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492)
말을 달리니 야생의 오우거 무리가 나타났다.
놈들의 달음박질이 빠른 게 아니었기에 견제할 것도 없이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거라 믿었으나, 눈깔 하나가 날아간 놈이 나무를 깎아 만든 것같은 거대한 말뚝을 투창처럼 던지며 기가 막히게 진로를 방해한 탓에 결국 냅다 달려가서 뚝배기를 깨야했다.
짝눈깔의 두 손을 못질하듯 검을 박아 고정한 뒤, 뤼밍스제 투구의 힘을 빌어 박치기로 대가리를 깨고 나니 다른 오우거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도망치고 칼 칸시는 세상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숲이 우거져서 도보로 움직이니 이번엔 고블린과 오크가 나타났다.
따로 나타난 게 아니라 정말 동시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마저도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식의 경쟁 구도가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황상 오크들이 고블린을 고기 방패로 쓰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같잖게 포위망까지 구사하며 사냥을 시도하더라. 이번엔 고블린의 대가리로 오크들의 대가리를 한참 깬 뒤에야 놈들이 도망쳤다. 나는 고블린의 대가리가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칼 칸시는 이번에도 세상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숙영지를 꾸리고 야영을 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트롤이 나타났다.
그래 씨발, 트롤. 진짜 트롤! 땅이 울리길래 좆같은 오우거 새끼들이 또 지랄이라고 여겼는데 나무를 뭉개버리며 나타난 건 민둥머리 오우거가 아니라 놈들만한 덩치에 털은 수북한 트롤이었다!
사실 코가 좋은 칼 칸시가 이미 진즉에 트롤임을 파악하고 빠지자고 했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몬스터 퍼레이드의 향연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놈이 오는 걸 두고 보기로 했고, 그 대가로 깊은 빡침을 얻어야 했다.
그리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빠지지 못한 건, 비단 길을 돌아가거나 잘 때 못 자서 컨디션이 박살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도저히 좆같아서 못 참겠더라고.
그래도 이번엔 아예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트롤의 피를 사방에 뿌려 놓는 것만으로도 불침번 걱정은 없었으니까. 숙영지에서 놈을 떨어트린 뒤 목을 따서 머리통만 들고 와 주변에 피를 뿌리는 나를 바라보는 칼 칸시의 눈은 묘하게 침착해서 해탈한 사람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렇게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길 사흘 째.
“손님, 내가 잠깐 쉬면서 수소문을 해봤거든…”
모처럼만에 여관 있는 마을에 도착해서 숙박다운 숙박을 하며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칼 칸시가 입을 열었다.
나름 규모가 있는 마을이라서 점심 무렵에 도착했음에도 아예 묵고 가기로 결정한 덕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으나, 작정하고 쉰 나와 달리 칼 칸시는 투철한 직업 정신을 기반으로 허투루 쉬질 않았다.
“이 근방에 유명한 몬스터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하더라고.”
“놀랍지도 않네. 평범한 동물보다 몬스터를 더 자주 마주치게 되는 거 같으니.”
말이 좋아서 ‘같은’ 거지, 우리는 진짜로 야생 동물보다 몬스터를 더 많이 상대하며 이곳에 도착했기에 팩트에 가까웠다. 그래도 칼 칸시가 주워 온 이야기인 이상 우리도 간과하기 힘든 이상징후일 수 있다고 여기며 귀를 기울였더니, 녀석이 오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외눈박이 오폴이라는 놈이 이끄는 오우거 집단이 흩어지고, 고블린 군락을 습격해서 병사처럼 써먹던 오크들이 와해되고, 마을 다섯 개 정도를 날려 먹은 트롤이 죽은 채로 발견 되었다더라. 심지어 모험가 길드에도 보고된 바가 없어서 굉장히 빠르게 소문이 퍼지는 중인가 봐.”
“뭔 한낱 몬스터 새끼들이 이름까지 있고 유명세를…”
물로 목을 축이며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다, 뭔가 이상해서 멈춰버렸다.
외눈박이? 고블린과 오크 조합? 트롤?
“여기 몬스터들은 다 그 모양인 거 아니었어?”
“그랬다면 마을이 좀 더 많이 없었겠지.”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사흘간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게 있었기에 이제는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당장 이 마을만 하더라도 마족이면서 인족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자경단 내지는 병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조차 오크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나름 규모 있는 형태로 마을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목책 언저리에서 열심히 가동중인 결계수정이라는 물건들 덕분이다.
처음에는 사방팔방이 몬스터라는 이야기를 듣고 여긴 정말 마굴이라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마족령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것이 대부분 전사들이라서 몰랐을 뿐, 마족의 특징은 강력한 종족값보다는 거기서 비롯된 마법의 보편화에 있었다.
