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68)
70화. 암영각
웅성웅성.
“자자, 쌉니다, 싸요!”
“지금부터 오늘 장사 접을 때까지 남은 거 다 떨이!”
일행은 마을을 가로질렀다.
저녁의 거리는 떠들썩했다. 대로를 가로질러 중심부를 지나는 내내 활기찬 인파들을 거쳤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마님! 퍽 오랜만에 뵙습니다요! 가셨던 임무는 잘 다녀오셨습니까요?!”
“아, 강 씨! 그럼 그럼~ 그간 잘 있었지? 어머니는 건강히 잘 계시구?”
“아하하! 그러믄요! 말도 마십쇼! 노인네가 얼마나 기운이 넘치는지 원! 칼 다루는 솜씨는 아직도 현역이라니깐요?”
천소연은 종종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오, 아가씨도 계시는군요!”
“…아, 네. 안녕하세요.”
꾸벅, 공손수가 고개를 숙였다.
비룡대 일행은 ‘강 씨’를 보았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법한 순박한 양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얼굴 한가운데에 사선으로 그어진 검상이 아니었다면.
“…….”
뿐만이 아니다.
스산한 내력이 느껴졌다.
이벽은 조금 전 비수를 들어 서로를 겨누던 아이들을 생각했다. 아니, 비단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거리의 상인, 아낙, 노인들.
모두가 ‘한 수’를 지니고 있다.
묘한 기시감이 스쳤다. 마치 무림과 무림 바깥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움찔, 움찔.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건 이벽 뿐만은 아닌 듯했다.
행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언미희가 어깨를 떨었다. 사기(邪氣)에 반응하는 몸을 억누르는 듯했다.
“자, 그럼.”
길을 따라 앞장서던 천소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암영각에다 보고 올리고 올 테니까, 손님들 모시고 먼저 집에 가 있으렴. 집이 어딘지 잊어버린 건 아니지, 딸내미?”
“…누굴 바보로 알아요?”
“응, 하지만 5년 전만 해도 잠입 연습한다고 튀어 나갔다가 남의 집 지붕 위에서 밤새도록 엉엉—”
“아이씨!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휙!
공손수가 비수를 휘둘렀다.
칼날은 당연하다는 듯 허공을 갈랐다. 오호호,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천소연이 멀어졌다.
“…미안해요. 저런 엄마라서. 여러분께 자꾸 못난 모습을 보이네요.”
잠시 씩씩대던 공손수가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다소 애매한 미소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딱히 미안할 건 없다.”
“그, 그래요. 저는 오히려 소저가 조금 부러운걸요? 저희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헉… 어, 언니—”
“오, 나돈데! 케헤헤!”
“사실은 나도 그렇다.”
“…정말 미안해요, 여러분.”
공손수가 사색이 되었다.
* * *
“…그런데 암영각에 다녀온다는 건 무슨 뜻이지? 지금 이곳이 이미 암영각이 아닌가?”
“아, 그게요. 암영각이란 건 사실 두 가지 의미가 있거든요!”
공손수의 뒤를 따라 걷는다.
머쓱해진 공기 속에서 이벽은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손수가 말을 받았다.
슥, 공손수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저만치 북쪽을 가리켰다. 일행들이 시선이 자연히 그 끝을 향했다.
“우선 첫 번째로는 바로 저 전각이에요.”
마을의 북쪽 끝.
우뚝 솟은 전각이 있었다.
사방이 흑색으로 칠해진 전각은 퍽 먼 곳에서도 눈에 띌 만큼 높고 거대했다.
“저 전각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진짜 ‘암영각’이자 각주께서 머무르고 계신 곳이지요.”
“…….”
“그리고 저 전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무인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마을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구요. 아, 참고로 이곳은 남촌이에요.”
“…그렇군.”
“즉, 우리에게는 저 전각이 ‘암영각’이지만, 여러분과 같은 외부인들에게 있어서는 주변을 둘러싼 마을들 전부를 포함하여 ‘암영각’이란 무림집단이 되는 거지요.”
이벽은 납득했다.
무인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장소. 이 마을의 ‘독특한’ 분위기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러한 마을이 네 곳이나 있는 건가.’
