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3)
54화. 만월무변 (2)
쪼르륵.
이벽과 파진성은 술을 나누었다.
술을 따르고 섞는 내내 파진성의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말을 잇는 재주가 미천한 이벽으로서는 외려 듣기만 하는 쪽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어 병의 술이 비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벽은 생각의 흐름이 툭툭 끊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낯선 기분이 감돌았다.
마치 이곳에 있는 자신이 본래의 자신이 아닌 듯한 감각이 스쳤다.
이벽은 이것이 말로만 듣던 ‘취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훅, 선천의 힘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파진성이 볶은 야채를 와작와작 씹어 삼키고는 퍽 단호하게 외쳤다.
“잠깐! 내공으로 주독을 밀어내는 멋없는 짓을 했다간 난 아무 얘기도 안 해줄 거다! 케헤헤!”
“…….”
이벽은 내력을 가라앉혔다.
이제는 과연 파진성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모처럼의 경험이다.
계속해서 술잔을 들이켰다.
다시 몇 순배의 잔이 돌았다.
“끄윽!”
파진성이 트름을 했다.
“케헤헤헤…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겠구만! 케헤, 솔직히 말야. 대주 나으리, 그동안 너는 너무 딱딱했단 말씀이야!”
“…딱딱했다고?”
“그래 임마. 자고로 부러진 건 돌이킬 수 없게 된 거지만, 휘어지는 건 그냥 휘어진 거지 본질이 변하는 게 아니거든?”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흘리듯 파진성이 말했다. 검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뭐, 솔직히 나도 부러질 뻔하긴 했다. 케케케! 까놓고 말해서 거의 맛탱이 가기 직전이었지.”
“…….”
“고향에서 이놈 저놈 박 터지게 경쟁해 가지고 사패련까지 왔으니 당연히 내가 제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맹우강 그 자식한테 일수에 깨지고, 깨어나고 나니 그 맹우강은 또 나보다 어린놈한테 엉망으로 깨졌다더라고?”
파진성이 술잔을 들이켰다.
크으! 입가를 훔치며 잔을 소리 나게 내려쳤다.
“그 비참함을 네가 알겠냐?”
“…….”
피식, 파진성이 웃었다.
“뭐, 하지만 덕분에 내가 빌어먹을 해남의 개구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지금은 나름대로 고마워하고 있으니 안심해라. 케케케!”
“…그렇군.”
“자자, 마셔라!”
이벽은 마셨다.
파진성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결과적으로 딱히 팔절구궁필법과 관련한 화두에 대해 떠오르는 건 없었다.
단순히 착각이었던 건가.
결국 시간 낭비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룡대의 일원이 된 파진성에 대해 알아가는 것 역시 낭비는 아닐지도 모른다.
밤은 계속해서 깊어졌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어째서인지 심신이 홀가분해졌다. 온갖 고민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우욱!”
문득 파진성이 헛구역질을 했다.
“…케헤, 기분 좀 과하게 냈나. 그래, 딱 좋았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마시고…….”
“더.”
“…응?”
“더 따라라.”
이벽은 잔을 내밀었다.
“따르라고 했다.”
“…취, 취했냐?”
“다 마실 때까지 못 간다.”
파진성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러다 문득 이벽의 어깨 너머로 낯선 것을 발견했다.
“어? 저게 뭐냐?”
탕, 챙, 채앵!
저만치에 떨어진 다른 전각의 지붕 위에서 몇 개인가의 인영들이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파진성이 눈을 비볐다. 그러나 취기로 인한 헛것은 아니었다. 명백히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다.
일순 그중 하나와 눈이 부딪혔다.
탓, 타앗!
“어… 어어? 이쪽으로 오는데?”
“헛소리 말고 따라라.”
“아니, 진짜라니깐? 어어?”
당연하게도 무공을 익힌 듯, 지붕에서 지붕을 뛰어넘는 인영들의 움직임은 표홀했다.
보아하니 쫓고 쫓기는 관계인 듯했다. 탓, 마침내 전원이 이벽과 파진성이 자리한 전각의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소, 소협들! 도와주세요! 싫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불한당들이 쫓아와요!”
“뭐, 뭐야?”
앞서 쫓겨온 세 명의 여인들이 냉큼 이벽과 파진성을 뛰어넘었다. 방패막이처럼 그 뒤에 숨는다.
“뭐냐, 네놈들은!”
“우리는 일도무문(一刀武門)의 제자들이다! 저 악독한 사파의 계집들과 관계가 없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
뒤이어 쫓아온 듯한 여섯 명의 장한들이 냉큼 으름장을 놓았다.
