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11)
마족이 쌓아 올린 성이라고 해서 인족의 성보다 방어적으로 엄청난 성능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어디서 나든 결국 돌은 돌이요 나무는 나무 아니겠어? 저 드워프들이 마법으로 쪼물딱 거려서 마개조한 결과물로 짓지 않는 이상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나마 더 좋은 재료에 더 잘난 건축 기술 가진 놈이 만든 게 튼튼한 거지.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상이다 보니 성의 내구도를 결정짓는 요소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마법 공격에 대한 대책. 교단이 렌기에의 성벽과 성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성법을 때려 박으며 보수했던 것처럼 다른 성들은 마법사들이 열심히 마법진을 그려 넣어 마법적인 공격에 대비한다. 그러다 보니 공성전도 자연스럽게 전생의 중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양상으로 굴러간다.
달라붙어서 뚫기나, 더 강한 놈이 붙어서 뚫기 말이다. 그러한 대전제가 깨진다면 성문에 틀어박힌 마법이 어떤 여파를 가져오는지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 나는, 걸음조차 멈춘 채 작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존나 시원하게 뚫렸네.”
일격에 안쪽의 철문부터 밖의 나무문까지 아주 제대로 박살 났다. 예카트리나가 봤다면 공성추로서의 입지에 위협을 느끼며 경쟁심을 불태웠을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거래 성립이라고 봐도 되겠지?”
“물론이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밋. 급여는 한 달 뒤에 절차에 맞춰 지급하도록 하죠.”
사뿐히 내 옆에 착지한 에밋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악수를 권했고, 나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 손을 맞잡았다.
만족스럽지 않아 보이는 건 아래에서 우리의 악수를 구경하고 있는 병사들과 일부 시민들 뿐이었다.
“에, 에밋님? 지, 지, 지금 대체 무슨…?”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팔방 침을 튀겨 가며 병사들을 지휘하던 이가 자신의 집을 부수는 사육사를 바라보는 비버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에밋은 한 치의 흐트러짐없이 약식으로 예를 차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됐네. 백작이 급여를 삭감해서 골이 있었거든.”
“그, 급여? 삭감? 백작이 말입니까?”
백작’님’이 아니다. 그 작은 차이를 눈치챈 나는 슬쩍 에밋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바람잡이 역할 좀 해주시면 교역 금화 2개 올려서 급여를 책정해드리죠.”
“…허허.”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매우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였지. 그 증거로 에밋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서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히고는 자신에게 쏠린 이목을 휘어잡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비록 그간 자네들과 자주 얼굴을 비출 일은 없었던 사람이네만, 그래도 전전대부터 이어졌던 계약에 의해 비레어를 이롭게 하고자 최대한 노력했다는 건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네. 매번 겨울마다 사비로 식량을 나눠 주기도 했었잖나? 유지 보수에도 가끔 보태고.”
“그, 그야 알고 있습니다만…”
놀랍게도 ‘뭔 소리야?’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 돈 쓰는 것도 잘한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나보다. 권력자 옆에 붙은 조언자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에밋의 변절을 보고 처음 보내는 시선은 ‘대체 당신이 어째서?’에 가까웠다.
자신들을 생각한다고 여기고 있던 인물에게 배신당했다는 느낌. 덕분에 에밋이 어떤 인물인지 살짝 윤곽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비록 당대의 비레어가 구제 불능의 쓰레기라 하더라도 그놈 할애비와의 연이 있다 보니 언젠간 사람이 될 거라 믿고 인내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네. 자네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가 계속 이어졌겠지만, 나도 고용된 마법사에 불과한 입장인지라 더 적극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다.
저 너머에서는 한창 비상이네 뭐네 하고 난리가 난 상태인데 말이다. 이것도 마법인가 싶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그냥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해온 에밋이 선 보이는 카리스마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치를 부리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의 의지마저 거스르는 마왕군의 편에 붙어 먹는 꼴을 보아하니 견디기 힘들더군. 그 와중에 급여까지 삭감했다네. 그들에게 돈은 사리사욕일지언정 우리에게 돈은 스스로의 값진 노동의 대가이자 자부심이지 않나? 하다못해 푼돈에 불과한 급여만큼이라도 내 일을 다 하기 위해 방금 전까지 습격에 대항하고자 했지만… 부질 없더군.”
그가 만지는 금화만 하더라도 결코 저들과 ‘우리’로 묶일 수 없을 수준이었지만 에밋은 참으로 뻔뻔하게 ‘우리’를 입에 담았다. 이 인간 사실은 마법사이기전에 어디서 정치인이라도 해먹었던 게 아닐까.
칼 칸시도 그렇고… 마족령, 인재가 많네.