현재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양민’들의 기세만으로도 웬만한 중소무파 하나는 손쉽게 압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벽은 새삼 사파를 지탱하는 사대세력 중 하나의 저력을 느꼈다.
저벅.
“자, 다 왔어요, 여러분.”
그리고.
여느 집의 대문 앞에서 공손수의 걸음이 멈춰 섰다.
“…케헤, 진짜로 ‘아가씨’였어?”
집은 대궐같이 으리으리했다.
그 모양새는 운남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무가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이벽조차 놀라게 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선우세가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화려함에선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뭘, 누누이 말했잖아요? 나 돈 많다고. 우리 아빠가 이 마을 촌장이거든요.”
“…역시 부럽네요.”
언미희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벽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으리으리한 대문을 바라보는 언미희의 눈빛은 퍽 복잡했다.
“하지만 소저 역시 천향루에 가면 아가씨가 아니오?”
이벽은 첫 만남을 기억했다.
천향루주 지소약의 제자인 언미희는 그곳을 지키는 무사들로부터 ‘아가씨’라고 불렸었다.
비록… 그 직후, 그 무사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두드려 패버리긴 했지만.
“어? 진짜요? 언니가요?”
“하, 하지 마요, 공자… 제발.”
덜컹, 끼이익!
그때,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후우욱, 덥석!
“어이구, 아가씨! 드디어 오셨습니까요!”
문이 열리자마자 인영 하나가 번개처럼 안에서 튀어나왔다. 공손수를 대뜸 끌어안는다.
“아이구, 여윈 것 좀 봐! 키는 하나도 안 자랐군요! 빌어먹을 임무가 다 뭐랍니까!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오, 오랜만이에요, 유모…….”
“…….”
인물은 등이 굽은 노파였다.
노파는 병아리를 감별하듯 공손수의 곳곳을 주무르고 뜯어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일었다.
“이분들이 ‘그분들’이시군요.”
공손수를 내려놓은 유모가 일행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주름진 눈가 안으로 눈빛이 번뜩였다.
‘…유모마저 강하군.’
이벽은 생각했다.
어쩌면… 절정고수로 추측되는 천소연을 제외하고서 현재까지 만난 암영각의 인물들 중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저벅.
“케헤, 에헤헤! 냄새 좋은데?”
“암요! 암! 많이들 시장하시죠? 모두들 한창 클 때인데요! 그럴 줄 알고 이 늙은이가 넉넉하게 준비해 놨습니다요. 껄껄!”
일행은 안으로 들어섰다.
언뜻 보기에도 집채는 열 채를 거뜬히 넘어서며, 정원 역시 외견에 못지않을 만큼 화려했다.
그리고 온 사방천지에 음식 냄새가 감돌고 있다. 이벽은 문득 허기를 느꼈다.
꼬르륵
“…헉.”
언미희가 배를 움켜쥐었다.
굳이 들은 척을 하지는 않는다.
“아, 근데, 아빠는요? 방에 계시나요? 집에 왔으니 일단은 인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은데.”
흠칫.
공손수가 말했다.
그 순간, 짧게나마 정적이 스쳤다. 이벽은 유모의 기척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 주인 어르신께선 암영각에 가 계십니다요.”
“아빠가요? 왜요?”
“글쎄요… 본각에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 최근에는 도통 얼굴 뵙기도 힘들어서…….”
“…….”
“무슨 일 있어요, 소저?”
“아니… 일단 밥이나 먹죠.”
공손수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일행은 공손수의 처소로 향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유모가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케헤.”
“…진짜 너무너무 부럽네요.”
냄새의 진원지는 그 안에 있었다.
네 개나 붙여 세워진 탁자 위에는 말 그대로 온갖 산해진미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으아, 유모가 또… 어휴.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아뇨, 다 먹을 수 있어요.”
“네?”
“다 먹을 수 있어요.”
털썩.
마치 한바탕 싸움을 눈앞에 둔 듯 결연한 얼굴로 언미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행들은 함께 둘러앉았다.
“아~ 다 좋은데 그게 없네… 그게 참 몸에 좋은 건데 말야. 아~ 참 아쉽다. 케헷!”