“…케헤.”
파진성이 앞뒤를 돌아보았다.
후욱, 다음 순간 파진성의 주위로 옅은 안개가 서렸다. 모공 밖으로 취기를 몰아낸 것이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소저들은 사파고 얘네는 정파놈들이란 말이지? 이거 사고 치지 않는다고 약속했는데 사고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네? 어떡할까 대주? 어쩔 수 없는 거지? 앙? 케헤헤!”
뿌득, 뿌드득.
파진성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웃음을 흘렸다. 동의를 구하는 듯한 시선으로 이벽을 돌아보았다.
“히끅.”
이벽이 딸꾹질했다.
“빨리 따라라. 파진성.”
“…아니, 대주. 이제 그만 취기를 몰아내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까는 네가 그런 짓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지 않았었나?”
“아니, 그러니까 상황이…….”
“나는 아직 취하지 않았다.”
“…….”
지붕 위로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저벅저벅.
“이봐, 주정뱅이. 보아하니 술이 안 깬 것 같은데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장한들이 이벽에게 다가섰다.
가장 앞에 선 이가 칼끝을 이벽의 얼굴께에 들이댔다. 그러나 이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릿한 시선으로 올려다본다.
“언제 봤다고 반말인가? 술 먹는 데 방해된다. 비킬 생각 없으니 싸울 거면 저리 내려가서 치고 박던가 해라.”
“…….”
장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푸훗.”
여인들 중 하나가 웃음을 흘렸다.
“큭, 큭큭…….”
“풉, 푸훗!”
연달아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장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퍼억! 예고도 없이 이벽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벽의 몸이 하릴없이 옆으로 날아갔다. 데굴데굴 구른다. 하마터면 지붕 아래로 떨어질 뻔한 것을 여인 하나가 재빨리 붙들었다.
채앵!
“아니 근데 이 새끼가?!”
다음 순간, 파진성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장한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챙! 채앵!
“커윽?!”
해남의 검이 파도처럼 펼쳐졌다.
순식간에 서너 번의 충돌이 일었다. 일도무문의 사내가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 덤벼, 이 새끼들아! 케헤헤!”
“예, 예삿놈이 아니다!”
“사, 사형! 얘들아! 모두 쳐라!”
다음 순간, 일도무문의 무리들이 일제히 파진성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파진성이 움찔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다 덤비냐?! 이봐! 뭐해 소저들! 도와달라더니 구경만 할 거냐고?!”
버럭 파진성이 소리치자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들이 헛, 정신을 차렸다.
제각기 기운을 일으키며 일도무문의 사내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 * *
“…….”
이벽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보았다기보다는 대(大)자로 쓰러진 이벽의 눈이 향하는 곳에 밤하늘이 있었을 뿐이다.
그곳에 달이 보였다.
완전한 원의 형태로 차오른 달은 조금도 이울어짐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마음이 고요해졌다.
챙, 채앵!
저만치에서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치 아득히 먼 곳에서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벽은 생각했다.
저 정도의 적을 상대로 파진성이 당할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머릿수의 차이가 적지 않다.
‘일어나서 가세해야겠지.’
자신이 나선다면 시간을 끌 것 없이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 피아를 떠나 가급적 죽는 이가 생기는 건 피하고 싶다.
이벽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비틀.
그 순간 현기증이 밀려왔다.
힘겹게 일으킨 몸이 다시 기울었다. 털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벽의 두 손이 지붕 위를 짚었다.
“…….”
취하긴 취한 모양이군.
피식, 이벽은 웃음을 흘렸다.
아쉽지만 술자리는 끝났다. 내공을 일으켜서 취기를 털어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저 아래의 동정호에 비친 달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조금 전 올려다본 하늘의 달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마치 그 안에 밤하늘을 통째로 빼다박은 듯했다.
아니, 그러나 다르다.
같지만 무언가가 다르다.
“……!”
그 순간 직감이 스쳤다.
그 차이에는 자신에게 있어 무언가 중요한 화두가 숨어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벽은 호수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비친 달을 바라본다.
다시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이벽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호수에 비친 달이 물결을 따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호수 속의 달은 계속해서 조금씩 자신의 모양을 바꾼다.
그러나 호수 안의 달이 아무리 일그러지고 흔들린다 한들 하늘의 달은 원형을 잃지 않는다.
만월무변(滿月無變).
차오른 달은 변하지 않는다.
그 순간,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조금 전 파진성과 나눈 대화 몇 마디가 떠올랐다. 휘어진 것은 그저 휘어진 것일 뿐, 본질이 달라진 게 아니다.