“마신의 기적이 우리를 비추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렇게 용사를 마주하고 나니 신을 부정하며 사리사욕이나 챙기는 이를 곁에 두는 마왕군을 믿기가 힘들더군.”
“요, 용사?”
정중히 나를 가리키는 에밋의 손을 따라 이젠 내게로 이목이 집중된다. 이에 뭔 반응을 보여야 좀 극적일까 진땀을 빼는 와중에 내 의지와 달리 에스테에서 찬연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간악한 에스테가 ‘이럴 땐 이래야 효과가 좋아!’ 따위를 떠들고 있는데 저들은 숭고한 무언가라도 본 것처럼 경악하고 있으니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밋은 그렇게 생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선에서의 소문은 모두들 알 거라 생각하네. 마왕군을 향해 신벌이 내리고, 언제나 마왕과 대적하던 빛의 에테가 점지한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마신의 용사마저 인족과 함께 마왕군을 척졌다는 이야기 말일세. 사실이었네. 심지어 그냥 인족의 편에 붙은 게 아니라 마왕군에게 핍박받는 마신교와 신앙인들을 돕기 위해 이 마족령 깊은 곳까지 단신으로 왔지.”
“마, 마족이 아닌데도 말입니까?”
“보다시피.”
사실 바람잡이 하나 더 심어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응도 좋고 대응도 좋다. 저 멀리서 여전히 비상 사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소란이 퍼지고 있었지만 이미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마족의 신께서 정하신 일이네. 실제로 신실한 이를 구하기 위해 종족을 불문하고 이곳에 당도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어디 있겠나?”
민간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병사들마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당황한다. 옆에서 에밋이 슬쩍 신호를 줬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지금은 내가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맨 얼굴로 말하는 건 심히 부끄러워서 투구를 꺼내 썼다.
“마신께서는 당신의 자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허나 그분의 뜻에 따라 용사가 된 이상, 저는 그분을 등진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손잡이에 살짝 힘을 주자 귀신같이 알아먹은 에스테가 좀 더 밝게 빛났다. 이제 이 거대한 사기 아닌 사기극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가슴 아픈 현실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찰나, 병사들을 지휘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마신님을 등진 적이 없습니다!”
“증명하십시오.”
“예?”
“증명하십시오. 과거엔 여러분이 품고 있는 신앙이 곧 증거였으나, 마왕군의 사특한 술수로 인해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가볍게 뛰어 건물 옥상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비키면서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는 행동으로 증명할 때입니다.”
지휘관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고 무릎 꿇었고, 그 행동은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투구 안에 대본이라도 있는 겐가?”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내려온 에밋이 짙은 미소와 함께 신기하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피며 조용히 대답했다.
“대본이 없어도 되는 마법사하고는 달라서 말이죠. 금화 세 개로 해드리겠습니다.”
“최고의 고용주로군.”
완전히 도시 내부를 장악한 건 아니었지만 시작이 좋았다.
나를 쫓느라 주변에 모여 있던 병사들을 에밋과 지휘관의 도움으로 빠르게 규합한 나는, 다른 이들에게도 항복을 권고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마신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사리사욕에 심취한 비레어를 따르지 말지어다!”
“성녀님과 용사님을 따르라! 에밋님도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으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주변에 있는 이들은 알아서 구호까지 만들어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술렁거림이 커지며 하나둘씩 사람들이 합류하며 규모가 늘어났다.
성녀님의 정보대로 애초에 영주를 향한 민심이 바닥을 치던 곳이라서 그런가, 저항하는 이보다 동조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물론 거기엔 에밋의 이름도 한몫했다.
“에밋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뭐가 말인가?”
“수전노라는 별명, 억울할 만 하네요.”
사실 그냥 한몫한 정도가 아니라 꽤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성녀와 용사까지만 해도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들이 에밋의 이름까지 나오면 눈에 띄게 동요한다. 이 사람이 마냥 좋은 사람인 건 절대 아닐 텐데, 얼마나 정치질을 잘해왔는지 눈에 보일 지경이다.
“이 정도면 그냥 위정자아닙니까? 무슨 마법사가…”
“권모술수도 머리가 좋아야 능숙한 법이지. 그렇게 머리가 좋으니 마법사 하는 거 아니겠나?”
순식간에 불어난 사람들이 뭔 빨랫대에 옷가지까지 달아서 제멋대로 깃발을 만들어 흔드는 광경을 바라보며 표정 관리에 실패한 나는, 투구를 빨리 꺼내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에밋의 자기 자랑에 꼬투리를 잡았다.
“그게 다 몸이 멍청해서 머리가 고생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지금 대체 뭘 들은 거야?”
세상 기이한 걸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두 눈을 좌우로 굴리며 고민하는 에밋의 모습은 퍽 볼 만한 것이었다.