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78)
81화. 암영각주 (2)
“수야.”
웃음을 멈춘 천막심이 말했다.
상황의 주도권은 전부 그녀에게 있었으며, 이 무거운 공기를 깰 수 있는 것 역시 그녀뿐이었다.
“…예, 각주님.”
“지금 너, 일부러 저 녀석에게 몸을 던져서 스스로 붙잡히려고 했지?”
“…….”
“왜? 내 말이 틀리냐?”
질끈, 공손수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공손욱의 안색이 굳었고, 천소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나 ‘각주’의 말에 감히 끼어들 수는 없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으응?”
공손수는 부복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비룡대주를 베고 패왕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
“흘흘, 아니다, 수야. 그게 아니야. 나는 지금 ‘59호’가 아니라 네게 묻고 있잖니?”
천막심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다시 자식 내외에게 고구마를 내어주던 부드러운 인상의 노파가 되어있었다.
“…죄송해요, 할머니.”
공손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네 몸뚱아릴 인질로 내주면서까지 저 애송이 녀석을 살게 하고 싶었느냐?”
“…네.”
그리고 천막심이 이벽을 향했다.
“그리고 자네는 그걸 알면서도 저 아이를 붙잡지 않았군. 왜지? 부모를 상대로 자식만큼 좋은 방패막이가 어딨다고?”
“…….”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말마따나 조금 전 측면으로 공손수가 달려든 순간, 그녀는 눈빛으로 이벽에게 뜻을 전했다.
공격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이벽은 공손수를 걷어차서 날려 보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내던지려 해선 곤란하다.
59호와 공손수는 같지만 다르다.
머무른 것은 고작해야 이틀에 불과했지만, 이벽은 ‘암영각’이란 세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공손수는 천막심의 손녀딸이지만, 동시에 59호는 암영각주에게 있어 까마득한 발아래의 일개 수하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공손수의 그러한 심산을 천막심 정도의 절대고수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하는가?”
“…….”
“흘흘, 알았네. 뭐, 일단은 그거면 됐다고 치세. 늙은이가 장난이 좀 지나쳤구만. 자, 이리 와서 먹던 고구마나 마저 들게.”
…‘장난’이라.
철컥, 이벽은 검을 집어넣었다.
몸을 추스른 뒤 다시 천막심에게로 다가섰다. 다시 공손 일가의 사이에 둘러앉는다.
불가임에도 한기가 스쳤다.
일각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사형제입니다.”
생각을 정리한 이벽이 말했다.
“응? 지금 뭐라고 했나?”
“혁대웅은… 제 사형입니다.”
“…호오.”
천막심의 주름진 눈이 빛났다.
“역시 어딘가에 잘 살아있었구만. 하여튼 속 시커먼 영감탱이 같으니. 헌데 자네 정도 되는 이가 사형도 아니고 사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흘흘, 재밌구만. 아주 재밌어.”
암영각을 계속해서 패왕가의 곁에 묶어둘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도, 능력도 없다.
허나 최소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고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허면 자네의 사형은 대체 늙은 아비를 홀로 두고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건가?”
이벽은 혁대웅을 생각했다.
늦건 빠르건, 그라면 낙검진천신공을 얻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 부분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고는 온전히 사형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
“허나… 만약 그 이전에 사형이 해야 하는 일이나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기꺼이 대신 맡아둘 생각입니다.”
이벽은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대화는 잠시 끊겼다.
“크하!”
퍽, 퍽.
천막심이 이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새 천막심은 거짓말처럼 이벽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예끼, 실없기는! 세상에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지, 천하의 세력 싸움이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아는가? 흘흘흘!”
* * *
“크하.”
하늘이 붉다.
동촌장 목일령의 저택, 별채.
파진성은 인적없는 마루에 앉아 해가 저무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까악, 까악.
날아가는 새 울음이 처량하다.
아닌 밤중에 극독에 시달렸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루가 거짓말처럼 지나있었다.
—정신이 좀 드나보군. 아직은 힘들겠지만 걱정은 마시오. 해독제를 썼고 고비도 넘겼으니 가만히 푹 쉬면 독기가 빠져나갈 것이오.
동촌장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독에 당한 자신과 언미희를 위해 이벽이 단신으로 암영각으로 향했고, 얼마 후 북촌에서 해독제가 전달되었다고 했다.
