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77)
80화. 암영각주 (1)
* * *
“허억, 헉……!”
이벽은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적파심공의 운기를 멈춘 순간, 또다시 피를 토하고 말았다. 허나 이번에는 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일순 선천의 힘이 저항하며 혈도에 내상을 남긴 것이다.
우우웅.
선천의 힘이 잘게 떨었다.
그것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이상하군.’
한순간, 선천의 힘이 이벽의 뜻을 거스르려 했다. 그것은 분명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간혹 이벽의 의사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이벽을 지키기 위한 선제적 움직임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전혀 이물질이 선천의 힘에 끼어든 것 같았다. 심지어는 이벽에게 사소하나마 내상을 남겼다.
원인은… 짐작이 갔다.
‘증혈환인가.’
동촌장에게서 건네받았던 단환.
그것은 내력을 증진하는 영약 따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단전이 없는 이벽에게는 의미가 없다.
‘혈기’를 증폭한다고 했다.
말마따나 끓어오르는 피와 함께 내달리던 적파심공의 내력을 멈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저벅.
“…괜찮나 자네?”
그때, 이벽의 눈앞에 발끝이 나타났다. 시선을 올리자 공손욱이 다가와 있었다.
탓.
“오라버니!”
그리고 또 하나의 인영이 이벽의 지척에 내려앉았다. 이벽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공손수, 몸은 괜찮나?”
“네? 저, 저요? 아, 네. 저라면 괜찮아요. 그보다 오라버니가—!”
덥석.
이벽의 두 손이 공손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흠칫, 공손수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당장 해독제가 필요하다. 언 소저와 파진성이 아직—”
스윽.
그때였다.
이벽의 목에 비수가 들이 밀어졌다.
“아, 아빠! 칼 치워요! 괜찮다고!”
“…보아하니 멀쩡한 모양이군. 헌데 내 딸애한테서 좀 떨어져 주지 않겠나?”
“….”
이벽은 손을 치웠다.
슥, 비수가 함께 사라졌다.
“미안하네. 하지만 저 꼴을 보고서도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면 아버지로서 실격이 아니겠나?”
공손욱이 쓰게 웃으며 턱짓했다. 이벽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널브러진 북촌장 백룡강이 있었다.
“…….”
‘살아는’ 있다.
허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행한 일이다. 심지어는 바로 조금 전 일일 뿐이다.
허나…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벽은 가슴 한켠이 휑해졌다.
“따라오게.”
그때, 공손욱이 돌아섰다.
방의 맞은편으로 앞장선다.
“기다리고 계시네.”
* * *
저벅.
세 사람은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고 4층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또다시 공간은 아래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었다.
꼿꼿이 서 있는 몇 그루의 대나무들과 석등 장식은 마치 작은 정원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어쩐지 눈에 익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벽은 곧 깨달았다. 그 모습은 공손가의 정원을 쏙 빼닮아 있었다.
‘…이곳이 ‘2호’의 공간인가.’
이벽은 공손욱을 향했다.
“또 싸워야 합니까?”
“아니, 더 이상의 싸움은 없네. 자네는 이미 할 만큼 스스로를 증명해냈으니.”
“…다행이군요.”
이벽은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잠자코 부녀의 뒤를 따랐다. 용건이 있는 곳은 이곳 4층이 아니다.
공손욱이 말했던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의 정체는 물론 1호이자 각주일 것이며, 이 위의 5층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소협, 잘 있었어요?”
그때였다.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왔다.
“겨우 하루만인데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한가? 아하하.”
공간의 좌측.
저만치에 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위로는 솥단지가 끓고 있었으며, 그 앞에 앉아 인사를 건넨 것은 천소연이었다.
“…여보? 어째서 여기에?”
“어서 이리 와요. 당신도, 수도.”
천소연의 미소는 조금 어색했다.
잠자코 바라보던 공손욱이 흠칫,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없이 걸음을 꺾었다.
“…….”
이벽과 공손수도 뒤를 따랐다.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려요. 거의 다 익었으니까.”
보글보글.
달착지근한 냄새가 퍼졌다.
흘끗, 이벽은 끓어오르는 솥 안을 바라보았다. 뱀은 아니었다. 삶아지고 있는 것은… 고구마인가.
아니, 그럴 때가 아니다.
“…죄송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일행들이 촌각을 다투고 있으니 어서 각주님을 뵈어야—”
“흘흘, 무슨 섭한 말을 그렇게 하시나? 모처럼 대접하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야.”
