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90)
93화. 태극무봉
“너를 기다렸어.”
그녀가 이벽에게 말했다.
얼굴은 희고 눈빛은 검다.
묘령 혹은 그 부근. 감정이 흐릿한 표정 안쪽으로는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무복은 산적의 피를 뒤집어쓴 채 붉게 물들어있음에도 도리어 흑백의 태극무늬가 도드라졌다.
태극무봉(太極舞鳳) 송영영.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것은 창천옥룡 남궁환이나 일섬룡 창성과 마찬가지로,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인 오룡삼봉으로서 손꼽히는 이름이었다.
“…기다렸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너를 따라갈 거야.”
“…….”
“그게 장문인의 명이니까.”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의방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태극검존 태허진인은 이벽에게 무당의 제자가 되기를 권했으나 이벽은 거절했다.
그러자 태허진인은 껄껄 웃었다.
—이것 참 얄밉구만 그래. 도가의 종주씩이나 되는 입장에서 그런 경전 같은 소릴 듣고도 역정을 내면 도리어 내가 사도가 되는 셈이잖나?
—…….
—뭘, 그냥 재미 삼아 해본 말일세. 긴장하지 말게. 내가 왜 자넬 해하겠나? 그런 짓을 해봤자 황보혁이 그 건방진 놈만 좋아하겠지.
—…헤아려주셔서 감사하오.
—아무쪼록 푹 쉬고 가시게 ‘소도장’. 적어도 호북 내에서는 우리 무당이 함께할 것이니, 감히 누구도 그대를 해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태허진인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걸음으로 털레털레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향했다.
그러나 이벽을 스쳐 지나가며,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뭐,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나면 무당에 들러 차나 한잔하고 가시게나.
—…….
—나는 욕심이 많고 세속의 미련도 많아서 아마도 늙어 죽을 때까지 신선은 못 될 게야. 껄껄껄!
태허진인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퍽 의미심장했으나, 이벽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바로 지금.
송영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 그러셔?”
그때, 파진성이 한 발 나섰다.
이벽과 송영영의 사이에 끼어든다.
“다짜고짜 칼질해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 앙? 나도 일단 베어버리고 사과하면 받아줄 거냐?”
“…네가?”
송영영이 파진성을 일견했다.
“넌 못 해. 약해서.”
“뭐 이 새끼가?!”
채앵!
파진성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검은 송영영에게 닿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철면개의 몽둥이였다.
“어흠! 칼을 거두어주시오, 소협. 소저께서 실수라고 하지 않소? 다행히도 피를 보지 않았으니 일단은 대화를—”
“됐어요. 파 소협.”
공손수가 끼어들었다.
이벽의 뒤에 서 있던 공손수가 한발 앞서며 파진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동시에 이벽과 시선을 나누었다.
무당은 성가의방에서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무당의 제자가 나타났다.
인과관계는 명확했다.
“소저께서 실수라고 하잖아요? 무당에게는 의방에서 신세를 졌으니 이 정도로 화를 내서야 되겠어요?”
“…카악, 퉤!”
파진성이 거칠게 침을 뱉었다.
“거 짜증나네, 진짜.”
검을 거둔 파진성이 벅벅 머리를 긁었다.
탓, 거칠게 발을 구르며 자리를 떴다. 공터를 벗어나 마차를 세워두었던 방향으로 멀어진다.
그 모습을 공손수가 일견했다.
그리고 다시 송영영을 향했다.
“그러니까… 소저께서는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나요? 그러다 우연히 산적을 만나 ‘처리’하셨구요?”
“너희와는 상관없어.”
“네?”
“나는 비룡대주를 기다렸어.”
“…아, 그렇군요.”
공손수가 가볍게 웃었다.
송영영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다 좋은데… 우선은 몸을 좀 씻지 않을래요?”
* * *
덜컹, 덜컹.
침묵 속에서 마차가 달렸다.
냇가에서 피를 씻어낸 송영영의 몸은 채 마르지 않았다. 젖은 옷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복 위로 단련된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
이벽은 민망하여 시선을 돌렸다.
허나 정작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마주 앉은 이벽을 바라보다가 곧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표정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이벽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퍽 막연한 이야기였으나, 몇 번을 캐물어도 결국은 같은 답의 반복이 될 뿐이었다.
