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94
94. 에이지트에게서 알아낸 것들
이한은 가짜 도사들의 시체에서 스캔해 낸 기억을 100% 신뢰하지는 않았다.
기관의 매뉴얼에서도 시체의 두뇌에서 직접 기억을 읽어내는 방식은 오류를 피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많은 오류가 포함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지금까지 이한이 해왔던, 간략화되고 간접적인 방식의 조사는 한계가 명백하므로 되도록이면 참고 자료로만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사 대상자가 영화를 본 기억이나 잠을 잘 때 꾼 꿈 같은 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오해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주관적인 오해나 망상은 더 문제가 된다.
조사 대상자가 자신의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증이 부실한 경우, 외부의 조사자조차 거짓을 진실이라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 이한은 가능하다면 조사대상자의 기억을 스캔하는 것보다 직접 질문하고 관찰하는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노가 거짓말 탐지기 역할을 해 주는 이상, 터무니없는 실수를 할 가능성은 낮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한은 에이지트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그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에이지트는 놀람과 체념을 오가고 있었다.
“어사대라고? 당신이?”
“그렇다. 그리고 너희들의 진실에 대해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이기도 하지.”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에이지트는 무엇인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적하기 어려웠지만,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에이지트는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던 중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획득한 정보를 어사대에 알렸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사대라는 배경을 과시하기는 했지만,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가 한 말을 기억해 보면 반복해서 자기 자신을, 개인을 강조했을 뿐이었다.
그가 하는 단순한 말에도 이중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에이지트의 머리에 불이 켜졌다.
이자는 원하는 것이 있다.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요구사항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그가 속한 어사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밝힐 수 없는 그런 요구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위험한 땅에서 홀로 돌아다니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을까?
정확한 장소는 비밀이지만, 막북에 혈교의 본단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만약 어사대에 속한 관리라는 것이 밝혀지면 목숨이 아니라 영혼까지 위험했다.
그런데도 에이지트를 쫓아서 이렇게 홀로 온 것이다.
에이지트를 쫓는 것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소리였다 .
마음에 거슬리던 불편함을 해결한 에이지트는 한결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아래쪽에 시선을 돌렸다.
박살난 하체가 보였다.
이런 곳에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이곳의 의술 수준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부상을 입고도 살아나는 것은 천운에 천운이 겹쳐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지트는 그런 거듭된 행운을 바랄 정도로 상식이 결여된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 손을 쓴 것인지 통증도 안 느껴지고, 피도 흐르지 않는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고통없이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더욱 여유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가? 그런데 우리들의 진실이라니, 그게 뭔지 나도 궁금해지기는 하는군. 왠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이 떠올라서 그렇지. 그래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까지 죽여가면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을 정도라면 내 의사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그래서 원하는 것이 뭔가? 내게서 듣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당신들이 이곳에 온 수단. 그것을 원한다.”
“크하하하하, 콜럭콜럭!”
에이지트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은 것처럼 정신없이 웃어댔다.
얼마나 심하게 웃었는지 지혈을 해놓은 혈관이 터져서 아랫배에서 다시 출혈이 시작될 정도였다.
약간의 출혈만으로도 위험한 상태라서 나노가 즉시 개입해서 출혈을 막아야 했다.
잠시 꺽꺽대던 에이지트는 출혈이 멈추고 배에서 흐르던 피가 그대로 피부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피가 사라진 곳을 문질렀다.
손가락에는 피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이 세상은 우리를 종종 놀라게 했지. 이 이상한 치료법도 무공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 내공을 사용한?”
“글쎄. 그것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말해 두지만 너희는 익히지 못한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 내공을 익힐 수 있는 재질은 아주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더군. 너희들 중에서 내공을 익힐 수 있는 자가 그래도 백 명에 열 명 정도 된다면 우리는 백에 불과 두셋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도 배우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지.”
에이지트는 혼자서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한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법과 무공을 함께 조합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다행히 몇 가지 분야에서는 성과가 있었지만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공에는 정말 답이 없더군. 그래서 종주나 스승께서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했지. 덕분에 편애를 받은 자도 있었고. 하지만 나는 이곳이 더 좋았다.”
에이지트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척추가 부서지고, 하반신이 으깨졌는데도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했지만, 그는 그럭저럭 좌정을 하는데 성공했다.
에이지트는 이한의 얼굴을 올려 보며 말했다.
