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4)
55화. 악양루의 협상 (1)
흘끗흘끗.
정적 속에서 일도무문의 제자들이 이벽의 눈치를 보았다. 주춤주춤 다시 칼을 주워 들었다.
그러나 싸울 생각은 없다.
전의 같은 건 모두 사라졌다.
부딪힌 것은 단 일 수에 불과했으나 감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어, 얼마면 되겠소?”
“…농담이다. 그냥 가라.”
맨 앞에 선 사내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굳이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 우릴 그냥 보내주겠다고?”
“왜? 싫은가?”
“…….”
일도무문의 제자들은 침묵했다.
다짜고짜 먼저 칼을 들이댄 것은 이쪽이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해도, 상대가 그런 것까지 헤아려 줄 이유까지는 없다.
“…자비에 감사드리오.”
꾸벅, 일도무문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행여 이벽의 마음이 바뀔까 동료들을 추슬러 황급히 지붕을 벗어났다.
“자, 잠깐만요! 그냥 보내준다구요? 왜요?!”
그때, 쫓기고 있던 여인들 중 하나가 따지듯 입을 열었다. 이벽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소협! 놈들은 정파라구요! 우리 호남 땅을 무도하게 짓밟은! 적어도 손가락 정도는 자르던가 인질로 붙잡아서 본때를 보여줘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
“애초에 굳이 우리에게 의지하지 않았어도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달아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나?”
움찔.
여인의 안색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고 온 모양인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너희들 쪽의 정체가 궁금하군.”
“……!”
여인들이 한발 물러섰다.
어쨌거나 이벽이 보기에 가장 앞에 선 여인의 무위는 얼추 일류에 근접한 듯했다.
머릿수가 두 배였음을 감안해도 모두 이류에 머물러있던 일도무문의 제자들에게 당할 이유는 없다.
“…뭐야, 그런 거였어? 케헤!”
파진성이 이벽의 옆으로 다가섰다. 여인들과 대치를 이룬다. 일순 여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이벽의 한 수를 목격한 것은 일도무문의 제자들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파진성까지 끼어들었다간 맞상대는커녕 도망치기조차 여의치 않을 것이다.
타앗.
그때였다. 다시 또 한 명의 인영이 사뿐히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이벽과 여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실례, 이거 아무래도 저희 제자들이 비룡대주님께 신세를 진 모양이군요. 고마워요.”
“…….”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벽은 상대를 확인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여인의 모습은 이벽이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나살문주 탈혼백조 우진희.
조금 전, 금강회의 회의장에서 이벽들에게 날을 세우다 제일 먼저 자리를 떴던 인물이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나살문주께선 제자들을 끌어다 나를 시험이라도 한 것이오?”
“오호호, 그럴 리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우진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나 문득 웃음 사이로 서늘한 눈빛이 번뜩였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비룡대주께서 뭘 어쩌실 건가요? 직접 저를 벌이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못할 것도 없지.”
“이런 건방진!”
후욱!
다음 순간, 우진희의 손끝에 허연 기운이 어렸다. 그 즉시 내력을 담은 손톱이 이벽을 향해 쇄도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일식(拔劍第一式).
직검(直劍).
채앵!
“크읏?!”
그러나 이미 이벽의 검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톱과 검날이 맞부딪힌 채 부르르, 경련한다. 다음 순간 우진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손끝에 모은 내력이 미세하게 흩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상극에 해당하는 정파의 내력과 부딪힌 것 같다.
‘…그것도 도가계통.’
물러서야 한다.
우진희는 판단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고, 그것은 이벽에게 다음 초식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삼식(回劍第三式).
유검(柔劍).
스윽.
검 끝이 소리 없이 유영했다.
미끄러지듯 손톱을 비껴가며 이벽에게로 회수된다. 우수수, 그 검로를 따라 우진희의 내력이 모래처럼 깎여나갔다.
‘크읏.’
우진희는 직감했다.
물론 고작해야 한 수였을 뿐, 전력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인함.
‘이 나이에? 괴물이잖아, 이거?’
그 순간, 다시 시선이 부딪혔다.
그리고 우진희는 이벽의 눈빛에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느꼈다. 무공도 외모도 전혀 닮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훅!
다음 순간, 유영하던 이벽의 검이 다시 직선으로 쏘아졌다. 검 끝이 우진희의 목 끝에 닿았다.
“아악! 문주님!”
“오지 마! 물러서라!”
나살문의 제자들이 그 즉시 다가서려 했다.
파진성이 맞서려던 순간, 우진희가 손을 뻗으며 제자들을 제지했다.
“…….”
훗, 우진희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기색이 감돌았다.
“그래요. 저에게 벌을 내릴 자격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요. 그 나이에 그런 성취라니, 놀라운 걸 떠나 솔직히 믿기지 않아요.”
“…….”
“면목이 없군요. 제가 잘못을 인정한다고 하면 이 검을 치워주실 건가요?”
툭, 우진희의 손톱이 이벽의 검신을 건드렸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검을 거두었다.
누군가의 의도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지만, 입장을 생각한다면 마냥 적대할 수는 없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우진희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저희는 그저 비룡대주께서 진실로 저희를 도우러 오신 게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답니다.”
