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6)
57화. 악양루의 협상 (3)
짝!
“자자, 여러분, 진정들 하시죠. 왜들 그렇게 열을 올리십니까요? 침착하게 갑시다, 침착하게.”
손뼉을 치며 정사협상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이벽의 옆에 앉아있던 비대한 몸집의 사내였다.
“실례이오만 대협께선……?”
“소인은 염우길이라 합니다요. 하오문의 악양지부장을 맡고 있습지요. 껄껄껄!”
철면개의 질문에 답하며 염우길이 넉살 좋게 웃음을 흘렸다.
“…흥, 침착은 무슨 놈의 침착? 우리가 지금 서로 덕담이라도 나누러 나온 줄 아시오?”
남궁천수의 날이 선 시선이 염우길을 향했다.
하오문이 개입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소식통을 통해 전달받은 사항이었다.
애당초 하오문이 쓸데없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개방이 나서기도 전에 모든 걸 신속하게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대관절 하오문이 작금의 사태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남의 은원에 함부로 끼어들어서 이러쿵저러쿵—”
“뭐뭐, 관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저희 하오문이나 개방도 응당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요?”
“뭐, 뭐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움찔, 남궁천수가 격하게 반응했다. 시선이 흘끗 철면개를 향했다. 행여 불똥이 엄한 곳으로 튀어선 안 된다.
“그게, 퍽 이상하지 않습니까요? 저희 하오문이나 개방이나 정보로 먹고사는 몸인데, 부끄럽습니다만 공격이 있기 전까지 흉수들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습니다요.”
“…….”
“즉, 정파의 여러분들께서 입으신 피해는 이곳에 계신 사파 여러분들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그만.”
그때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염우길의 말을 끊어놓았다. 정검문주 양호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면에 나선 남궁천수가 궁지에 몰릴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마침내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쪽의 비룡대주나 염 지부장께서 무슨 말을 하건, 사실관계는 명확하오. 어쨌건 우리는 피해를 입었고, 그 흉수로서 가장 유력하다 할 수 있는 이 자리의 사파 군웅들께선 본인들의 행위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소.”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우리는 많은 것을 원치 않소. 책임자의 엄벌과 더불어 피해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으면 그만이오.”
“…….”
“그리고 만일 당장 책임자를 찾을 수 없다면, 적어도 보상에 대해 성의를 보여주면 좋겠군.”
그것은 마치 사파 측에서 당연히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말투였다. 금강회주 마준은 이를 악물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억울하지만, 보상 정도로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다면.’
마준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정검문주께서는 무얼 바라십니까?”
“터전을 비우고 호남을 떠나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소. 다만 우리에게 동정호를 넘기시오.”
“…….”
일순 정적이 스쳤다.
타앙!
“마, 말도 안 되는!”
흥분한 마준이 상을 내리쳤다.
동정호의 상권과 인근의 물류는 금강회의 핵심이자 호남의 사파 전체를 지탱하는 젖줄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지금 당장과 가까운 미래라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떻게든 이 땅에서 그들을 몰아내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이러나 저러나 전쟁을 하자는 말이 아니오? 말코 출신 아니랄까 봐 정검문주께선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구만.”
껄껄껄, 전사욱이 웃었다.
“…죽어서야 그 무도한 입을 닫을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자자, 무서운 소리 하지 맙시다. 알만한 분들이 왜들 자꾸 흥분하고 그러십니까요? 껄껄껄!”
다시 한번 긴장감이 고조되려는 순간, 또다시 염우길이 중재에 나섰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겠지요. 그게 무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키워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요? 자고로 피는 적게 흘릴수록 이득이지요.”
“피는 그쪽만 흘리겠지. 그쪽의 잘난 비룡대주가 말한 대로, 우리에겐 점창과 남궁세가가 함께할 테니까 말이오.”
양호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이미 사파 측에서 먼저 사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상, 명예보다는 실리를 챙긴다.