감시, 혹은… 포섭.
좌우간 이벽에게 입김을 행사하고자 하는 태허진인의 의도는 퍽 명백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무당의 도움을 받은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었으며,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여정 내내 침묵이 이어졌다.
언미희도 공손수도, 각자의 생각 속에 잠긴 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씩 파진성이 툴툴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웠다.
그리고 마차는 마침내 소림이 위치한 숭산 인근에 도착했다.
인근의 마을에 정착한 일행은 객잔에 처소를 잡은 뒤 짐을 풀었다.
철면개가 잠시 일행을 떠났다.
먼저 숭산을 올라 소림에 기별을 알린 뒤, 다시 일행을 데리러 오겠노라 했다.
“헹, 지들이 불러서 그 개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구만, 마중 하나 안 나온단 말이지? 참 엉덩이 무거운 땡중 나으리들이야? 응?”
파진성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로, 그리고 송영영이 마차에 합류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때때로 송영영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곤 했지만, 송영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풀에 지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짐을 풀기 무섭게 파진성은 어딘가로 종적을 감추었다.
술을 마시러 간 모양이었다.
언미희 역시 처소를 나섰다.
회복 이후, 몸이 굳은 것 같다며 마을 외곽의 적당한 공터를 찾아 몸을 풀고 오겠노라 말했다.
애써 웃음을 보이는 언미희의 표정에서 이벽은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음을 느꼈다.
어쩌면… 팽가 무인의 피를 덮어쓴 기억은 그녀에게 있어 ‘마음의 돌’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일행들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
찾고자 하는 것은 이 무림행의 결말이다.
허나 그것은 줄곧 함께해 온 일행들을 외면하면서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사패련, 호남, 암영각.
급기야는 사파무림을 떠나 소림을 향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조차 일행들은 기꺼이 자신과 함께하길 선택했다.
장강을 건넜고, 뜻밖의 습격에도 만신창이가 되면서 이곳까지 함께 달려왔다.
‘나’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관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
‘…대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일행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은 자신의 의무일 테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아니고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직감이 스쳤다.
드르륵.
이벽은 방을 나섰다.
공손수의 처소로 향한 뒤,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공손수, 안에 있나?”
“…오라버니?”
잠깐의 정적이 스쳤다.
이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이벽은 문을 열었다.
“어쩜, 일행들 몰래 찾아와주시다니, 드디어 암영각의 기둥서방이 될 결심이 서신 건가요?”
“…….”
공손수는 창가에 앉아있었다.
언제나처럼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어투는 퍽 힘이 없었다. 이벽은 말없이 다가섰다. 마주 앉았다.
“공손수, 무슨 일이 있나?”
공손수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오라버니는 둔한 건지 예민한 건지 가끔 구분이 안 가네요.”
공손수가 몸을 일으켰다.
창틀을 붙잡고서 이벽을 돌아보았다.
“잠깐 걸을래요?”
훅, 그리고 공손수의 신형이 창틀을 넘어섰다.
처소는 이 층이었으나, 그런 건 물론 공손수에게 있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훅, 탓.
이벽이 그 뒤를 따라 창으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했다.
“후훗, 모처럼 둘 뿐이네요.”
공손수가 팔짱을 껴왔다.
이벽은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객잔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으나 마을의 거리는 퍽 떠들썩했다.
동정호가 자리한 악양만큼은 아니지만, 소림에는 무림과 관계없이 평소에도 찾아오는 향화객들이 많기에 번화한 편이었다.
행인들의 행색은 평화로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소림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 덕분일 테다.
이벽은 보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고, 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이벽은 문득 왕수련과 장석두가 떠올랐다.
새삼스럽지만 나이가 같은 공손수에게서 종종 두 사람을 겹쳐보게 된다.
“멋대로 따라와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웃기지만, 저, 이번 일만 끝나면 역시 암영각으로 돌아갈까 싶어서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이벽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어째서지?”
“제가 너무 약해서요.”
“…….”
공손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미 많은 생각을 통해 단단히 굳어진 마음인 듯했다.
“…너는 약하지 않다.”
“아뇨, 약해요. 파 소협도 그랬고 오라버니도 그랬고. 두 사람 다 따지고 보면 결국 저를 감싸려다 다친 거잖아요?”
