐.”
저벅, 이벽은 다가섰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나는 이제 막 입문을 했을 뿐이니 비무를 통해 위치를 가늠하는 쪽이 이치에 맞겠지.”
“헤, 그래? 쫄보는 아니구나?”
한 발자국 다가오는 장석두.
이벽도 마주 다가가려 했다. 그때 이벽은 등 뒤에서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벼, 벽이 오빠, 하지 마요. 석두는 마을에서도 힘이 제일 세서 대웅 오빠 말고는 어른들도…….”
“수련아, 나를 잘 지켜보도록 해라. 지금부터 네가 배울 검을 조금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