그로서는 퍽 과감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벽 역시 결코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으음, 정검문주께선 저희 하오문 수호대의 일원이신 초 대협과 이미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움찔, 양호명의 눈이 흔들렸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예 끼어들지 않았으면 모르되 발을 담근 이상 저희 하오문 역시 어설프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요.”
“…….”
“정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저희 측에서도 수호대의 어르신들께서 기꺼이 나서주셔야겠지요.”
“…대체 왜?”
꽈악, 양호명이 이를 악물었다.
수호대.
하오문을 무림의 타 세력들과 나란히 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정체불명의 고수들.
양호명은 앞서 무적파에서의 일전을 떠올렸다.
결국 부딪히지는 않았으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괴상망측한 사내의 경지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물론, 같은 무력대에 속한다 해도 다른 이들의 실력까지 그 정도에 해당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절정고수가 몇 명씩이나 나타난다면… 점창으로서도 핵심 전력을 내어야 할 만큼 중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왜, 자신의 문제도 아닌 일에 하오문이 그렇게까지 핵심 전력을 내보낸단 말인가?’
“그야 앞서도 그랬듯이 비룡대주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요?”
“…….”
양호명은 이벽을 향했다.
‘대체 저 애송이가 무엇이길래?’
사파제일의 후기지수라곤 하지만, 사용하는 무공의 연원부터 수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앞서 선우세가를 들먹이기는 했지만, 물론 그것은 자신이 잘못 보았을 공산이 크다.
천하에 비슷한 무공은 많다.
나아가 선우세가 따위가 저 정도의 인재를 키워낼 수 있을 리 없고, 하오문이나 사패련주의 비호를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무엇보다 선우세가라면 의혈맹 소속일진대 남궁천수 저자와 대립각을 세울 이유도 없다.
“뿐만이 아니지요. 비록 이 자리에는 함께하고 있지 않지만, 비룡대에는 이곳에 계신 대주님뿐 아니라 암영각이나 해남검파의 제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요. 껄껄!”
“……!”
염우길이 비대한 몸이 웃음과 함께 흔들렸다.
물론 공손수나 파진성이 비룡대에 속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힘을 맘대로 빌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염우길은 있는 사실만을 말하되 그 이면의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었다.
“실례지만, 두 분 대협께서는 이 호남 땅에서 정사대전이라도 일으키고자 하는 생각이십니까요?”
쿠웅!
너털웃음과 함께 이어지던 염우길의 목소리에서 한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무게가 좌중을 짓눌렀다.
침묵 속에서, 양호명은 맥이 탁 풀렸다. 곁에 앉은 남궁천수의 안색도 서서히 창백해지고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세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가 되어가고 있다.
협상의 주도권은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되찾을 수 없음을 양호명은 직감했다. 침묵 속에서 염우길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건 곤란하겠죠? 그러니 적어도 싸워야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하되 양쪽 다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정하는 편이 좋겠지요?”
염우길의 시선이 장내를 한 바퀴 쓸었다. 침중한 시선의 철면개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마지막으로 이벽을 향했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쓸데없이 피를 흘릴 것 없이, 각자 동일한 조건 하에 대표를 세워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 * *
협상의 결론은 그 자리에서 정해지지 않았다.
상황이 급변한 이상, 양호명과 남궁천수의 선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흘 정도가 지난 뒤, 정파 측에서는 개방을 통해 의견을 타진해왔다.
사파 측 의견을 수렴하되, 승부의 세부 조건을 직접 제시해왔다.
첫 번째, 대표는 각 진영의 다섯 명씩 이립 미만의 후기지수들을 제한으로 둔다.
두 번째, 순서대로 비무를 치르되 승자의 경우 계속해서 남아 다음 상대를 맞이할 수 있다.
이상이 그 조건이었다.
“어쩜, 아주 대놓고 오라버니를 노리는군요? 정파란 이들이 이렇게까지 노림수가 훤히 보이다니.”