이 마을에서 막대기 들고 뛰어노는 아이한테조차 동화 몇 개 주면서 마법 써 보라고 하면 미미한 빛 마법 비스무리한 거 하나 정도는 쓸 줄 안다.
물론 전문 지식이 없이 그딴 짓을 반복했다간 마법이 폭주해 난리가 날 수 있는 건 똑같기에 실패해도 문제가 없는 수준만 사용하지만, 마력뿐만 아니라 마법을 사용한다는 감각조차 본능적으로 조금은 가지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런 점은 철저하게 이론으로 배워야하는 인족보다는 날 때부터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용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거기서 파생되어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물건으로 승화한 게 바로 결계수정이다.
제작은 전문적인 지식을 터득한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지만 마족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 설치하고 마력을 주입하면 일정 범위 내에 마치 벌레 쫓는 주파수를 펼치는 것처럼 신호를 흩뿌려서 몬스터들이 기피하게 만드는 마을 구성 필수품에 가까운 물건.
일정 간격으로 꾸준하게 마력을 주입해줘야하지만, 마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다. 덕분에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조차 얼마 없는 마을조차 어느 정도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워낙 한정된 정보 탓에 이티스엘에 있었을 땐 마족들은 아침 운동으로 오크를 잡고 마을 축제 때 오우거 학살 잔치를 벌이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더라고.
칼 칸시의 말마따나, 사람사는 건 어딜 가나 다 비슷비슷한 법이었다.
“어떻게 할까? 눈에 띄는 걸 원치 않으면 지금이라도 경로를 좀 수정할까?”
겨우 며칠밖에 동행하지 않았음에도 칼 칸시는 내 의중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것도 알려 준 거겠지. 계속 이렇게만 해준다면 상황에 따라 종신계약도 고려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그러면 얼마나 지연되는데?”
중요한 건 시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트린 몬스터 대가리에 대한 소문이 예상보다 빠르게 퍼지는 건 솔직히 좀 무서울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성녀님과 접선하고 나면 소문이 퍼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글쎄… 못해도 사흘? 나흘?”
“안 돌아가면 언제 도착할 수 있지?”
“사흘. 변수가 없다는 가정하에서.”
일말의 주저도 없이 돌아온 칼 칸시의 대답은 허언이 아니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 듯했기에, 나 역시 종업원이 들고 오는 음식들을 받아 식탁에 올려 두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간다. 이틀로 줄이면 지금까지 지불한 금액의 반절을 더주지.”
“…아주 군침도는 제안이야 손님. 돈 주기 싫다고 떼쓰면 안 된다?”
둘의 식사량 때문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음식들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것인지 자신이 받게 될 돈을 생각하고 입맛을 다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칼 칸시는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
렌기에 에파가시에라에서의 정신없는 하루 일과를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은 데오니 비레는 마지막 안건에 서명을 한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시와 교단을 버리고 떠나게 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명령과 안건을 진행하기 위해 자신의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 우습기도 했지만, 이를 두고 한탄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과로로 아파오는 두 눈을 잠시 누르며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멈춰있다가 눈을 뜬 데오니의 시선이 무심코 탁자 한 켠에 놓여진 자신의 뿔조각으로 옮겨졌고, 그녀는 요 며칠 항상 그래 왔듯 별 생각 없이 뿔조각을 들어 살펴보았다.
아직까지도 계시는 없었다.
제국의 연락책이라며 뿔조각을 들고 온 이도 일방적으로 정보를 보낼 수만 있을 뿐, 받을 수 없었기에 이티스엘과 제국이 어떻게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도 도시 밖은 악신의 추종자들이 신성을 더럽히며 공격을 시도하고 신역을 어지럽히고 있으며, 상황은 예상했던대로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냉철하게 판단했을 때, 상황은 절망적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홀로 순교하는 상황이었다면 데오니는 아무런 조바심없이 기꺼이 그리 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생명은 수천 단위다. 혼자 순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과연 이게 옳은 판단인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게 당연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분명 자신의 일부였던 뿔조각을 보고 만지고 있노라면… 뭔가 묘한 안도감이 들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든다.
“계시…인가?”
마왕군을 적으로 돌리는 이들에게 나쁠 게 없는 제안이긴 했다. 인족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이리라.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들이 마족령을 횡단해 인족들과 합류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절반 넘는 인원들이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
교단과 뜻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들조차 암암리에 이번 작전을 ‘최후의 순례길’ 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보고 있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부디 저 악종들을 물리칠 길을 비춰주시옵소서.”
확인을 위해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마찬가지니, 이는 계시이리라.
데오니는 달빛이 드리우는 창가에 앉은 채 조용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