누군가가 이벽의 말을 끊었다.
늙수구레한 그 목소리는 천소연과 공손욱, 공손수 중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흠칫,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솥단지의 맞은편에 작은 인영이 한 명 더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드러운 인상의 노파였다.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흘흘흘, 뭘 그리 죽은 사람 보듯이 쳐다보나? 이리 와 앉게. 자, 욱 서방 자네도.”
“…예, 장모님.”
공손욱이 천소연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공손수가 딱딱한 움직임으로 나란히 함께 앉았다.
“…….”
이벽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이 전각은 암영각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만을 위한 공간이며, 허락받지 않은 이는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예외는 있다.
‘허락을 하는’ 입장인 존재.
“…각주님이십니까?”
이벽은 조심스레 물었다.
흘흘, 노파가 능글맞게 웃었다.
“천막심이라 하네. 소연이 소진이 애미가 되고, 수에게는 외할미 되는 사람이라네.”
“…….”
“자, 이리와 앉게. 너무 걱정은 말고. 내 이미 북촌에 연락을 넣었으니 해독제는 동촌장에게 잘 전달되었을 거야.”
‘…정말로 이 노파가.’
암영각주.
달리 무영객(無影客)이란 별호로 알려진 그 존재의 무명은 당연하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허나 잠행복 안의 진짜 정체는 가까이 지내는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벽은 공손수 옆에 주저앉았다.
“과연, 대단하네. 대단해. 아직 약관도 한참 남은 것 같은데 기어코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지.”
흘끗.
노파가 이벽의 옆구리를 살폈다.
“헌데 내 아들, 죽진 않았겠지?”
“…거의 멀쩡합니다.”
“흘흘, 그럼 됐네. 하기는 그놈이야 마교 놈들 한복판에 떨어뜨려 놔도 쉬이 죽을 놈은 아니지.”
“…….”
황망함 속에서 이벽은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급한 불은 꺼졌다.
각주의 명은 절대적이며, 해독제가 잘 전달되었다면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허나.
그 이외의 이야기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중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이벽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질문은 단 하나로 압축되었다.
“전부 각주님의 뜻이었습니까?”
“그렇다네.”
끄덕, 천막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을 시켜 자네를 이곳 암영각에 데려온 것도, 아들놈을 시켜 남촌을 습격하고 손녀딸을 데려오게 한 것도, 북촌장이 그 뒤를 쫓고 동촌장이 자넬 돕게 한 것도.”
“…….”
태연하게 이야기를 잇는다.
“그리고 사위가 북촌장에게 패배하여 2호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가짜 소문’을 퍼뜨린 것까지 다 자네를 이 암영각 등반에 도전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지.”
타닥, 탁.
침묵 속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아 물론, 북촌장의 망종 아들놈이 미쳐 날뛴 건 사과하겠네. 당연하게도 그건 내 뜻은 아니었네.”
“…….”
“원한다면 놈에게 엄벌을 내릴 수도 있지만, 듣자 하니 자네가 이미 뭘 어떻게 더 벌을 줄지도 고민되게끔 망가뜨려 놨다더군.”
흘흘, 노파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꼬챙이를 집어 고구마를 하나 끄집어내었다.
“자, 먹게. 자네가 손님이니 사양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이벽은 꼬챙이를 받아들었다. 묘하게 집중되는 시선 속에서 고구마를 한입 물었다.
“어때, 달지?”
천막심이 다시 말을 꺼냈다.
“사패련주가 보내온 것이라네.”
“…….”
“그 영감쟁이, 요새 련에 틀어박혀서 밥 처먹고 하는 일이라곤 텃밭에다 고구마 캐는 게 전부 아닌가?”
이벽은 직감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하기야 그 노괴물이 늘그막에 쌈박질 말고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았으니 강호무림에는 퍽 다행한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천막심에게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 * *
“이 중원 땅에서 마교놈들을 몰아낸 이래, 50여 년간 패왕가와 우리 암영각은 줄곧 함께해왔네.”
천막심은 설명을 이었다.
전대 패왕가주이자 초대 사패련주였던 사자패왕 혁무련, 그리고 그의 아들인 철탑패왕 혁군악.
두 거인은 암영각을 올랐다.
단신으로 당대의 촌장들과 각주를 쓰러뜨림으로써, 암영각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내었다.