공손수가 피식 웃었다.
하기사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패왕가가 어째서 문을 닫았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무림의 괴사 중 하나였다.
이렇다 할 만한 외부세력과의 충돌도 없었고, 그밖에 문외에서 일어난 사건도 없었다.
그저 불현듯 활동을 중지했다.
사패련을 포함, 중원 각지에서 활동하던 패왕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본가로 귀가한 채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물론 이유가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이상 언제고 다시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돌아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기실 그 가능성으로 인해 호남의 사파무림이 삼 년씩이나 지켜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정파무림이 호남에 손을 대려 하자 느닷없이 사패련주의 비호를 받은 정체불명의 후기지수가 나타났다.
정파 입장에선 뜨끔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합의된 조건 하에서 이벽을 쓰러뜨려 두고 싶을 것이다.
설령 나중에 가서 패왕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더라도 호남을 지배하는 명분에서 밀리지 않도록.
그렇기 때문에 중견의 고수들을 제쳐놓고서 굳이 후기지수전을 제안해온 것이다.
“뭐, 그게 우리 계획이기도 하지만요. 이렇게까지 의도대로 나와주니 고마울 지경이네요.”
심지어 정파 측에서는 행여 이벽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을 때를 대비해 두 번째 조건까지 달아두기에 이르렀다.
점창의 일섬룡(一閃龍) 창성.
남궁세가의 창천옥룡(蒼天玉龍) 남궁환.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인 오룡삼봉 중 두 명을 연달아 내보낸다면, 어떻게 되었건 절대로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둘 중 하나로도 충분하리라 믿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만큼 철저하게 질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정파의 그러한 제안은 모두 공손수와 염우길에 의해 예상된 범위 안쪽이었다.
카앙! 캉, 캉!
“좋아요, 파 소협! 빈틈이 많이 줄었군요!”
“케헤헤! 당근이지! 그렇게 똑같은 수법에 몇 번씩이나 처맞고 나면 개구리라도 깨닫는 게 있는 법이라고!”
금강회 내부의 연무장.
언미희의 권갑과 파진성의 검이 연달아 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귀주에서 호남으로 향하는 한 달여 간의 행보 이래 서로 간의 비무는 비룡대원들에게 있어 이미 일상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정파 후기지수들과의 승부를 치르기에 앞서 바짝 무공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사파 측의 대표로는 이벽과 언미희, 파진성, 그리고 나살문과 적사파의 대제자들이 각각 나서기로 했다.
비룡대원들 중 공손수는 유일하게 대표로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오라버니를 제외한 나머지는 누가 나간들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쵸?”
공손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좀처럼 연무장에 얼굴을 보이지 못했다.
협상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연일 사파 측 수뇌부들과의 회의를 치르느라 바쁜 듯했다.
채앵, 챙!
“케헤, 케헤헤!”
파진성은 한껏 기세를 올렸다.
사패련 친선 비무회에서 맹우강에게 형편없이 깨진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파 측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명예 회복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흥분되지 않을 리 없다.
잘만 하면, 어쩌면…….
퍼억!
“케흑! 잠깐!”
“어딜 딴생각을! 어설퍼요! 빈틈을 없애려고 새 빈틈이 나타나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십여 합 끝에 언미희의 주먹이 기어코 파진성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확실히 언미희는 강했다.
내공과 외공,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채 정직하게 단련을 거듭한 언미희는 이벽을 제외한 세 사람 중에서는 단연 제일이었다.
물론 파진성과 공손수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성격이 다른 타 문파의 무공을 상대하는 경험은 보통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절기들을 드러내었다.
서로의 무공을 이해하고 보완한다.
비룡대는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물론, 언미희와 파진성이 비무에 열중하는 동안 이벽 역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부딪히고 있는 연무장의 구석 자리에 이벽은 가부좌를 틀고서 앉아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명상을 통해 새로 얻어낸 깨달음을 정리하는 데에 치중했다.