“으아악, 이게 뭐냐고 씨바! 등신, 쓰레기, 머저리 새끼……!”
콱, 콱.
파진성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설마 손님으로 찾아온 암영각에서 습격을 당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고, 독공에는 익숙지도 않았다.
분명히 상대가 나빴다. 하지만.
죽은 후에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림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크하.”
나이 열여덟에 일류의 초입에 섰다는 자부심은 흑천방의 맹우강에게 깨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허나 그 이후 비룡대에 합류하고, 일행들과 손속을 나누며 초입에 머물러있던 경지는 점차 숙련의 단계로 나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있었다.
헌데.
“…결국 짐짝이잖아, 이거.”
그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알아갈수록 강호무림은 두렵다.
어쩌면… 그저 ‘후기지수 중에서 손꼽히는’ 정도의 힘은 통용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룡대에 필요한 것은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천하의 어떤 세력과도 당장 맞설 수 있는 수준의 힘이다.
—헹, 들으라고 해! 뭐 어쩔 건데? 흑천방이건 암영각이건, 이쪽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면 해남의 별이 가만있지 않는다 이거야!
잘도 그런 소릴 지껄였었다.
하지만 아주 잘 가만히 있었다.
하다못해 그 쥐방울조차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업고 뛰어다니는 동안, 업혀서 쿨쿨 잠만 잤다.
까악, 까악.
“…돌아갈까. 해남으로.”
드르륵.
그때,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파 소협, 검객이 검까지 팽개치고 뭐 하는 거예요?”
언미희였다.
“…너 몸은 괜찮냐?”
파진성은 그녀가 내미는 해남의 검을 힘없이 받아들었다. 훅훅, 언미희가 어깨를 돌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하네요.”
“…….”
“파 소협, 비무 안 할래요?”
“아니, 지금은 좀…….”
“쫄았어요?”
“…뭐?”
“아직 회복이 덜 되었나 보네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궁상떨지 말고 얼른 들어가 누워 계세요.”
“…거 듣자 듣자 하니까!”
벌떡.
파진성이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채앵, 챙!
이내 언미희의 권갑과 파진성의 검이 엉켜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 초의 교환이 오고 갔다.
채앵, 퍽!
“케헥.”
언미희의 정권이 파진성의 복부 정중앙을 파고들었다. 털썩, 파진성이 무릎을 꿇었다.
“…왜 이래요, 이거? 호남에서 비무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빈틈이 늘어났잖아요?”
“…….”
파진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일류의 숙련 단계에 머물러있다면, 언미희는 일류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허나 맹우강은 그런 언미희를 이겼고, 다시 이벽은 그 맹우강을 가볍게 쓰러뜨렸다.
우열은 냉혹할 만큼 정직하다.
“빈틈이 많아도 기세로 메꾸는 게 파 소협의 검이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없네요. 미안하지만 그냥 혼자 수련할게요.”
“…….”
훅, 훅.
그리고 언미희의 권갑이 허공에서 홀로 휘둘러졌다. 파진성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야, 넌 열 안 받냐?”
“뭐가요?”
“짐짝 됐잖아. 우리.”
훅, 후욱!
“그래서 뭐 어떡하라구요?”
“…어, 아니. 어쩌라기보다는—”
“내가 무르고 약하단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이제 와서 이 정도 굴욕으로 풀죽을 거였으면 계속 따라나서지도 않았죠.”
“…….”
“그럴 시간에 일 초라도 빨리 더 강해져야 해요. 그리고 실제로 분명히 강해지고 있구요.”
언미희는 나약함을 절감했다.
허나 그런 건 집안이 망했을 때나 처음 손에 피를 묻혔을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매 순간 순간마다 느끼고 있다.
‘다만.’
이벽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언젠가 그가 약해졌을 때,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났을 때, 그때에는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
언미희는 ‘욕심’이 생겼다.
다만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케헤.”
파진성은 웃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재능, 그리고 그 재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면 자신은 어떨까?
일류에 들어섰을 때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러한 믿음을 세울 수 있을까?
‘휘어지되 부러지지 않는다.’
문득 악양의 밤이 스쳐 지나갔다.
절정고수인 이벽을 앉혀두고서 술기운에 젖어 잘난 척 설교를 해버렸다.
‘…남자가 되어 가지고 뱉어놓은 말은 책임져야지.’