“혼돈과 계약한 후로 언제나 느끼던 온갖 자기파멸적인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거든. 차원을 넘는 순간 나는 혼돈과 내 영혼 사이에 이어진 계약이 끊어졌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지. 그러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셔야 가라앉던 광기에서도 벗어났고, 혼돈을 향한 경배와 숭모의 감정도 점점 희석되더군. 이제는 혼돈을 향해 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사람이 저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고? 저것은 너희의 고향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한의 반문에 에이지트는 세상에는 아직도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구나 하며 감탄하는 얼굴로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문양? 아! 공간도약 마법진 말인가? 그런데 당신은 저 마법진이 정확하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나도 모르는 것을? 혈교의 멍청이들은 지식의 기반이 다르니까 아예 이해조차 못했지. 당신도 이곳 사람이니 혈교의 멍청이들과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여전히 비웃는 표정으로 에이지트는 이한을 놀리듯 말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무지에 대해 낙담할 것은 없다. 내 지시에 따라 마법진을 건설하고 있는 혼돈의 노예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어쩌면 너희들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적어도 생각은 하지 않나? 하지만 혼돈의 노예들은 혼돈이 주는 힘에 취해 날뛸 뿐 힘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자들은 아니다. 혼돈과의 연결이 끊어졌으니 그들은 오래지 않아서 자멸하겠지.”
이한은 혼돈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혼돈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고는 이 중늙은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혼돈이 뭔가? 무슨 신 같은 것인가? 부처나 옥황상제 같은? 아니지. 너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차라리 앙그라 마이뉴 같은 악신 쪽인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신이라니! 인간의 사념에서 태어난 존재와 비교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감히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어서 우주의 한 모습으로 그분을 칭하고 있을 뿐이지. 그분은 아주 오래되고 위대한 존재이시다. 인간 이전, 차원 이전의 존재이시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경배를 바쳐야 마땅한 분이시지.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차원을 넘고보니 이곳에는 혼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더군. 그래서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그냥 악신이었군.”
“그럴지도 모르지.”
이한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편안하기만 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깨달은 자의 여유였던 것이다.
광신에서 풀려나온 자의 탈력감 같은 것이 그를 냉소적이면서도 여유있게 만들고 있었다.
죽음조차 안식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욕을 불태우며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협력자는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보타주를 하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이었다.
결국 이한은 자신이 아는 다른 이름을 꺼내야 했다.
“말론이라는 자는 알겠지?”
“말론? 그 고지식한 마법사는 언령의 힘에 너무 경도되어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종주나 스승은 그러한 점 때문에 그를 신뢰했지만, 정직한 혀는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지. 혈교의 무식한 놈들이 그를 끌고 갔네. 마법진을 원하는 혈교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했거든. 그런데 당신, 말론이라는 이름까지 알다니 정말 열심히 조사를 했어.”
“혈교의 총단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군.”
“그런 사실까지 알다니! 대단하군. 그렇지. 생각해보니 말론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만한 능력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가 끌려간 곳이 혈교의 총단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그곳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있는 곳이야. 혼돈을 섬기던 과거의 나조차도 멈칫할 때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이제는 개인적인 충고까지 하는 에이지트를 향해 이한은 다시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말론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너희가 온 곳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것, 맞지?”
“맞다. 하지만 말론의 협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나는 당신이 어떻게 차원도약 마법진을 만들 것인지 궁금한데?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물자와 에너지를 당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제국의 황제라도 되나?”
에이지트의 말에 이한은 자신이 무엇인가 오해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작업을 지휘하던 곳에 쌓아두었던 물자로는 부족한 것인가?”
이한의 질문에 에이지트는 코웃음을 쳤다.
“차원도약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재료가 필요한데, 겨우 그 정도의 준비로는 어림도 없지. 내가 건설하던 것은 공간도약 마법진이다. 저 하늘 높이 어딘가로 날려버리는 마법진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의 몇 배는 될 만한 높이로 날려버린다고. 혈교의 멍청한 배반자들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지. 그런데 마법진은 한 번 사용하면 그것으로 끝이야. 마법진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모조리 쓸모가 없어지지. 이봐. 나를 쫓아서 이곳까지 온 사람. 이곳에서 생긴 내 제자를 죽인 그대에게 절망을 선물하지. 차원과 관련된 마법에는 무지막지한 비용이 든다네. 작은 나라는 감당하지도 못해. 만약 당신이 차원도약마법진을 만들고 싶다면 내가 쌓아놓은 옥의 100배는 더 필요해.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양이야. 그리고 나는 아직 차원도약 마법진을 가동시킬 에너지에 대해서는 말도 하지 않았다네.”
“씨발.”
이한은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