팔절구궁필법.
일찍이 초연서로부터 전수받은 그 가르침 안에서 이벽이 얻어낸 것은 단 두 개의 초식이었다.
만월과 삭월.
상대를 끌어들여 휘어지게 하거나. 혹은 스스로 휘어져 검을 숨긴 채 상대의 일점을 가격하거나.
물론, 실전에 돌입한다면 그 두 가지를 섞는 것만으로 무수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할지 모른다.
‘허나… 그게 다가 아니다.’
그러나 초연서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정작 다른 점에 있었다.
이벽은 며칠 전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기억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지붕 위에서의 일전.
팔절구궁필법을 통해 일도무문의 제자들을 제압한 직후, 이벽은 다시 탈혼백조 우진희와 충돌했다.
그리고 청강유엽검식을 펼쳤다.
거기에는 어떤 위화감도 없었다.
“…….”
하지만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청강유엽공이 아닌 만월무변심공의 기운으로는 청강유엽검식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답은 명백했다.
청강유엽검식을 떠올렸던 그 순간, 몸 안에 흐르던 힘의 경로가 만월무변심공에서 청강유엽공으로 ‘휘어졌던’ 것이다.
비우고 채우는 과정조차 없었다.
기운은 스스로 속성을 달리했다.
하나의 심공에서 다른 심공으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스스로 의식하지조차 못했다.
만월무변심공(滿月無變心功).
휘어지되 변하지 않는다.
“…….”
어쩌면… 만월무변심공의 구결을 통해 매 순간 내력의 흐름을 바꾸고 서로 다른 검공을 조합하여 펼치는 것조차 가능할지 모른다.
그것은 검로에서 선우세가의 흔적을 감춰야 하는 지금의 이벽에게 있어 절묘하리만치 적절한 가르침이었다.
마치 만월무변심공이란 공부 자체가 처음부터 낙검진천신공을 위해 존재해온 것만 같았다.
‘…역시 문주님의 안배인가?’
이벽은 이진천을 생각했다.
애초에 적파심공이나 만월무변심공과 같은 심오한 가르침들이 어떠한 연유로 하오문에까지 닿게 된 걸까?
이벽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벽은 문득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만월무변심공은 정공도, 사공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적파심공으로의 전환 역시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벽은 잠시 망설였다.
마을을 점령한 산적들을 도살한 이후, 이벽은 적파심공이나 도살지도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이제와 도살지도를 펼친다 해서 그때처럼 자신을 잃게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의 살육의 기억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이 아니라 해도 결국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다.’
우웅.
이벽은 만월무변심공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서히 적파심공의 구결을 떠올리며 내력의 흐름을 관조했다.
후욱!
다음 순간, 흐름이 휘어졌다.
만월무변심공의 힘이 붉게 물들었다. 노도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력의 전환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게 이루어졌다.
콰콰콰콰!
삽시간에 이벽의 몸 안에는 적파심공의 탁한 기운이 가득 들어찬다.
“…큭.”
격류와 함께 살심이 일어난다.
켜켜이 쌓여있던 피 냄새가 몸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벽은 정신을 집중했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휘어지되 변하지 않는다.
만월무변심공의 유연함으로 적파심공의 살심을 감싸 안는다. 충분히 할 수 있고, 해내야 한다.
이벽은 의식에 집중했다.
이내 서서히 평정심이—
빠악—!
“컥.”
난데없이 눈앞에 별이 일었다.
이마에 작렬하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가부좌를 튼 이벽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쓰러진 이벽이 눈을 뜨자, 그곳에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언미희의 얼굴이 있었다.
“고, 공자, 괜찮아요?!”
“…….”
상황은 명백하다.
때려놓고서 안부를 묻는다.
“…왜 때렸소?”
“그, 그게, 갑작스레 살기가 느껴져서 저는 공자가 또 심마에 사로잡히는 줄 알고… 아, 아닌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