허나.
세월이 흐르며 천막심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삼 대째 패왕은 나올 것인가?
그것은 비단 패왕가 뿐만이 아닌, 사패련과 암영각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그놈의 영감, 타들어 가는 남의 속도 모르고 따라붙는 여인네들을 죄다 마다하다가는 다 늙어서 겨우겨우 아들 하나를 봤다더군.”
“…….”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나? 내 직접 찾아가 봤지. 그리고 이 두 눈으로 그 아이를 똑똑히 확인했네.”
이벽은 혁대웅을 떠올렸다.
“틀림없는 패왕의 아들이었네. 범의 새끼가 개로 태어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다행히 제대로 핏줄을 잇고 태어났더군.”
비로소 천막심은 안심했다.
아직은 새끼에 불과하지만, 그대로 잘만 크면 다음 대의 패왕가 역시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헌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사라졌다네. 3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패왕가주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패왕가의 식솔들과 함께.”
“…….”
“그리고 우린 다시 혼란에 빠졌지.”
‘혼란’.
패왕가와 그 외.
남촌과 북촌의 대립.
“헌데… 듣도 보도 못한 자네가 사패련주의 ‘아들뻘’이라는 황당한 이름을 달고 나타났지.”
그리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 마침내 다시 이벽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년간 소식도 없던 영감쟁이가 갑자기 내게 고구마를 보내왔네. 이게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건가?”
이 순간, 천막심을 제외한 네 사람은 꼬챙이에 꿰인 고구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모두가 천막심이 건네준 것이다.
허나 누구도 맛을 느끼진 못했다.
“자, 말해보게. 자네는 대체 누가 키웠으며, 패왕가와는 무슨 관계인 건가?”
이벽은 침묵했다.
암영각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허나… 무엇을 어디까지 얘기해도 좋은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비룡대주, 낙검신룡, 그리고.
툭, 이벽은 꼬챙이를 내려놓았다.
“왜 말을 안 하지? 말할 수 없나?”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흘흘, 천막심이 웃었다.
“헌데 미안하지만 ‘생각할 시간’ 따윈 우리에겐 지나치게 많았네. 더 이상은 인내할 수가 없어.”
“……!”
그리고 다음 순간.
공기가 멈추었다.
우수수.
이벽의 온몸에서 솜털이 일어났다. 분명히 느껴지는 기세는 달라진 게 없다. 헌데.
‘…위험하다.’
“2호, 8호, 59호.”
천막심이 말했다.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건조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손욱과 천소연, 공손수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예, 각주님.”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애송이를 쳐라. 놈의 머리를 흑천방주에게 선물로 가져가야겠다.”
“…존명.”
“……!”
후두둑.
상황은 급변했다.
가타부타 이어지는 대화조차 없었다. 이벽이 채 반응하기도 전, 천소연의 암기가 흩뿌려졌다.
타앗.
이벽은 그 즉시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욱신, 그 순간 온몸의 상처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후욱.
허나 끝난 게 아니다.
등 뒤에서 작은 기척을 느꼈다.
채앵!
“크윽.”
이벽은 가까스로 막아섰다.
허나 공손욱의 비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날아오른 이벽의 몸이 다시 지면으로 추락했다.
퍼어억, 타앗!
등이 땅에 부딪힌 순간 울컥, 목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왔다. 이벽은 애써 삼키며 몸을 튕겨 세웠다.
타앗.
공손욱과 천소연.
두 사람이 재차 쇄도한다.
타앗.
아니, 두 사람만이 아니다.
측면에서 기척이 느껴진 순간 이벽의 시선이 움직였다. 양손에 비수를 꺼내든 채 달려드는 공손수와 눈이 마주쳤다.
“……!”
퍼억!
이벽은 공손수를 걷어찼다.
날아간 공손수가 땅에 처박혔다. 탓, 그리고 이벽은 한껏 뒤로 몸을 빼냈다. 절정고수 둘을 상대하려면… 생각해야 한다.
고로 시간을 벌어야—
짝!
“자, 그만.”
그때 천막심이 손뼉을 쳤다.
후욱, 탓.
그 순간 이벽에게로 쇄도하던 천소연과 공손욱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민첩하게 물러선다.
척.
다시 천막심 앞에 부복했다.
“…….”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푸헐.”
“…….”
“푸헤헤헤, 크허허허헐!”
노파가 경박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