“파 소협, 우리 집에서 술 먹으면 우리 엄마가 배를 갈라서 간을 직접 씻어줄 텐데 괜찮아요?”
“…아니, 말이 그렇다고.”
그리고.
덜그럭, 쿵! 우걱우걱!
와작와작, 빠드득! 쿵!
한동안 요란한 식사가 이어졌다.
언미희와 파진성의 경쟁적인 젓가락질 속에서 음식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케, 끄, 끄어어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탐하던 파진성이 나가떨어지고 나자 남은 음식들은 결국은 모두 언미희의 몫이 되었다.
스르륵.
음식들이 사라진다.
소리도 없이. 언제나 그랬듯이.
‘…이래도 되는가?’
문득, 이벽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벽은 공손수를 돌아보았다.
“왜요, 오라버니? 아, 혹시 일전에 말했던 대로 기둥서방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양하지.”
“쳇.”
공손수가 혀를 찼다.
후룩, 찻잔을 들이켠다.
“…….”
동부 사파세력의 비룡대 가맹.
그를 통한 패왕가의 영향력 회복.
그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 비룡대가 움직이던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호남무림을 구했고, 영향력을 얻었다.
허나 공손수는 별안간 ‘임무 실패’를 말했고, 그 이후로 비룡대는 스스로 움직일 동력을 잃어버렸다.
그저 물길에 휩쓸리듯, 천소연을 비롯한 암영각의 무인들에 의해 이곳 암영각으로 호송되었다.
…잠깐의 휴식.
안될 것은 없겠지. 하지만.
‘한심하군.’
피식, 이벽은 웃었다.
찾고자 했던 무림행의 결말은커녕, 호남을 뜨자마자 바로 다음의 행보마저 다시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결말이니 어쩌니 해도, 행보를 결정함에 있어 여전히 지나칠 만큼 공손수에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무림의 세력 논리에는 약하다.
스스로에게 그런 핑계를 대고 있었던 셈이다. 허나 이제 공손수가 비룡대를 떠나게 된다면.
“…….”
직접 판단하고 움직여야겠지.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벽은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패왕가의 영향력을 되찾는 것은 혁군악을, 혁대웅을 위한 일이다.
공손수의 말마따나 ‘임무 실패’란 그녀와 암영각의 이야기일 뿐, 자신에게 있어 달라진 것은 없다.
이대로 복건과 절강으로 향하여 사파 세력의 가맹을 꾀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세력을—
번뜩.
그때, 다른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면 암영각은?’
텅, 머릿속에 충격이 일었다.
사파제일문인 패왕가는 아무런 낌새도 없이 문을 닫았고, 지난 삼 년간 급격히 영향력을 잃었다.
이에 흑천방과 해남검파는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자 후기지수를 내세우고서 욕심을 드러냈다.
허나 마찬가지로 사대세력 중 하나인 암영각은… 이렇다 할 입장을 보인 적이 없다.
“…….”
공손수를 믿는다. 하지만.
암영각은 과연 ‘아군’인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강서의 암영각을 제외한 채 그 주변의 호남과 복건, 절강성의 사파세력들을 노린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노른자’를 빠뜨린 채 주변의 ‘흰자’에만 연연하는 꼴이 아닌가?
—맹 대협,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디 지금은 물러 서주시오. 암영각은 ‘아직’ 당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앞서 흑천방의 추적자들에 의해 둘러싸였을 때, 천소연은 맹상태에게 그런 말을 남겼다.
그때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복면을 쓰고 있던 그때의 천소연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타앙.
그때, 탁자가 흔들렸다.
흠칫.
공손수가 찻잔을 내려놓은 것이다. 탁자가 흔들리며 이벽은 꼬리를 물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여러분, 마음 같아선 며칠이건 몇 달이건 느긋하게 대접하고 싶지만… 가능한 한 빨리 저희 집을, 암영각을 뜨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공손수가 말했다.
“엥? 그게 뭔 말인데?”
“…무슨 일이 있나요 소저?”
공손수의 목소리는 행여 누군가의 귀로 새어 나갈 것을 주의하듯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