달은 언제나 저 자리에 있다.
구름 뒤에 가려져 반쪽이 되거나, 혹은 아예 모습을 감춘다 할지라도 달은 결국 다시 차오르게 된다.
휘어지되 변하지 않는 것.
이벽의 뇌리에 깨달음이 스쳤다.
“큭.”
문득 이벽은 유쾌해졌다.
“크하하!”
큰 소리로 웃음을 뱉었다. 술에 취해 의식이 흐릿해지자 오히려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평소의 자신과는 다를지라도, 휘어진 것일 뿐 결국 자기 자신의 한 단면일 뿐이다.
문득, 이벽은 저 달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웅.
그 순간, 선천의 힘이 반응했다.
만월무변심공의 내력이 차오른다.
만월무변심공의 경로는 과거 이벽이 적파심공을 처음 운용했을 때처럼 기혈에 내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청강유엽공과 적파심공이 개척해놓은 경로를 이리저리 오가며 부드럽게 휘어지고 구부러진다.
그것은 정(正)도 사(邪)도 아니었다.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가 없다. 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검객의 몫이다.
후욱
이벽의 주위에 안개가 일었다. 만월무변심공의 내력이 혈도를 감싸며 술기운이 빠져나간 것이다.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 채앵!
“케헤, 케헤헤헤! 고작 그거냐 이 새끼들아?! 밥 굶고 왔냐!! 힘 좀 써 보란 말이야!!”
“흥!! 기세는 좋다만 혼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저만치에서 홀로 세 명의 적을 맡아 난전 중인 파진성의 등 뒤로 다가갔다.
빈틈을 타 이벽의 검이 뻗어졌다.
타앙!
파진성의 검보다 한발 빠르게 이벽의 검이 휘둘러지는 도를 막아냈다.
“…에엥? 뭐야?”
“물러서라, 파진성. 시험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검을 뻗다 말고 애매하게 멈춰선 파진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이벽의 또렷한 눈빛을 확인한 파진성이 씩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후우욱!
“흥!! 누가 보내준다 했느냐!!”
“싸움 중에 등을 보이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군!!”
그 순간, 적들의 도가 일제히 파진성의 등 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벽이 가세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먼저 처리하려는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이벽의 검이 더 빨랐다.
후욱.
검끝이 여덟 번 꺾어졌다.
아홉 방위 위에 먹을 칠한다.
초연서는 팔절구궁필법을 전수해주었으나, 그 초식의 이름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려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내라는 뜻이었을 테다. 그리고 이벽은 자신이 품은 답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만월(滿月).
타타탕!
이벽의 검 끝이 원을 그렸다.
그 순간, 동시에 찌르고 들어간 세 자루의 도가 거짓말처럼 일거에 휘어졌다.
“이, 이게 무슨?!”
“마, 말도 안 돼!”
그것은 마치 이벽의 검이 펼쳐낸 달의 끌어당기는 힘에 적들의 공세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양이었다.
일도무문의 제자들은 당황했다.
도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팔절구궁필법(八節九宮筆法).
삭월(朔月).
다음 순간, 달의 형상과 함께 끌어당기는 힘이 일시에 사라졌다. 뿐만이 아니다. 이벽의 검신이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비틀.
빨려 들어가는 힘이 일거에 사라지자 일도무문의 제자들은 일순 자세의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쿡, 쿡, 쿡.
“컥!”
“크윽!”
이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휘어짐 속에 숨어있던 검끝이 뻗어졌다.
적들의 손목을 가격했다.
다음 순간, 세 명의 적들이 일제히 손목을 부여잡았다. 탱그랑, 탱그랑, 손아귀에서 도를 떨어뜨렸다.
검으로 펼친다 한들 팔절구궁필법의 본질은 결국 붓끝으로 펼쳐지는 필법이다.
적의 공격을 휘어짐으로 끌어당겨 공격을 무마시키고, 붓끝의 일점으로 적의 혈도에 충격을 가한다.
허허실실(虛虛實實).
만월(滿月)과 삭월(朔月).
달은 차고 기운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건 감추건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상대를 내게 끌어당기거나.
내가 상대에게 다가가거나.
“…….”
좌중은 고요해졌다.
나머지 적들과 사파의 여인들 역시 일전을 멈추고서 넋을 놓은 채 이벽 쪽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는 파진성마저도.
이벽의 시선이 천천히 적들을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물러서는 적들.
성취는 퍽 만족스럽다.
이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라. 보내주겠다.”
“…….”
“아니, 술값은 물어내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