공손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사실은 한참 전부터 하던 생각이었고… 오라버니 덕에 집안일까지 해결되고 나니 욕심이 나서 따라오긴 했지만, 역시 안되는 건 안 되는 거네요.”
“…….”
“결국 진짜 짐덩이는 파 소협이 아니라 저인 거죠. 그러니 이 이상 본격적으로 발목을 붙잡기 전에 이쯤에서 ‘명예대원’이 되는 게 낫겠죠?”
공손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물론 오라버니까지 꼬셔서 같이 데리고 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건 아마 안 될 것 같구요.”
이벽은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꼭 가야만 하겠나?”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요? 제가 꼭 오라버니의 곁에 있어야만 할까요?”
“…….”
“비룡대주님, 제가 대원으로서 정말로 대주님께 필요한가요? 전투 때마다 거치적거리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고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붙잡고 싶다.’
이벽은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와서 공손수가 곁에 없다는 건… 퍽 막막하게 느껴졌다. 다만.
“생각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군.”
“네, 많이 드릴게요. 저도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소림의 산문 정도는 밟아보고 싶으니까요~”
훅, 공손수가 팔짱을 풀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밤도 늦었구요.”
탓, 공손수가 땅을 박찼다.
그림자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저만치로 사라진다.
“…….”
이벽은 멈춰 섰다.
혼자 우두커니 남겨졌다.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였다.
후욱, 와장창!
이벽의 발치에 술병이 날아들었다. 요란하게 깨지며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타앗
“야, 이 쐐애끼야아!”
그리고 이벽은 저만치에서 파진성이 달려드는 것을 발견했다. 술에 취한 듯 안색은 콰하게 붉어져 있다.
채앵.
“니가 그르케 싸움을 잘해?!”
느닷없이 칼을 꺼내 들었다.
탓, 이벽은 물러서며 피했다.
“진정해라, 파진성. 무슨 짓이냐?”
“너,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히끅, 거기서 왜, 히끅, 못 붙잡냐고! 남아달라고 말을 못 하냐? 앙? 무당씩이나 되는 새 부하 생겨서 필요 없다 이거야?!”
“…….”
그렇군.
근본적으로 술에 취한 탓이겠지만, 나름대로 화를 내는 이유는 있는 모양이다.
“…그리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결국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이기도 하고.”
“크아악! 이 쌔끼가!”
훙, 훙!
파진성의 칼이 매섭게 흔들렸다.
설령 살의는 없다고 해도… 거리 한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난동을 부리는 건 곤란하다.
이벽은 검을 뽑았다.
청강검식으로 맞섰다.
쾌와 변의 초식으로 일일이 쳐내었다. 그리고 유의 초식으로 기세를 흩어내며 제압하려던 그때였다.
슥, 파진성이 물러섰다.
마치 검로를 예상했다는 듯이.
“헹! 나라고 매번 똑같이 약해빠졌을 줄 알았냐?! 네놈이랑 한두 번 부딪혀 본 줄 알아?!”
“…….”
“좋다 이거야! 어디 한 번 계급장 떼고 오늘 한 번 뒈질 때까지 제대로—”
뻐억.
파진성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송영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검면이 파진성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
잠시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벽은 파진성을 어깨로 들쳐 업었다. 그리고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송영영이 뒤를 따랐다.
“…그거, 왜 데리고 다녀?”
문득 송영영이 말했다
“약한 부하는 짐이 될 뿐이야.”
“…….”
‘짐’이 된다는 것.
썩 좋은 기분은 아닐 테다.
비단 공손수의 이야기뿐만은 아니다.
앞서 성가의방을 향할 때의 파진성 역시 다친 몸을 이끌고서 꾸역꾸역 자기 발로 걷는 것을 고집했다.
그래서 이벽은 곤혹스러웠다.
그들이 짐이 된다고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허나 본인들이 느끼는 것은 퍽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제삼자인 송영영의 시선에서 봤을 때, 그들의 그러한 자기 인식은 퍽 타당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모두 쳐내던가, 아니면 그 권법을 쓰는 애만 제외하고서—”
“그만.”
그러나 듣기에는 거북하다.
“듣기 싫으니 좀 닥쳐주겠나?”
“…응,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