크하, 파진성은 한숨 쉬었다.
배를 문지르며 도로 일어섰다.
“야, 다시 떠.”
퉤, 침을 뱉었다.
“싫은데요. 파 소협 약하잖아요.”
“케헤, 그런 소린 내 검을 받고 나서 해라!”
타앗, 파진성이 달려들었다.
“흥,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예요.”
언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은 힘껏 내력을 끌어올렸다.
채애앵—!!
* * *
동촌의 어수선한 대로.
암영각을 떠난 이벽과 공손수가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대화는 없었고 분위기는 퍽 어색했다.
—내 거두절미하고 묻겠네. 자네, 암영각의 사람이 될 생각은 없나?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텐데 말일세.
천막심이 말했다.
말을 하는 그녀의 시선이 흘끗 공손수를 스쳤다. 이벽 역시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죄송합니다. 사문을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흘흘, 그렇군. 아쉽구만.
천막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죽지 말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무슨 짓을 하든, 재주껏 죽지 말고 이 무림에서 알아서 살아남아 보게. 자네가 살아있는 한, 적어도 암영각의 칼이 패왕가를 겨누는 일은 없을 걸세.
—…….
그것은 분명 지금의 이벽이 암영각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결론이었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할 건 없네. 우리도 다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니.
이벽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공손수와 함께 암영각을 나섰다. 언미희와 파진성을 마중하고자 동촌으로 향했다.
“…너무해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부모님도 보는 앞에서 그렇게 단호하게 싫다고 쳐내면 내 꼴이 뭐가 돼요?”
“…….”
이벽은 침묵했다.
“…미안하군. 딱히 네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좋아요?”
“…….”
이벽은 다시 침묵했다.
“…치사하네, 진짜. 무슨 남자가 조금만 곤란해지면 조개처럼 입 다물어버리고.”
“…….”
“뭐, 됐어요~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일단은 부모님께 소개도 드렸으니 진전이라면 나름 진전이네요.”
덥석, 공손수가 팔짱을 껴왔다.
“오랜만이라서 방심했죠?”
“…그런 것 같군.”
“고마워요. 구하러 와줘서. 오라버니가 암영각을 오른 덕분에 살수 신세는 면할 것 같네요.”
그것은… 감사받을 일인가?
이벽으로선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각주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셨다는 건 오라버니가 엄청나게 맘에 들었단 뜻이거든요.”
“…….”
“뭐, 이로써 흑천방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암영각이 삐딱선을 탄 이상, 동부 무림도 마찬가지겠구요.”
흑천방을 막는다.
그리고 패왕가를 지킨다.
이벽은 비룡대주로서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였고, 호남 무림을 구했으며, 이제는 암영각에 올라 각주의 ‘호의’를 얻어내었다.
‘…그다음은?’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무림행의 ‘결말’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끝맺어졌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또한.
이벽은 북촌장 백룡강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증혈환으로 인해 발생한 내력 운용의 ‘부작용’은… 고스란히 몸 안에 남아있다.
“…….”
다음의 행보.
그리고 비룡대.
이벽은 공손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이다.
어느덧 두 사람은 동촌장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언미희와 파진성이 머무르고 있는 별채의 대문을 열었다.
덜컹, 끼이익.
“커허헉!”
“우웨엑! 우웩!”
“…파, 파 소협? 언니?”
두 사람은 마당에 있었다.
다만… 언뜻 보기에도 전혀 괜찮지는 못했다. 마주 엎드린 채 격렬하게 피를 토하고 있다.
“아, 공자, 큭, 무사해서, 커헉!”
“우웨엑, 야 너! 쥐방울, 웨에엑!”
“…….”
이벽과 공손수는 침묵에 빠졌다.
“…동촌장, 동촌장은 어디 있지?”
상태가 이상하다.
이벽이 뛰쳐나가려 했다.
“찾지 않아도 되오. 여기 있으니.”
허나 이벽이 뒤를 돌아본 순간, 동촌장 목일령이 이미 저만치에 다가와 있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별채의 마당을 둘러본다.
“해독이라면 거의 다 끝났소. 다만 보아하니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군.”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
“지능의 문제요. 체내의 독기가 다 빠져나가지도 않았거늘 내력을 마구 쥐어짜다니 저 꼴이 되는 것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