“…….”
“짐작하시겠지만, 이제는 저희가 사패련이란 이름만으로 어떤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버렸으니까요.”
나살문의 제자들은 경악했다.
그녀들이 아는 문주, 탈혼백조 우진희는 어느 누구를 앞에 두고서도 결코 꼿꼿한 허리를 숙인 적이 없다.
하물며 후기지수에게.
“물론, 원하신다면 이 무례에 대한 보상은 어떤 식으로든 해드리지요. 하지만 그 전에, 대주께 몇 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진희가 다시 허리를 세웠다.
이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느새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감돌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적대감은 아니었다.
“우선, 대주께선 어째서 저희를 도우려 하시는 거죠? 대체 어떠한 이득이 있어서?”
“…비룡대를 키우고 있소. 사패련의 무력대라곤 해도 흑천방이나 해남검파와는 노선이 다르니,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지.”
“그렇군요. 그럼 한 가지 더. 그렇게 모으고 키운 이후에는 그 세력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
이벽은 쉬이 답할 수 없었다.
화정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벽은 심마를 극복하고자 무림에 나서기로 결심을 했다.
비룡대주로서 패왕가의 입지를 다시 다져놓고자 하는 것은… 사형인 혁대웅을 위한 것이다.
“뭐, 좋아요. 지금 당장 말씀하시기 어렵다면야 그 질문은 미뤄두지요. 의도야 어떻건, 도움의 손길을 가려 받을 만큼 속 편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문득, 우진희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혹 비룡대주께선 사패련주… 아니, 패왕가주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 * *
금강회에 모인 호남권 사파세력들의 회의는 그날 이후로도 연일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의견조차 없이 절망적인 침묵만이 반복되던 이전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외람되지만, 좌중의 선배님들께 소녀가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비룡대주의 대리로서 참여 자격을 위임받은 공손수가 한 가지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물론, 처음에는 호남권 세력이 아니며 심지어 약관조차 못된 후기지수의 말에 그리 깊게 귀를 기울여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하오문의 지부장 염우길과 나살문의 탈혼백조 우진희가 이 의견에 적극 찬성하고 나서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웅성웅성.
사실상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가장 큰 축에 해당하는 두 사람이 지지하고 나선 이상 그에 반대할 만한 이는 많지 않다.
실상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미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일견 위태롭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그 의견이야말로 그나마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이내 적사파의 사혈검 전사욱 역시 마지못해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금강회주 마준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남은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견을 정파 측이 받아들이도록 하느냐에 대한 것이겠군요.”
회의는 마침내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고 밤이 지나, 호남 내 정사 간의 협상을 진행하기로 약조한 날이 밝았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 한 대가 악양의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다.
마차 안에는 이벽과 공손수, 그리고 하오문 악양지부의 지부장이자 마차의 주인인 염우길이 타고 있었다.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이벽은 새로 얻은 깨달음을 반복하여 정리하고자 했고, 공손수는 공손수대로 머릿속이 퍽 복잡한 듯했다.
정적 속에서 염우길이 코를 고는 소리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한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문득 공손수가 침묵을 깼다.
“뭐가 미안하단 말이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결국 여차할 때 의존할 건 오라버니의 무력뿐이네요.”
“…….”
“물론 이번 건 역시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한 번은 어찌어찌 넘긴다 해도, 오라버니의 진면목이 정사 양측에 노출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시선들이 쏠리고 말 거예요.”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벽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여태껏 공손수의 의견이 이벽에게 해가 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무적파에서의 일전을 통해 자신이야말로 그녀가 이끄는 길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솔직히… 그 여파가 어느 정도까지 흘러갈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다짜고짜 정파, 그것도 점창과 남궁세가를 동시에 맞서게 되다니…….”
표정은 복잡하고 심란했다.
보기 드물게도 공손수는 약간 풀이 죽은 듯했다.
‘무리는 아니지.’
제아무리 영특하고 남다른 삶을 살아왔다고 한들 고작 열다섯의 소녀일 뿐이다.
사소한 판단의 실수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강호무림에서 일행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중압감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
이벽은 손을 뻗었다.
공손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흠칫, 공손수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살짝 놀란 눈으로 이벽을 바라본다.
“괜찮아. 너를 믿는다. 지금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그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그만이다.”
“…….”
서로의 목적을 위해 함께하고 있지만,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흐르고,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낙검진천신공과 함께 이벽이 얻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무겁네요. 오라버니.”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공손수가 답했다.
“뭐가 무겁단 거지?”
“오라버니의 마음이요.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하물며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지만 오라버니가 먼저 제 몸에 손을 대준 건 처음이니까, 기대에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해볼까요?”
“…….”
이벽은 손을 뗐다.
공손수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어험, 험!”
그때, 염우길이 헛기침을 했다.
공교롭게도 잠에서 깨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급격히 머쓱해졌다.
다소 애매한 공기 속에서 마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저만치에 협상이 이뤄지기로 한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양루(岳陽樓).
과거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명망 높은 누각이자 오십여 년 전, 무림맹과 사패련이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장소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정사를 막론하고 먼저 당도한 세력의 무인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다.
상호 간 긴장감이 흐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들이 공기 속을 오가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